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백만원/ 브레송/ 스트로브


지난 일 년 동안 지인의 어떤 작업을 도왔어요. 보수가 협의된 사안이 아니었고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 도운 거였어요. 전혀 염두에 둔 문제가 아닌데 어제 점심에 지인이 저를 불러내더니 봉투 하나를 슥 내밀더라고요. 삼백만원인데, 고마운 마음은 더 크다면서요.
사양하고 말고 승강이 하는 게 어색해서 얼떨결에 받아 가방에 분명 넣어왔는데, 집에 와서 보니 봉투가 없더군요. 제가 자신을 신뢰할 수 없을 지경으로 요즘 셀프 사건사고가 자주 일어나니까 정신이 멍해집니다. 봉투는 어디로 정처없이 떠난 걸까요? 흠

심란해서인지 잠이 자꾸 끊겨서,  로베르 브레송과 장 마리 스트로브의 영화 두 편을 봤는데 난데없이 이런 짐작이 들더군요.
아주 뛰어난 검술을 자랑하는 무사를 기용하고 싶을 때, 로베르 브레송 감독이라면 정말  무사를 찾아내서 기용했겠구나, 장 마리 스트로브 감독이라면? 그는 오랫동안 서예에 몰두해온 선비를 찾아서 기용했겠구나.
그 선비는 붓질하던 그 감각으로 칼을 들고 상이한 감각들의 상충에 대해 고뇌하면서 점차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것을 즐기기 시작할 것이고 그때 스트로브는 카메라를 들이대고 영화를 찍는 거겠구나.

브레송 감독의 시네마토그래프 개념은 삶의 시간적 빚어냄, 그 산물을 그대로 셀룰로이드 필름이라는 물질적 조건을 뚫어버리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모델'이란 살아가는 사람, 저마다의 오랜 시간 동안 지난한 노동으로 살아온 사람을 영화로 이입시킨 배우이니까요.  배우가 아닌 배우인 거죠. 스트로브 감독은 그런 식의 초대를 행하지 않는 거고요. 

엄~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이 따로 있어서 게시판을 열었는데 여기까지 쓰노라니 또 까묵해버렸어요. 하쿠나~ (조기 치매가 분명함.-_-)
    • 쓰려던 말은 생각 안 나고 문득 이 시가 떠올라서... 


      지인에게 삼백만원이 큰 돈인 걸 아니까 마음이 더 안 좋아요. 




      -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박철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국 쑥국 쑥국새처럼 비는 그치지 않고


      나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다시 한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다가 문 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 찾아오고


      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아내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어느 한쪽,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숲 속 깊은 곳에서 쑥꾹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


      홀로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 문 밖에 섰나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


      내겐 아직 멀고 먼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 그돈 다 써버리린거에요? 그나저나 마음 콕 있는
        • 봉투를 열어보지 않아서 배춧잎 만원 권이었는지 호박잎 오만원 권이 들어 있었는지도 몰라요. 그냥 봉투 자체가 사라져버렸어요. 어디에다 흘리거나 할 상황이 전혀 없었는데... 친구들이 제 뒤만 따라다니면 웬만한 수입이 보장된다고 놀리던 게 괜한 지적질이 아닌 거에요. 흑

          • 윽,바보 아니고 근데 흘리지 말고 먹으라고 울엄마가 맨날 그랬어요
    • 서예가의 익숙한 어색함 그런게 좋은거죠 어색함이 익숙한건가,근데 돈 어디 갔을까 같이 가고 싶지 않았을까,부유한 사람 또 부유할땐 뭐 와닫지 않지만 보통은 주인 만큼 아쉬운듯 해요
    • 그나저나 요즘 아이들도 셜록 홈즈를 읽는군요. 외출에서 돌아오는데, 우리 동 입구 계단에 초딩이 앉아 홈즈의 탐정놀이 책에 입문하고 있는 중이더라고요.
      저도 그 나이 무렵에 읽었던 기억이 나서 미소가 지어졌어요. 방학 때마다 집안의 제일 컴컴한 장소에서 <수학의 발견> <영어 문법책>을 뒤적이던 무렵이었죠.  아니면 이런저런 세계 유명 단편집을 읽으면서 잠깐 충격에 빠지거나 기타 등등의 책에 코를 박던 무렵이었죠.  
      그러다가 홈즈의 탐정 소설도 접하게 된 것인데, 정말 재미있었어요. 너무 재미나니까 나중엔 <뭘 읽었지?> 싶게 머리가 텅 비었던 기억이 더 인상에 남아 있다는 것. - -
      올해 초에 <주석달린 셜록 홈즈>라는 5권짜리 전집을 구입했는데 아직 손도 안 대고 있다는 건 안 비밀~  왜 그런지 모르겠는제 어쩐지 어렸을 때 접한 책일수록  제겐 주석과 해설이 필요하더라고요. 
    • 에궁 아까와서 어쩌나


      담부터는 받자마자 현금이면 가까운 은행으로 얼른 가시길 바랍니다. 혹은 현금받지마시고 카톡으로 달라고하세요

      • 아깝죠. 봉투 받는 순간, 책 무게를 못 이기고 살짝 휘어진 책장들을 바꿔볼까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도운 일이 사례금을 받을 사안도 그럴 관계도 아니기 땜에 계좌번호 물어봤자 알려주지 않았어요. 제 특이점이 잃어버린 건 금세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성격이라 이미 아까움은 희미해진 상태입니다. ㅎ

    • 참 그말을 안했는데요 빠진데 혹시 짐작가면 근처 파출소나 경찰서에 물어보세요 맡기는 사람들 많아요 필요한 사람이 잃어버렸을까봐
    • 너를 찾든 나를 잃든 오늘은 비긴걸로 하죠,내가 나한데 하는 말로 점 콕 찍었습니다, 세시에 흰 눈이 내리네


      흰 눈이 내린다

      마당 가득 흰 눈이 내린다

      누군 히말라야에 가서 초라한 너를 발견하였다는데

      네시 약속을 위해 집을 나서는 길

      차마 흰 눈 위에 발을 딛지 못하고

      마당가에 섰다가 거대한 나를 보았다

      함박꽃이 되어 내리는 올해의 첫눈

      너를 찾든 나를 잃든 오늘은 비긴 날로 하자

      그러니 우린 하나다

      지금이라도 우연히 골목에서 만나면

      함박꽃 한 술 떠 서로 먹여주며

      아프게 살아온 지난 여름은 잊도록 하자

      그래 그러라고

      세시가 지나는데 흰 눈이 내린다


      * 박철시집[불을 지펴야겠다]-문학동네 
      • 이 시 대하니, 오늘 눈내리면 기분이 좀 개일 것도 같네요. 12월 5일이군요. 19살 때 어떤 남자가 제게 마음고백을 했던 날짜인데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저에게 특별한 사람이었던 걸까요.... ㅋㅎ

        • 뭐 이제는 모를 멀리 온것도 아니니까지만 늙어서 누가 물어봐도 안까먹었을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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