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카사베츠의 뮤즈이자 영화 사상 가장 위대한 배우 중의 한 명인 지나 롤랜즈 추모글을 올려요.
(이 글은 다른 곳에 먼저 올려서 말투가 이런 것이니 양해 부탁드려요.)
영화 사상 가장 위대한 배우 중의 한 명인 지나 롤랜즈가 타계했다. 향년 94세.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감동을 줬고 여전히 볼 때마다 감동을 주는 영화 중의 한 편인 존 카사베츠의 걸작 <오프닝 나이트>(1977) 한 편만으로도 나는 지나 롤랜즈를 추모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나 롤랜즈'라는 이름이 나에게 처음으로 각인된 건 키노에서 읽었던 김지운 감독의 글 때문이었던 것 같다. 너무 오래되어서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글에서 김지운 감독은 영화사에는 엄청난 연기력의 소유자로서 '마녀'가 있다고 하면서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지나 롤랜즈 등에 대해 언급했다. '마녀'라는 표현과 함께 그 글을 통해 나는 롤랜즈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감동적인 영화였던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의 엔딩 크레딧에서 알모도바르는 베티 데이비스, 로미 슈나이더와 함께 지나 롤랜즈를 언급하면서 그들에게 존경을 바쳤는데 그때도 내 눈에 지나 롤랜즈의 이름이 확 들어왔다. 흥미롭게도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서 알모도바르는 <오프닝 나이트>의 한 장면을 인용하고 있기도 하다.(내가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을 처음 볼 당시에 이 사실을 알았는지 그 이후에 알게됐는지는 확실치 않다.)
롤랜즈가 출연한 다른 영화들도 많이 있지만 아무래도 롤랜즈는 그녀의 남편이자 위대한 영화 감독, 배우인 존 카사베츠의 영화 속에서의 연기로 유명했기 때문에 나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존 카사베츠 회고전이 열렸던 때 영화 속에서 롤랜즈를 처음 보게 되었다.(이때 하이퍼텍 나다에서는 당시로서는 가장 큰 규모로 장 뤽 고다르 회고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고다르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두 쪽 회고전에서 상영작들을 전부 볼 수 있도록 시간표를 짜느라 오랜 시간 고민했었고 그런 이유로 인해 그때의 기억이 더 생생하기도 하다.) 존 카사베츠 회고전에서 봤던 <얼굴들>(1968), <영향 아래 있는 여자>(1974)에서의 롤랜즈의 연기는 대단했다. 일반적으로 롤랜즈의 출연작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영화가 <영향 아래 있는 여자>다. 이 영화로 롤랜즈는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도 올랐다. 이 영화에서 롤랜즈는 산업 현장에서 일하는 남편인 닉(피터 포크)으로부터 애정을 갈구하는 메이블 역으로 출연했는데 신경 쇠약 직전의 상태에 놓인 주부의 광기를 경이적인 수준으로 구현했다. <영향 아래 있는 여자>만으로도 이미 롤랜즈의 진가를 충분히 파악하고도 남았었는데 개인적으로 카사베츠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하는 <오프닝 나이트>는 <영향 아래 있는 여자>를 뛰어넘어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오프닝 나이트>에서의 롤랜즈의 연기는 나를 완전히 사로잡아서 내 영혼을 뒤흔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런 연기가 가능하다는 걸 스크린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내 눈을 믿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 영화에서 롤랜즈는 스타 배우인 머틀 고든을 연기하는데 머틀은 신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무대와 현실 사이에서 정신적인 혼란을 겪는다. 신작을 처음으로 소개하는 오프닝 나이트에 만취해서 나타난 그녀는 만취 상태를 극복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극을 성공적으로 마쳐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때부터 신기에 가까운 롤랜즈의 퍼포먼스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실제로 만취한 상태에서 연기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녀는 무대 뒤에서 몸을 가누지 못해 계속 쓰러지지만 막상 무대에 등장하면 온 몸으로 버티며 역할을 소화해낸다. 안간힘을 써가며 버티고는 있으나 만취 상태에서 맨 정신처럼 연기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연극은 점점 즉흥극처럼 변해간다. 이 연극의 말미에 모리스(존 카사베츠)와 머틀이 대사를 주고 받는 장면이 있는데 이 장면의 훌륭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이다. 뭔가 웃기고 슬프고 말도 안되는 것 같은데 그게 인생인 것 같기도 하고 한마디로 굉장하다. 이렇게 대본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간 연극을 보던 제작자와 극작가는 극도로 실망한 표정으로 극장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오는데 놀랍게도 이 연극은 관객들의 기립 박수를 이끌어내며 대성공을 거둔다. 나도 이 연극을 보면서 너무 큰 감동을 받은 나머지 극 중 관객들처럼 기립 박수를 치고 싶었다.(퍼포먼스를 통해서 영화의 엔딩에서 이 정도로 감동을 주는 순간으로는 로버트 알드리치의 걸작 <캘리포니아 돌스>(1981) 정도가 떠오를 뿐이다.) <오프닝 나이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연극을 본 매니(벤 가자라)의 아내인 도로시는 그동안 탐탁치 않게 여겼던 머틀과 뜨거운 포옹을 나누면서 "대단했어요."라고 몇 번을 외친다. 그리고 영화는 프리즈 프레임으로 정지되는데 이때의 감동은 형언 불가능하고 영원히 내 가슴 속 깊이 각인되었다. 롤랜즈는 <오프닝 나이트>로 베를린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는데 이 영화가 위대한 것은 무엇보다도 신들린 듯한 롤랜즈의 연기력 탓이겠지만 한편으로 이 영화 자체가 존 카사베츠의 영화 세계를 닮아있기 때문이다. 정형화된 연극(관습적인 영화)의 틀을 깨고 우연과 즉흥성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즉흥극을 통해 생동하는 삶의 에너지를 전달하고자 했던 게 카사베츠의 영화가 아니던가.
그때 이후로 나는 카사베츠의 연출작들인 <별난 인연>(1971), <글로리아>(1980), <사랑의 행로>(1984) 등 롤랜즈의 출연작들을 더 보았는데 늘 그녀의 연기는 나로 하여금 경탄을 자아내게 했다. <별난 인연>에서는 그녀가 코믹 연기에도 능함을 유감없이 보여줬고 왕가위의 <중경삼림>(1994)에서 임청하 캐릭터에 영향을 줬던 <글로리아>에서는 터프한 여성 갱스터로서의 모습이 강렬했으며 <사랑의 행로>에서는 끊임없이 사랑을 찾아 헤매는 가녀린 영혼을 가진 섬세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특히 <사랑의 행로>에서 롤랜즈는 카사베츠와 남매로 출연하는데 두 배우의 연기 대결은 두 개의 악기로 이루어진 잼 세션을 방불케 했다. 이 영화에서의 두 배우의 연기는 어떤 경지를 보여주는 수준으로 나아간다.
도대체 왜 지나 롤랜즈의 연기는 이토록 나를 사로잡았을까. 연기 전문가가 아닌 나로서는 정확한 답을 하기가 쉽지 않다. 일단 스크린 속에서의 지나 롤랜즈는 너무 멋지다. 너무 뻔한 답이기는 하지만 그녀 자체가 '시네마'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녀의 당당한 자태, 그녀가 발산해내는 생동감과 에너지, 힘있는 목소리, 그녀 특유의 쓴 웃음, 돌발적인 몸짓, 상황을 반전시키는 순발력, 터프하지만 한편으로는 섬세한 감정 표현, 때때로 어머니로서의 모성을 보여줄 때의 감동, 담배를 피는 모습, 연약한 육체로 쓰러지는 순간 그리고 무엇보다도 독보적인 아우라를 풍기는 그녀의 얼굴... 그녀의 모든 것이 영화적인 순간들을 만들어내는 데 적합했다. 지나 롤랜즈가 얼마나 대단한 배우인가를 순식간에 보여주는 장면으로는 역시 <글로리아>의 한 장면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글로리아(지나 롤랜즈)는 마피아들에게 살해당한 이웃의 아들인 필을 얼떨결에 보호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런데 아이를 돌보는 것에 익숙치 않은 그녀는 길거리에서 필을 떼어놓으려고 한다. 이때 갑자기 글로리아를 쫓던 마피아들의 차가 그녀의 앞에 도착햔다. 마피아들과 대화를 나누던 그녀는 갑자기 권총을 꺼내서 마피아들에게 총격을 가하고 결국 그들이 타고 있던 차마저 전복시킨다. 순식간에 벌어진 이 일을 통해 대사가 아닌 글로리아의 행위와 제츠처만으로 그녀의 심리 변화가 압축적으로 잘 표현된다. 이 장면이야말로 예측불가능한 현실을 포착하는 존 카사베츠의 영화의 정수이자 이 상황에 발빠르게 반응하는 롤랜즈의 연기의 정수가 담겨있다고 할 만하다. 가장 최근에 봤던 롤랜즈의 출연작은 짐 자무쉬의 <지상의 밤>(1991)이었는데 롤랜즈에 대한 자무쉬의 애정을 듬뿍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짐 자무쉬는 롤랜즈가 사망한 후 인스타그램에 그녀에 대한 멋진 추모글을 올리기도 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의 연기자였으나 롤랜즈의 연기가 유독 빛을 발한 것이 그녀의 예술적 동반자였던 카사베츠의 영화들 속에서였다는 걸 떠올려본다면 남편과의 협업이 그녀에게 끼친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말년에 그녀는 그녀의 자녀들이 연출한 영화들인 <노트북>(2004), <브로큰 잉글리쉬>(2007) 등에 출연했고 이외에 그녀의 출연작들이 많지 않다는 걸로 짐작해볼 때 자녀들에게 큰 애정을 보여준 어머니로서의 그녀가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지나 롤랜즈는 존 카사베츠와 함께 가족 시네마의 가장 위대한 사례 중의 하나로 남을 것이다. 지나 롤랜즈에 대한 나의 찬사는 해도 해도 끝이 없을 것 같지만 이쯤에서 마무리해야겠다. 글쓰기 실력의 부족으로 인해 그녀의 연기에 대한 찬사를 제대로 담아낸 멋진 추모글을 쓰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계속 미뤄뒀던 롤랜즈의 출연작들인 우디 알렌의 <또 다른 여인>(1988)과 닉 카사베츠의 <노트북>을 빨리 보면서 그녀를 추모하고 싶다. 그리고 그녀가 베티 데이비스와 함께 출연한 작품도 꼭 찾아서 보고 싶다. 두 대배우들 간의 연기 대결이 무척 기대된다. 조만간 지나 롤랜즈 추모전이 열리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지나 롤랜즈 배우님,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나에게 연기가 어떤 것이며 영화 속에서 연기가 어떤 것을 할 수 있는지를 온 몸으로 보여준 지나 롤랜즈의 삶에 진심으로 경의를 바치고 그녀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지나 롤랜즈를 추모하는 의미로 내가 쓴 <오프닝 나이트>에 대한 글을 회원 리뷰에 올린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읽어보시기를 바란다. 회원 리뷰 링크: http://www.djuna.kr/xe/index.php?mid=breview&document_srl=14334050)
지나 롤랜즈와 닉 카사베츠의 영화에 대한 애정을 담아 올리신 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카사베츠 영화들을 보기 전에 우디 알렌의 '또다른 여인'에서 중년 대학교수역으로 롤랜즈를 먼저 보아서 그런지 카사베츠 영화의 화려한 연기보다도 조용한 '또다른 여인'이 더 애착이 가더라고요. 김지운 감독이 말한 것처럼 카사베츠 감독 영화에 나오는 전성기 롤랜즈는 정말 엄청난 미인인데, 작고한 지금 돌아보니 미모보다도 연기력이 더 기억에 남는 배우였습니다.
긴 글을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또 다른 여인>을 빠른 시일 내에 꼭 봐야겠어요. ^^
두 분의 관계와 파트너쉽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는데 본 작품은 '글로리아' 하나밖에 없네요. 샤론 스톤 나온 거 말고... '지상의 밤'에서 얼굴에 기름 묻히고 모자 뒤로쓰고 껌 짝짝 씹으며 담배피던 위노나 라이더와 둘의 합이 참 재밌었던 기억도 나구요.
'영향 아래에 있는 여자', '오프닝 나이트' 등에서 보여준 연기에 대한 찬사도 익히 들어왔는데 부고를 들으니 곧 챙겨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긴 글을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지나 롤랜즈의 출연작들인 <얼굴들>, <영향 아래에 있는 여자>, <별난 인연>, <오프닝 나이트>, <사랑의 행로>를 꼭 보시기를요. 개인적으로 존 카사베츠의 탑 2가 <오프닝 나이트>, <사랑의 행로>에요. ^^
저도 지나 롤랜즈를 [또다른 여인]으로 처음 접했기 때문에 남편 분 영화들에서의 그 거칠고 강렬한 연기를 보면서 정말 다재다능한 배우라는 걸 실감했지요. 특히, [오프닝 나이트]는 롤랜즈의 차력쇼 그 이상이 아닐지는 몰라도 정말 멋진 차력쇼였지요.
긴 글을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제 글에도 썼지만 저는 <오프닝 나이트>에서의 롤랜즈의 연기가 전혀 차력쇼로 느껴지지 않았어요. <오프닝 나이트>는 무대와 현실 사이의 관계를 탐구한 최고의 영화 중의 한 편이라고 생각해요. ^^
긴 글을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글로리아>에서 제가 감탄한 것도 말씀하신 부분과 관련이 있어요. 존 카사베츠와 롤랜즈가 합작한 다른 걸작들도 꼭 챙겨보시기를요. 개인적으로 탑 2는 <오프닝 나이트>와 <사랑의 행로>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