불 꺼진 듀게 산책

하루 중 어느 시간대는 우리의 감정이 그려지는 캔버스와 같습니다. 마음을 찍는 사진관이죠. 그게 언제인지는 각자 다르겠고요.
저는 해뜨기 전이나 해질 무렵에 걷는 걸 좋아합니다. 그럴 때 하는 산책은 힘을 주지 않고, 크게 마음 기울이지 않고 쓰는 낙서와도 같아서 감정이 가는 대로, 자연이 이끄는 대로 스르륵 걸음을 떼어놓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산책이니, 소요니 하는 것들이 모두 같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흩어지는 걸음은 두 발의 리듬이 만드는 엇박으로 인해 항상 건강한 자태를 유지하는 것이고요. 사유 하나 없고 시선에 새로 잡히는 것 하나 없어도 마음이 차분하고 싱그럽습니다. 

산책하는 자는 거처가 없어서 걷는 게 아니라 돌아갈 곳이 있음에도 멀리까지 나갑니다. 신비롭죠. 걷는 자를 돌보는 배경은 이 우주에서 가장 영예로운 자의 위엄이 있고, 그가 들어서는 공간에는 노을이 지다가, 어둑해지다가, 어느덧 달빛이 신성의 메아리 같은 여운을 남기니까요.
<하워즈 엔드>에서 어느 초낭만적인 은행원이 별을 따라 밤새 걸었다는 일화는 산책의 극치라고 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루소나 칸트의 그것 역시 너른 울타리 너머로 훌쩍 나아가 보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산책은어느 지점에 이르러서 변곡을 그을 수밖에 없습니다. 급격하지 않아도, 자신이 의식하지 않아도 변곡점을 찍어요.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산책의 위선이라고 들먹이는 견해도 있는데,  (근본주의 성향의 낭만주의자들에게는)  산책은 발의 생리적 진실을 추구하는 태도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기 때문에 지나친 비난이라고 생각합니다. 

산책과 비슷하면서 현저히 다른 의미의 만보라는 것도 있죠. 만보는 도시의 거리를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히며 걷는 것이며, 간판과 뭇 시선들, 거리의 공기, 무감각과 권태를 뚫고 동시에 흔들거리며 걷는 것입니다. 산책의 끝에서, 산책과는 단절을 이루면서 이루어지는 걸음이죠.
만보는 머리 속에 쓸데없는 고뇌가 비집고 든다는 점에서 현대의 운명과 비슷합니다. 중요한 문제가 있고, 그걸 다음에 해도 좋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그것이 맘대로 되지 않을 때 만보하게 되더군요. 가끔 멋진 볼거리를 만나서 시선을 빼앗길 때에도 만보는 걷는 자와 분리되어 있습니다. 
하지 않아도 좋을 짓을 한다는 잉여의 느낌 때문에 만보는 결국 우울에 당도하기 쉬워요. 그래도 상식의 범람 속에서 냉소적인 포즈를 취하는 것이 다시 하나의 상식이 되어버린 현대의 모드에서 만보도 중요합니다. 냉소에 대하여 우울도 할 말이 있는 것이니까요.

오늘 새벽 나가 걸어보니 가을걷이가 끝난 느낌이더군요. 서울은, 특히 아파트촌은 걷도록 난 길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현대에는 옳은 길은 없고 모든 길이 다 옳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걸을 수 있는 길이 더 이상은 줄어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듀게 또한. - -)

    • 아무리 원래 한산한 듀게이고 원래 주말엔 더하다지만 하루에 글 두 개는 좀 많이 쓸쓸하네요. ㅋㅋ
      • 볕좋은 외진 골목에 앉아 있는 기분도 그다지 나쁘지 않잖아요. 뒤뜰에서도 할 수 있는 건 많아요. 탁구도 치고 바둑도 두고 격정시대도 상상하고... hehe
      • 미술이든 역사든 쓰고 싶은 글이 많은데 요즘 일이 바쁘다 보니 게시판에 전혀 손을 못 대네요. 머릿속에 구상은 진짜 산더미인데 ㅋㅋ
    • 누구 있나 선술집 엿보는거 같아요 주모만 보이는듯,전 산책과 배회가 같은 발걸음 입니다 흔들거리며 만보걷기는 다시 데리고 오지만 생각들을 데리고 나가죠,달에 조금 가까이 가보자 하고 걸어도 그대로 있어 신기할 때가 있었는데
      • 활발했던 과거를 기억하면서 덤덤하게 미래를 분할해보는 짓을 하는 것도 나름 재미있어요. 가.영님을 듀게 주모로 인정하지 않을 유저는 없을 거에요.
        • 주모는 듀나씨죠 듀나 주막
    • 산책 좋아요. 나무들 보면 이맘때는 특히 좋은 것 같습니다.


      이런 저런 명멸하는 생각들 그대로 두면서 걷다 보면 마음 회복도 되고요.


      '하워드 엔드'의 하급관리 레너드 말씀이신가요? 주인공이 그에 대해서 '책껍데기와 친해서 결국 자신을 괴롭힌다(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을 원하므로)'라는 평가를 하는 대목에서 마음이 안 좋았죠. 저도 레너드에 속하는지라.

      • 네, 레너드에 대한 감상이죠. 하워드 엔드는 현상에 관해서가 아니라 그 안에 놓인 등장 인물들의 시선을 조명한 게 좋았어요. 
        존재에게 귀 기울여주고, 이해해주고, 알아주는 게 뭔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 영화였습니다.  
    • - 혼잣말
      마트에 다녀오는 길, 뒤에서 너댓살 남자 아이가 엄마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었다.
      "엄마는 여자고 할머니는 고구마야."
      흠칫 놀랐지만 뒤돌아 보지는 않았다.

      요즘 아이들은 그 나이쯤이면 은유와 환유의 스타트라인에 서 있는 것 같다.  
      말을 조합하는 두 가지 규칙을 모르는 채 사용하면서 어른들을 놀래킨다. 그럼 어른들은 깜짝 놀라면서 '이 아이가 천재가 아닌가' 라고 남몰래 씩 웃는다. 어이없는 미소랄까.

      밀란 쿤데라의 <생은 다른 곳에>에서 야로밀과 그의 부모들이 했던 짓이 무수한 가족 내부에서 되풀이되고 있을 것이다. 얼마나 행복한 풍경일까.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한 순간을 마주하는 걸 테니.
      그러나 어느 때가 되면 아이는 이 사회로부터 '로보토미'를 받을 것이다. 너무나 서서히 이뤄지기 때문에 은은히 불지핀 냄비 속의 개구리처럼 느낌도 없을 것이다.  
    • 느낌도 없을것이다 안도감이 들어요 근데 저아이 할머니 화나겠다
    • 어둠 속에서 작은 불씨를 흩뿌리는 글이군요. 잘 읽었습니다. 

게시판 2012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462,410 01-31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147,944 12-31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122,155 04-01
130354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10 189 12-31
130353 아바타 3를 보고 유스포 2 194 12-31
130352 [핵바낭] 올해 잉여질 결산 잡담 14 336 12-31
130351 아바타: 불 과 재 보고 왔어요 짤막 소감 6 233 12-31
130350 [영화강추] '척의 일생' 8 250 12-31
130349 흑백요리사 2 8~10회, 싱어게인 4 탑 4 결정 6 287 12-31
130348 Lacombe Lucien(1974) 7 131 12-31
130347 [관리] 25년도 보고 및 신고 관련 정보. 15 325 12-31
130346 Isiah Whitlock Jr. 1954 - 2025 R.I.P. 2 139 12-31
130345 [왓챠바낭] 우편배달부 말고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잡담입니다 12 268 12-31
130344 [넷플] 말 많고 탈 많은 '대홍수' 드디어 봤습니다 14 456 12-30
130343 [반말주의] 다들 올해 고생 많았어!! 새해 모두 건강하고 복 터지길 바래!! 12 188 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