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있음) 퍼펙트 데이즈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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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데이즈]의 또 다른 환상성은 히라야마의 인적 관계다. 그는 혼자 살고 있고, 또 홀로 있는 시간을 즐긴다. 제일 자주 마주치는 동료 타카시는 지각을 하고, 하는 말도 경박스럽고, 또 히라야마에게 민폐가 되는 부탁도 한다. 영화 속 묘사를 보면 히라야마의 노동은 협업이 아니라 분할된 독단임무에 가깝다. 일이 끝나면 그는 혼자 목욕탕에 가고 목욕을 다 마치면 식당에 들러서 늘 먹던 메뉴를 먹는다. 주말에는 혼자 바에 가서 바 사장님과 대화를 하고, 책방에 가서 책을 고르기도 한다. 자기 전에는 늘 책을 읽는다. 그는 독서와 음악감상이라는, 혼자만으로도 충분한 취미로 삶을 채우고 있다. 이것이 환상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그가 불필요한 인간관계를 거의 전부 치워낼 수 있던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혼자가 편한 사람이 정말 혼자만으로 삶을 채울 수 있을까. 21세기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고요를 원한다고 핸드폰을 꺼놓을 수 있을까. 현실속의 대다수는 원치 않는 관계를 직장이나 다른 일상에서 마주쳐서 고통을 받는다. 그런 점에서 히라야마의 나날은 타인에게 의존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편의적으로 보인다. (그는 나이에 비해 아픈 곳도 없고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일도 거의 없는 사람이다)


히라야마의 인간관계의 환상성을 곱씹게 되는 이유는 그의 일상 속 변주를 일으키는 요소들이 거의 다 (젊은) 여성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젊고 아리따운 여성들이 제각각 남성 노인의 삶에 불쑥 들어오는 이 전개는 '하루키적 판타지'와도 닮아있다. 독서를 좋아하는, 혼자 성실하게 살아가는 어떤 남성에게 엉뚱한 여성이 삶에 개입해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는다는 그 구도가 그렇다. 그것이 현실적인지 따져보는 것보다, 그 상상력의 종착지가 어떤 욕망에 부여하는 것인지 묻게 된다. 히라야마의 고독은 정말로 홀로 살아가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타인을 배제한 채로 여성과의 교류만을 원하는 것이 아닐까. 만약 이 영화의 편집이 하루하루에 대한 히라야마의 의식이라면 더더욱 그 우연들을 히라야마의 개인적 소망으로 볼 수 밖에 없지 않을까.


히라야마의 삶에 가장 먼저 나타나는 여성은 타카시가 짝사랑하는 아야다. 아야는 타카시가 방문하는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여성이다. 그는 타카시의 바이크가 고장난 관계로 히라야마의 차를 같이 얻어타고 어떤 곳으로 가게 된다. 그 과정에서 Smith의 카세트 테이프 노래를 들으면서 흥미를 가진다. 이후 아야는 몰래 그 테이프를 훔쳐갔다가 이후 히라야마에게 돌려준다. 이 때 아야는 히라야마의 앤티크한 취향을 알아주고 감상에 동참한다. 자신이 수집해온 어떤 물건을 궁금해하고 그것을 만끽하면서 훔쳐갈 정도의 몰입을 보여준다는 것은 어떤 애호가에게 얼마나 당혹스러우면서도 행복한 사건인가.


그렇기에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다. 나의 취향을 딱히 친하지도 않고 세대도 다른 외부인이 알아차려준다는 그 이벤트가, 과연 남성이 일으켰을 때 그렇게까지 인상깊은 경험이 될 수 있을까. 취향을 계기로 여성과 사귀고 싶어한다거나 진한 관계로 발전해나간다는 그런 상상이 아니다. 이를테면 타카시의 남성 친구가 히라야마의 수집 테이프를 듣고 좋아하면서 훔쳐갔다가 되돌려줬을 때, 아야라는 여성이 일으키는 일탈의 낭만이 과연 담길 수 있을까. 아야는 이후 고맙다는 의미에서인지 히라야마에게 볼 뽀뽀를 해준다. 왜 굳이 젊은 여성이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는 감사의 의미로 나이든 남성에게 뽀뽀까지 해줄까. 그 뽀뽀의 의외성은 부정할 수 없을만큼 남성의 성적 욕망이 묻어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일본스럽기도 하다. 


이후 히라야마의 규칙적인 삶에서 돌출적으로 튀어나오는 사건들은 여성에 의해 일어난다. 히라야마가 퇴근을 하자 어린 여자아이가 집 앞 계단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가 인사를 건넨다. 그는 히라야마의 조카, 니코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그는 히라야마의 집에 머물면서 그의 생활 패턴을 깨트린다. 가족과의 연결고리가 전혀 보이지 않는 히라야마에게 느닷없이 나타난 최초의 가족이 조카 여자아이다. 이제 히라야마의 삶에서 여성이란 존재는 가장 큰 변칙적 낭만이 아닌지 질문하게 된다. 그가 독신 남성으로서 규칙적 낭만을 실현하고 있다면, 그 생활에서의 단조로움을 깨트리는 제일 주요한 요소는 여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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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는 삼촌의 입장에서 봤을 때 아주 근사한 조카다. 아야가 그랬던 것처럼, 니코는 히라야마의 취향을 공유한다. 조카가 삼촌의 올드패션 라이프스타일을 궁금해하고 함께 나누려하는 것은 늙은 삼촌에게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니코는 히라야마가 읽는 책을 궁금해하고, 자기도 읽어도 되겠냐고 물어본다. 그리고 그는 히라야마가 사줬던 구식 필름 카메라를 들고 와서 히라야마와 같이 사진을 찍는다. 청소부로서 어떤 일을 하는지 현장에 따라가기도 하고 그 일을 도와주기도 한다. (후에 나오는 묘사를 보면 히라야마의 동생은 꽤나 유산가처럼 그려진다. 그런 계급적 환경의 차이에서 니코는 청소부란 직업에 호기심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히라야마는 니코에게 유별난 애착을 표현하지 않으나 영화가 그의 의기양양함을 대신 묘사하는 장면이 있다. 히라야마는 니코와 함께 단골 목욕탕을 들린다. 그곳에 늘 오던 다른 노년의 남성 고객들은 히라야마를 삼촌이라 부르는 니코를 보고 요정이라도 본 것처럼 눈이 휘둥그래진다.



히라야마가 정말로 철저히 고독을 추구한다면 니코가 방문해서 그와 어울리는 것이 불편했을 것이다. 단순한 친절로 보기에는 히라야마는 니코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거워한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 히라야마의 삶의 패턴에 제일 깊이 들어가고 포개지는 타인은 니코다. 그러니까 질문을 하게 된다. 이것은 단순히 '정'의 개념인가. 완벽해보이는 독신남으로서의 삶에서 은연중에 존재하는 결핍을 니코가 채워주는 것은 아닐까.



히라야마는 휴일에 니코와 자전거를 같이 탄다. 노을이 질 때 니코는 바다를 같이 가자고 하지만 히라야마는 이상하게 그 약속의 끝을 흐린다. '지금은 지금, 다음은 다음'. 다음에 한번 보자는 말은 아무 의미도 담지 않고 있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 히라야마는 왜 한사코 그 약속의 구체성으로부터 멀어지려하는가. 어차피 의미없는 말이라면 나중에 꼭 가자는 의지 정도는 표명할 수 있지 않았을까. 영화는 내내 히라야마의 정확한 삶의 방식을 그려왔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히라야마는 부정확성으로 도피한다. 작은 추측을 하게 된다. 그는 혹시 이뤄질 수 없는 약속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닐까. 약속은 했지만 그 약속을 자의 혹은 타의로 지킬 수 없는 아픔이 너무 큰 것은 아닐까. '지금은 지금, 다음은 다음'이라는 그의 말은 이 순간만에 집중하며 다음을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애달픈 노력이라면 어떡할 것인가.


니코는 영화 속에서 히라야마의 집에 찾아가 함께 자고 밥을 먹은, 생활을 나눈 유일한 사람이다. 그러나 타인과 포개졌던 이 삶은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히라야마는 니코를 갑작스레 맞아들였다. 그러니까 히라야마가 감내할 수 있는 인연이란 이렇게 예측불가한 종류의 것이어야 한다. 히라야마가 만일 적극적으로 바란다면, 그리고 계획하고 노력한다면 그 인연이라는 것은 계속해서 실패하며 상처를 안겨줄지도 모른다. 이를 암시하는 것은 니코의 엄마, 히라야마의 여동생이다. 그는 히라야마에게 집으로 돌아와도 된다며 히라야마와 아버지의 불화를 슬쩍 이야기한다. 히라야마는 힘든 표정으로 그걸 거부한다. 그리고 동생과 포옹을 나눈다. 함께하고 싶지만 함께할 수 없고, 가까이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사연이 그에게는 있다. 그러니까 히라야마는 외로움을 자처해 삶을 간신히 통제해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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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야마의 삶 속에 들어오게 되는 또 다른 여성은 바 사장이다. 히라야마는 주말이면 바를 가서 책을 읽고 사장님에게 여타 손님들과 다르게 점잖고 지적이라며 칭찬도 듣는다. 그리고 사장님이 부르는 노래도 듣는다. 고요함으로 가득찬 삶에서 히라야마가 기꺼이 즐기는 거의 유일한 소란이다. 어느날 히라야마는 늘 가던 대로 바를 찾았지만 그곳의 문은 닫혀있었고 안을 들여다보니 사장은 어떤 남자와 포옹을 하고 있었다. 히라야마는 캔맥주와 마른 안주를 사서 강가에서 혼자 술을 마시며 담배를 핀다. 그는 분명히 담배를 끊었다고 말했다. 금연을 포기할 정도로 히라야마가 속이 상했다면, 그는 아마 사장에게 작은 연정을 품었다가 혼자 배신당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한 남자가 찾아온다. 그는 아까 사장과 포옹을 하고 있던 남자다. 그는 자신을 사장의 전남편이라 소개하며 이제 암에 걸려 살 날이 머지않았기에 석별의 정을 잠깐 나눴노라고 말한다. 그는 히라야마가 홀로 속을 삭이고 있는 걸 보고 짝사랑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겠다며 히라야마와 사장의 결합을 제안한다. 이것은 대단히 이상한 장면이다. 어디로 갔을지 모르는 히라야마를 그가 정확히 찾아냈다는 것부터, 초면의 남자에게 전처를 향한 애정을 확인하고 대뜸 사귀어주라고 말한다. 전남편이란 사람은 히라야마를 전혀 모른다. 그러니까, 이 상황 자체가 히라야마에게 무척 편리한 우연의 연속이다.


다시 한번 히라야마의 고독을 묻게 된다. 규칙만으로 삶은 완전해지는가. 옛스런 취향과 여백을 채우는 자유로운 시간으로 그의 삶은 모자란 것이 없는가. 그렇다면 히라야마는 왜 바의 사장이 다른 남자를 안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몇십년간의 금연을 포기하고 속상해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그 빈자리를 채워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전남편은 히라야마를 사장과 짝지어주려는 것일까.


이번에도 히라야마는 그 전남편의 제안에 확답하지 않는다. 대신 그림자를 겹치면 정말 진해지는지 확인해보자면서 엉뚱하게 그림자 잡기를 한다. 이 때 히라야마가 자신의 그림자를 그 전남편의 그림자에 포개보는 것은, 둘의 어둠이 나름 닮았다는 것을 확인해보는 의식처럼 보인다. 그 전남편은 이제 사장과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 히라야마의 그림자가 그 전남편의 그림자와 닮았다면, 그것은 히라야마 역시도 그 사장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고백일지도 모른다. 그림자를 겹쳤을 때 그 어둠이 더 진해진다면 결국 그것은 히라야마가 바 사장과 이별했을 때 중첩된 어둠을 짐작하며 결국 함께할 수 없음을 점쳐보는, 그의 완곡한 거절처럼 보인다. 혹은 자신의 고독에 대한 체념일지도 모른다.


이 여성들과의 접점이 반드시 다른 남자로부터 시작된다는 점 또한 히라야마의 그림자를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아야는 타카시의 짝사랑이며 니코는 히라야마의 친아버지로부터 핏줄의 연장선에 있다. 바 사장은 시한부 암 환자 남성의 전처이다. 히라야마는 어떤 여성들을 다른 남성의 자장안에서 먼저 인식하고 멀어진다. 그러니까 히라야마가 어떤 여성들과 우연하게 만나는 이 일련의 경험들이, 그 남자들과 일시적으로 '자리바꾸기'를 해보는 것은 아닌지 묻게 된다. 즉 어떤 특정한 여성과 함께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내가 저 남자였다면'이라는 희망사항으로 히라야마 자신이 어떤 여성과 함께하는 남성의 자리에 가보는 가정법을 실현해보는 것처럼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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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야마의 삶 속에는 조금 더 주변에 머무르는 여자들이 보인다. 이를테면 그가 주기적으로 들리는 책방 사장이 그렇다. 그는 히라야마를 반가워하며 그가 짚는 책을 설명하거나 추천해준다. 히라야마가 공원에 갈 때 자주 마주치는 우울한 젊은 여자도 있다. 히라야마는 그에게 눈인사만 살짝 하고 말지만 유니폼을 입은 그 여자에게는 사연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타카시의 후임으로 들어온 동료 또한 여자다. 히라야마가 정기적으로 마주치는 거의 유일한 남자는 사진관 사장 뿐이다. 그는 히라야마에게 어떤 말도 건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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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히라야마가 계속해서 시선을 주는 남자가 있다. 그는 공원이나 도로를 방황하는 어떤 노숙자 노인이다. 튀는 옷을 입고 혼자 행위예술처럼 춤을 추는 그 노인을 볼 때마다 히라야마는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히라야마는 그 노인에게 말을 걸거나 그에 대한 말을 딱히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수많은 행인 속에서 그 노인을 응시하는 히라야마를, 영화는 응시한다. 왜 그는 수많은 젊은이들과 다른 남자들 사이에서 하필 그 노인을 보는 것일까. 히라야마는 그 노인에게 단순한 연민을 구하고 있거나 혹은 자신의 상황이 악화된 미래를 그에게서 엿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면 타인이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을, 타인의 입장에서 그 노인을 보며 사회 속 위치를 겹쳐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정확한 이유가 무엇이든, 히라야마는 그를 자신과 연결시키고 있다. 그 노인은 계속해서 움직인다. 그 몸짓, 도로 위에서의 정처없는 방황이 삶이 고정되지 못한 존재로서, 부러진 나뭇가지처럼 휩쓸리는 결과라면 어떡할 것인가. 나무를 좋아하는 히라야마가 그 노인에게서 나무로 뿌리내리지 못한 인간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기에 타카시의 귀를 만지던 남성장애인을 포함시키면 그 대비는 더 극명해진다. 히라야마가 보는 남자는 홀로 방황하는 늙거나 외로운 존재다. 히라야마가 보는 여자는 자신보다 젊고 당돌하며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은 존재다. 홀로 남겨진 남자들과, 함께 하고픈 여자들로 채워진 히라야마의 삶을 두고 다시 한번 '퍼펙트'의 의미를 묻게 된다. 히라야마는 그가 정한 규칙을 수행하며 혼자서도 부족함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혼자서 시간을 채울 수 있는 그의 하루하루에 왜 어떤 여자들이 끼어들었을 때 그 사건들은 단순한 불편 대신 그에게 꿈으로, 혹은 의미로 다가온다. 그리고 영화 마지막쯤 히라야마는 공원의 나무를 아래에서 위로 찍은 그 사진들을 보관해오는 걸 갑자기 귀찮아한다.


영화는 히라야마가 다시 출근하는 월요일 아침으로 되돌아온다. 그가 고른 노래는 니나 시몬의 Feeling good이다. 영화는 그의 얼굴을 롱테이크로 보여준다. 히라야마는 노래를 듣다가 갑자기 눈물을 참으려고 애를 쓴다. 여느 때와 다를 것이 없는 아침이고 그가 늘 수행해오던 규칙이다. 그런데 그는 왜 눈물을 머금는가. 히라야마의 안에서 무엇이 북받치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장면에서 히라야마가 듣는 노래는 good을 담고 있지만 히라야마가 느끼는 것은 good의 감정이 아니다. '좋은 기분'과 '좋지 못한 기분'의 상반된 감각이 히라야마의 얼굴에서 뒤섞인다. 런닝타임 내내 이분법으로 나눠져있던 두 개의 세계는 하나가 다른 하나에 스며든다. 흑백화면의 꿈과 컬러화면의 일상, 노동을 하는 히라야마와 노동을 끝마친 히라야마, 홀로 사는 히라야마와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히라야마, 규칙적인 하루와 뜻밖의 사건이 생기는 하루, 잘 인화된 사진과 인화될 수 없는 사진... 히라야마의 눈물이란 결국 둘로 나눠져있을 수 없고 이 모든 게 다 하나의 세계로 혼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실감한 결과는 아닐까.


우리가 세계를 둘로 나누는 이유는 그 중 하나를 주로 놓고 남은 하나를 부로 놓거나 피하기 위해서다. 삶과 죽음의 이분법에서 우리는 삶을 택하고 그 안에 놓이길 원한다. 빛과 어둠에서 우리는 빛을 따라가며 어둠은 일시적이고 부차적인 것으로 놓는다. 건강한 삶이 기본이고 아프거나 병든 상태는 삶의 구석으로 치워놓거나 건너뛰어야 하는 무엇이다. 이 모든 것이 결국 하나라는 세계관을 우리는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히라야마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이 선택하고 통제하는 노동자의 삶이 있고, 책과 카세트테이프와 휴일에 자전거타기를 혼자 즐기는 삶이 있다. 그렇게 선택한 삶을 주도하면서 그 외의 삶을 일시적이고 통과하는 과정으로 놓는다. 여기서 더 깊은 질문이 따라붙는다. 히라야마가 스스로 선택한 삶이 그늘이고, 그가 밀어내고자한 것이 빛이라면 그 때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가 스스로 포기한 행복과 다른 종류의 안락과 온기가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꾸 들어온다면 그는 우연이라도 그것을 또 맛보고 그리워하면서 결핍을 느낄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이 영화는 꿈으로 시작했고 '그림자'라는 문자로 시작했다. 그 흑백의 세계,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두운 새벽의 시간, 빛의 건너편의 어두운 세계에서 히라야마의 일상은 시작했다. 히라야마는 화장실 청소를 부지런히 하면서 노동자로서의 자긍심도 느끼고 그 일정한 삶에 보람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히라야마가 선택한 삶이 전부가 아니라면, 그가 선택했고 온전히 통제하고 있음에도 그것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공백을 발견한다면, 이후 이미 밀어낸 줄 알았던 삶이 이따금씩 침입한다면 그 때 '퍼펙트'의 의미에 균열이 간다. 이 얼마나 완벽한 나날인가. 그 읊조림은 절대 진실이 될 수 없다.


이 영화 속에서 히라야마가 겪는 사건은 전부 외부의 여성들을 만나면서 생기는 일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히라야마의 삶에 어떤 여자들이 잠깐 방문하는 이야기다. 어느 젊은 여자는 자신의 오래된 노래 취향을 함께 잠깐 즐겼고, 어린 조카는 노동시간과 노동이 끝난 일상 전체를 함께 했다. 그리고 자신과 동년배의 여성은 자신과 같은 시간감각으로 평생을 같이 할 수도 있었다. 그에 삶에 들어온 여성들은 히라야마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의 가능성이 차례대로 더 길어진다. 그리고 그 여자들은 현재 히라야마의 곁에 없다. 이런 만남은 히라야마가 주도할 수도 노력해서 얻어낼 수도 없는 일이다. 히라야마의 현재 고독이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함께하는 삶'의 빛으로부터 도주해 정착한 그늘이라면, 빛은 그늘의 어둠을 찌르는 작은 바늘이다. 또 다시 기대할 수 없는 그 '함께'라는 기회가 히라야마의 고독한 삶을 찌르는 통증으로 히라야마는 출근길에 눈물을 흘리는 것은 아닐까.


영화 끝에 "코모레비"라는 일본어 단어가 뜬다. 이는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라는 뜻의 단어다. 그것은 그냥 햇빛이 아니라 나뭇잎으로 가려진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햇빛이다. 그것은 히라야마가 쉬는 시간에 공원에 앉아서 계속 찍으려하는 사진이기도 하다. 규칙으로 채워진 히라야마의 삶에 무엇이 비집고 들어오는가. 연과 행으로 이뤄진 히라야마의 삶에 불쑥 어떤 존재들이 들어왔다가 떠나고 그의 삶은 다시 한번 규칙을 되찾는다. 그의 삶만이 고정되어있다. 고정된 행과 연에서 변주를 일으키는 것은 전부 타인들이었다. 그 불규칙하고 때론 폐를 끼치는 존재들은 이제 없다. 그의 차에는, 그의 하루에는 분명히 어떤 존재들이 있었고 이제는 빈자리만 남아있다. 홀로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노동조차도 이웃집 아주머니의 빗질 소리로 시작했다. 그의 삶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된 타인이 있었고 어떤 타인들은 사라졌다. 동이 트고 햇볕이 눈을 찌르기 시작하는 새벽에, 히라야마는 문득 그의 삶을 찔러오던 햇빛같은 존재들에 마음이 찔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 잘 읽었습니다. 지난 번에 짧은 소개 글에도 비췄지만 저에게는 그렇게 다가오지 않는 영화였습니다. 때문에 이 영화가 좋았다면 어떤 부분이 좋았는지 좀더 생각해 보았을 것인데 대충 지나가 버린 거 같아요. 그런데 쓰신 글을 읽으면서 어떤 부분들이 걸렸는지 생각이 나네요. 




      '노동'과 '기업'의 문제는 일단 젖혀 두고 흔쾌하지 못한 감상의 일차적 이유는 말씀대로 '하루키적 판타지'였던 거 같아요. 독일 감독의 작품이지만 젊은 여성들이 접촉해 오는 것이 넘 일본적이었어요. 동료의 지인여성도 그렇지만 조카도 옷을 갈아입는 장면 같은 게 들어갈 필요가 있었나 싶었네요. 




      히라야마는 출근할 때 문을 열며 늘 위를 보며 미소를 짓는데 이 장면이 보여주고자 하는 주인공의 여유와 뭔가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른 인품 같은 것이 영화의 후반에서는 그냥 작위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많은 것이 제스추어가 아닌가 의심이 든달까요. 결정적으로 카페 주인이 전남편과 있는 모습을 보고 맥주와 담배를 사서 강가로 가는 장면에선 '엥? 이러기냐' 싶었습니다. 강가에서 전남편이 찾아내서 함께 있는 장면은 그 자체가 이해가 안 되었어요. 주인공을 애초에 찾아낸 것도 무리수고 대화 내용도 무리수였어요. 여기서 제 마음이 떠나지 않았나 싶네요. 그림자 얘기를 하려고 넣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주 어색했습니다. 


         


      나무 사이로 흔들리며 빛이 새들어오는 아름다움까지 포용한 것이 퍼펙트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전반부와 달리 끝 부분에서는 히라야야가 구축한 삶이 무척 허약하게 느껴졌고 마지막의 우는웃는 장면도 저에겐 그런 느낌을 강화시켰어요. 용두사미까지는 아니고, 이해할 수는 있지만 실망하는 마음이 생기는 부분이었어요. 허약함, 복잡함 이런 것의 표현이 아마도 의도한 바이겠습니다만. 



      • 긴 글인데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양식이 있는 작품은 현실의 균열이나 탁성을 제한다는 점에서 반드시 인위적인 면모가 드러나기 마련이고 이 작품도 그걸 피해가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아마 저도 히라야마가 여성들과 계속 조우하는 부분이 너무 편리하다고 느꼈는데 여성 관객들에게는 그 인위성이 조금 더 와닿았을 것 같습니다. 어떤 여자가 문득 다가와 그 취향을 함께 공유해준다는 건 사실 저도 옛날에 많이 했던 망상이거든요. 




        어떤 씨네필들은 thoma님이 지적한 계급적 부분을 유사하게 비판하더군요.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닌데 그런 일을 하는 것에 주인공이 자기연민을 느낀다고. 저에게는 성별의 판타지가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그럼에도 그 부분을 가짜라고 부정하기보다는, 그런 부분을 진짜라고 가정하고 양식에 온전히 포함시켰을 때 엔딩에서 2분간 이어지는 히라야마의 그 표정과 결부시켜서 읽어봐야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힐링'이나 안빈낙도 같은 키워드로 단정하는데 저는 그런 해석에는 쉽게 동의할 수 없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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