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803 촛불집회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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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시위가 홍대입구역에서 한다길래 영화가 끝나고 밥을 먹은 다음 집회 장소로 향했습니다. 행진은 집회 시작 한 시간 후 쯤 진행되지만 혹시 몰라 6시 30분에 갔습니다. 도착했을 때는 공연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공연들이 제게 그렇게 아름답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투쟁에서도 그런 미학을 찾는 게 알량한 힙스터 정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싸이의 챔피언이나 까탈레나 같은 노래를 개사해서 부르는 공연에 박수를 치며 같이 흥겨워할 마음은 들지 않았습니다. 윤석열과 김건희 부부에 분노한다고 제가 어떤 공연에 자동으로 즐거워지는 건 아니니까요.

홍대 한복판에서 시위를 한다는 게 괜히 머쓱하기도 했습니다. 종로에서 시위를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는데 그것은 아마 공간을 채우는 대중들이 시위에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기껏 시위를 하러 가서는 시위하는 게 부끄러워진다는 저의 자의식에 대해서도 좀 고민을 하게 됐습니다. 한두번도 아닌데 왜 시위를 하는 게 어떨 때는 부끄러운 것일까요. 그건 아마 듣지도 않을 사람들한테 뭔가를 애원하고 호소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비참해서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자의식은 제가 어떤 시위나 투쟁현장을 무심하게 지나치는 행인1로서의 권력을 마음껏 행사해본 경험이 있어서 더 그랬을 것입니다.

'반투쟁은 중산층의 규범이 되었다'는 어느 트위터리안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폭거에 저항하는 티를 내고, 그것을 멈추라고 계속 소리치고, 울분에 합류하라고 권하는 건 어떤 식으로든 쿨하지 못한 일입니다. 가장 깔끔하고 아름다운 것은 싸우지 않거나 싸우는 티를 안내고 조용히 해결하는 것입니다. 제일 아름다운 것은 싸움에 아예 관심을 두지 않고 자기 삶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무력함을 느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다시 한번 실감합니다. 박근혜 퇴진 시위가 성공했던 것은 그 때 끌어내려야 할 대통령이 "멍청한 년"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여서 모욕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이긴 기분이 들게 하거든요. 드라마 [송곳]을 다시 떠올려봅니다. 이수인이 투쟁 현장에서 본사의 직원을 쫓아낼 수 있었던 것도 그 직원의 여성성을 쉽게 욕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투쟁의 진정한 대상을 느꼈습니다. 투쟁은 쓰러트리고, 물리쳐야할 특정 대상을 향해서만 하지 않습니다. 투쟁에 아직 동참하지 않은 잠정적 동지들을 향해 열렬히 구애하는 과정입니다. 투쟁은 억압이 아니라 억압당함에도 그것을 철두철미한 무관심으로 응시하는 모든 관중을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투쟁의 반댓말은 투쟁안함이고, 투쟁안함의 궁극은 '소비자'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소비자다움은 사회적 관심과 고통을 잊고, 모든 것을 소비하며 계급을 만끽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쉬운 방법입니다. 저희 모두는 소비자입니다. 그리고 어떤 순간에는, 소비자 외에도 다른 사회적 정체성을 또 갖춰서 그걸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요. 그 분노가 언젠가 연결되어 공동의 행동으로 터져나오기를 계속 기다려봅니다. 저도 어떤 순간에는 무심한 소비자로서만 살고 있으니까요.


촛불시위에는 여전히 5060이 많았습니다. 그것은 아마 민주당을 지지하는 대다수의 행동파 시민들이 중장년층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 아래 세대보다 민주화 항쟁의 시대를 직접 몸으로 겪고 간접적으로는 더 가까이에서 보고 들었던 상처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장의 투쟁을 이렇게 어머님 아버님 세대에 맡겨놓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정말 좋지 않았습니다. 이 분들은 대체 언제까지 이 현장에서의 고된 투쟁을 해야할지. 이 분들이 더 늙고 지치면 그 때 투쟁은 누가 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 땐 또 누군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끄고 인터넷에서 윤석열이 멍청하다면서 ㅋㅋㅋ거리는 댓글이나 인터넷 게시판에 달면 그만일까요.

이 세대분열은 현장투쟁을 부모세대에 외주준다는 그 자체의 문제도 있지만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탄핵시위가 성공하고 윤석열과 김건희를 끌어내렸다고 칩시다. 그럼 정치판의 권력과 사회적 권력은 누구에게 갈까요. 2030이 과연 정치에 참여해서 어떤 목소리를 분명히 낼 수 있고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지 그 미래가 조금 걱정스러웠습니다. 모든 것을 키보드로 해결하려는 2030세대에게 누가 어떤 권력을 주고 그 세대를 인정할까요. 또 모르겠습니다. 조국 반대 집회 같은 건 수많은 대학생들이 금새 모여서 구호를 외쳤으니까요. 이렇게 극우화된 움직임만을 보여주는 세대에게 사회는 권력을 온전히 이양할까요? '어르신'들이 너네가 한 게 뭐냐고 화를 내며 물어보면 그 땐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요. 우린 취업하고 알바하느라 힘들었어요? 그럼 5060들은 살기 편한가요? 재산 두둑한 586세대라 이렇게 남는 시간에 촛불시위를 하는 건가요? 투쟁의 주체성을 가져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2030 세대의 다음이 좀 보이지 않는 것 같아 울적했습니다. 대파 시위 때는 그래도 많이 보였는데, 이후 채상병 특검법 요구 시위 때나 이 날 시위 때는 2030이 너무 보이지 않았습니다. 커뮤니티에서 정치인 욕하는 게 대단한 활동이라고 믿지 않아야할텐데요.


그래도 밤이라서 선선했고 땀은 흘렀지만 아주 고되진 않았습니다. 누군가는 일상적으로 실천하는 투쟁에 이렇게 일기씩이나 쓰고 있는 것도 제가 한참 하수(?)라는 반증일 겁니다. 차라리 윤석열 퇴진 런닝 대회(?)나 윤석열 김건희 싫어요 마라톤 대회 같은 걸 하면 젊은 사람들이 더 참가하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도 해봅니다. 다음에도 기회되면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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