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 유토피아' 짧은 잡담

한국 영화를 개봉한 주에 본 것이 얼마만인가 싶습니다. 거의 혼자 보러 가는데 모처럼 극장 동행이 생겨서 이런 일이 생기네요. 

보고 나서 듀나 님의 글을 읽으니 생각거리도 생기고 특히 아쉬운 점 지적 부분에 많이 동의가 됩니다.

아래 스포일러 약간 있어요.                                            



원인은 모르지만 다 파괴되고 요 아파트 한 동만 남아 있는 세계, 라는 설정만 받아들이면 영화의 진행에 헛웃음이 난다던가 어이없음의 무리수는 없었어요. 지루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아파트 사람들이 당장의 안위에 코를 박고 날을 세워 서로 공격을 해대고 생존법칙 이외에는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이 한국 사회의 현재를 그대로 떠올리게 합니다. 아이디어 하나로 상징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할 때 소소한 이야기들이 허약하거나 잘 섞여들지 않고 따로국밥 느낌이 드는 경우가 있잖아요. 이 영화는 그런 게 안 느껴지고 작은 사건들이 그럴 듯하고, 서로 잘 맞물려 있었고, 이런 차곡차곡 쌓아진 얘기가 후반에 제대로 터트려집니다.  

 

박보영 캐릭터가 어떤 관객들에게 '철이 없다'로 비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비쳐지지 않는 방향으로 나갈 수 없었을까. 박 배우 역할을 이런 시선으로 보는 것이 현재 한국의 상당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적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하는데 영화의 시간이 길어지더라도 이 문제를 좀 잘 풀었으면 얼마나 더 괜찮은 영화가 되었을까요. 듀나 님 리뷰에 '선은 재미가 없지 않습니다. 도달하기 어렵기 때문에 더 재미있을 수 있는 겁니다.' 라고 쓰셨는데 악의 평범함을 넘어서는 입체적인 선한 역할을 탐구하는 것이 시나리오들의 큰 숙제 같습니다. 악은 관성적인 진행 방향이지만 선은 현실의 진행 방향에서 그 관성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선하려면 마음과 머리를 더 써야 하고 실행에 있어 더 힘듦니다. 

이병헌의 배역이 참으로 찰떡입니다. 미안한 말이지만(안 미안함) 외모부터 이미지까지 역할에 잘 어울리면서 연기가 물만난 고기 같네요.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이병헌 연기 칭찬만 주로 하는 거 아닌가 몰라요. 

 


아파트에 사시나요. 저는 아파트에 삽니다. 처음 아파트에 살 때 관리실 방송이 거실에 울려 퍼질 때의 난감함이 기억납니다.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네요.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거치고 도시로 나가야 인간답게 살 수 있다고 믿게 된 한국 사람에게 집이란 무엇인가. 그리하여 선택하게 된 '아파트'란 무엇인가. 실용과 기능적 고려만으로 수도 없이 지어진 네모네모 고층 건축물들. 모르긴 몰라도 주거 양식에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중이 우리나라가 세계 탑급 아닐까 싶습니다. 좁은 땅에 비해 인구가 많으니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긴 한데 저는 이 아파트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 씁쓸합니다. 마루에 앉아 비오는 마당을 볼 수 있는 집에 사는 것이 꿈인데 말입니다.    



                                                

  

 

    • 왜인진 모르겠으나 스포일러 경고에도 불구하고 다 읽어 버렸습니다. ㅋㅋ 근데 크게 스포일러 같은 내용은 없군요! 다행이구요.




      옛날 옛적에 봉준호가 만든 '플란다스의 개'가 물 건너 서양 쪽에 전해졌을 때 호기심에 찾아 읽었던 외국 리뷰 하나가 생각나요. "마치 디스토피아 SF의 병영 국가를 떠올리게 하는 기괴한 주거 양식. 로케이션을 어떻게 한 건지 신기" 뭐 이런 내용들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감명 받은 그 디스토피아 SF의 병영 같은 주거... 라는 게 걍 대한민국의 평범한 복도식 아파트 단지였어요. ㅋㅋㅋ 리뷰어 잘못은 아니겠지만 왠지 화를 내고 싶은 기분이 들었던 추억입니다. ㅠㅜ

      • 음... 그런데 한국식 아파트 문화가 해외에선 좀 많이 특이한 건 사실같습니다. 90년대 후반에 VHS로 신세기 에반게리온 보다가 레이가 혼자 사는 아파트가 어느정도 한국식인 모습이... 위화감이 들었음에도 뭔가 안느껴지는 깨림직함이란...
      • 갓 나온 영화라 신경이 쓰여서 적었는데 '약간'만 들어간 거 같아 수정했어요. 조금 상세하게 적으려다가 영화가 전달하는 바가 뚜렷해서 비슷한 글이 되는 거 같아 짧게 쓰고 말았어요. 듀나 님 글을 읽은 직후라 그 범위 안에 동어반복 같네요.ㅎㅎ


        '디스토피아 병영 국가'ㅎㅎ 우리야 그러려니 하고 사는 게 많지만 외부에서 보면 좋든 나쁜 의미든 신기한 게 꽤 있을 거고 그 중 대표적인 게 아파트로 대동단결이 아닐까 싶어요. 유토피아는 아닌 게 분명한데 일단 미래 세계에 먼저 도착해 있는 나라 같습니다. 



    • “도달하기에 어렵기에 더 재미있을 수 있다...”이 문장의 앞부분에 특히 더 동의하게 되는군요. 마치 세븐의 결말에서 이 세상은 아름답고, 싸울만한 가치가 있다의 정 반대처럼...


      다크 나이트의 배트맨이 그랬듯, 선은 조커같은 카오스의 유혹과 타락에도 굴하지 않고 일관된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 부분이 있어서(하비와 레이첼 중 대의가 아닌 사랑을 선택했었지만) 그... 선의를 시험에 들게 하는 부분과 그걸 이겨내는 과정이참 어렵습니다.


      ...쓰고보니, 요즘처럼 청소년, 청년, 중년, 장년과 노년 가릴 것 없이 이기심과 무례함에 사회화가 덜된 세상에서 저 또한 이기적인 욕망에 휘둘리기 쉽다는 점이, 왠지 제 개인적인 문제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부분에서, 사는 게 힘들고 갈수록 더 힘드네요.
      • 말씀하신 다크 나이트 '선의 일관된 태도'가 대세, 관성을 따르지 않는 태도 아닌가 싶어요. 악화 일로인 현실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 흐름을 따르지 않는 것 말입니다. 

    • 솔직히 어제나 오늘이나 한국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아파트인데 생각보다 별로 다뤄지지 않은 소재인 듯 느껴지네요. 마치 게임 속 금칙어인듯 말이죠. 사실 넘치는 말들보다 말해지지 않은 침묵이 더 많은 걸 말해줄 때가 있는데 그런면에서 의미 있는 예술적 시도이지 않나 싶습니다. 꼭 보고 싶네요.
      • 한국식 아파트 주거에 대한 연구는 나와 있을 것 같아서 책을 찾아 보니 대충 눈에 들어오는 책이 '콘크리트 유토피아' 3부작이란 게 있네요. 


        https://www.aladin.co.kr/shop/common/wseriesitem.aspx?SRID=97363


        3부작 첫 권이 영화와 제목이 같은데(감독이 참고했겠...지요.) 절판이고요, 2권 '아파트 게임'까지 강남 중산층과 아파트단지 개발을 연관지었다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3권은 살짝 방향이 다르고요.  


        프랑스 지리학자가 썼다는 '아파트 공화국'이란 책도 있습니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80766&start=slayer


        저는 한두 번 검색했으나 아마 관련 연구서는 많지 않을까 싶어요. 영화, 드라마로는 본격 다룬 게 생각나는 게 없지만요. 그런 의미에서 저도 이 영화에 지지를 보내면서 '드림팰리스'도 언제 봐야겠습니다.

        • 그 책들(아파트 공화국 포함)을 다 읽고 이후 [아파트 키드의 생애]와 [확률 가족: 아파트 키드의 가족 이야기] 그리고 이름 생각 나는 한 권 더 있었는데 한참 당사자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다뤄졌던 것 같습니다. 둔촌주공이나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라] 이런 지역적 서사가 이후 힘을 받았던 것 같고요. [확률 가족] 내용으로 일민미술관에 [즐거운 나의 집] 전시하던게 제 기억에는 이 흐름의 피크였습니다. 이후로도 서울과 주거 공간에 대한 대중서들은 꾸준히 나오는 추세군요.
          • 하나 더 붙이자면 박인석 선생의 책 <아파트 한국사회>도 괜찮습니다. 


            아파트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한국에서 왜 이렇게 아파트 위주의 주거가 만들어졌는지를 살피기 위해서는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탄생>도 재밌고요. 

    • 정말 대단히 흥미로운 영화였습니다. 한국 메이저 영화중에서 이렇게 대중과의 타협점을 잘 찾아내면서도 날카로운 시점을 유지하는 영화는 흔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2023년도 한국 영화중에서 이보다 더 재미있으면서 스케일이 큰 영화는 아마 나오기 힘들지도 모르겠습니다.

      • 잘 만들었다는 영화라 해서 보면 불시에 공격해 오던 겸염쩍음도 과함도 없는 흔치 않은 영화였어요. 매우 한국적인 이야기를 지금까지의 우리 잘 알잖아 식의 농담이나 어설픔 없이 잘 전달하는 느낌?

    • 잔인한오후 님, 해삼너구리 님(두 분 닉네임이 쓰다 보니... 왜 이렇습니까 ㅋㅋ ) 소개하신 책들 잘 기억해 두겠습니다.

    • 영화를 보고 나서 다시 읽었습니다. 시나리오를 어떻게 바꿔썼으면 더 좋았을까?를 생각해보는데 굳은 머리인지 상당히 어렵습니다. 아파트 주민들의 악행 수준을 더 올려야 하나 생각해보면 이미 충분히 외부자들 입장에선 끔찍합니다. (볼 때는 멍히 봤는데, 죽은 이들의 금니를 뽑아서 어린이들에게 나눠주는 행위는 그 죽은 이들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겐 얼마나 끔찍한 일 일지.) 명화에게 더 많은 역할을 주고 싶은데 애초에 여성진 전체가 너무 수동적이라 여성 배치를 전부 뜯어고쳐야 합니다. (보건부 대표로 통치에 개입한다거나, 탐색에 투입되었다면. 그리고 약한 남성과 강한 여성을 섞었다면 좋았겠지만.) 지후를 내부 분위기 모르는 바보가 아니라 좀 더 영악하고 정치적인 캐릭터로 바꿔보면 어떨까 싶기도 하고. (피해자성이 없어지면 또 몇몇 무리가 '나대는 피해자'로 해석할 가능성이 다분해지는군요. 끔찍합니다.) 다시 쓰기 이야기도 재미있을 것 같네요.




      저는 아파트에 거의 살아본 적이 없었고, 오피스텔 주거는 관리 책임이 불분명해서 상당히 고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국가 시책으로 시작해서 확실하게 자리잡은 문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게시판 2012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462,402 01-31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147,937 12-31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122,148 04-01
130354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10 184 12-31
130353 아바타 3를 보고 유스포 2 189 12-31
130352 [핵바낭] 올해 잉여질 결산 잡담 14 330 12-31
130351 아바타: 불 과 재 보고 왔어요 짤막 소감 6 225 12-31
130350 [영화강추] '척의 일생' 8 246 12-31
130349 흑백요리사 2 8~10회, 싱어게인 4 탑 4 결정 6 283 12-31
130348 Lacombe Lucien(1974) 7 127 12-31
130347 [관리] 25년도 보고 및 신고 관련 정보. 15 321 12-31
130346 Isiah Whitlock Jr. 1954 - 2025 R.I.P. 2 134 12-31
130345 [왓챠바낭] 우편배달부 말고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잡담입니다 12 264 12-31
130344 [넷플] 말 많고 탈 많은 '대홍수' 드디어 봤습니다 14 450 12-30
130343 [반말주의] 다들 올해 고생 많았어!! 새해 모두 건강하고 복 터지길 바래!! 12 183 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