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씨와 가화
쇼부라다스-소씨형제공사. 이름 그대로 소씨 형제들이 운영하던 회사입니다. 원래는 소씨부자공사였다고 합니다. 회사 생기고 얼마 안지나 아버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름이 형제공사로 바뀌었습니다.
소씨 일가족은 일찌감치 상해가 중국영화계 중심이던 때부터 영화계 일을 시작했고 50년대쯤에는 아시아 지역에 성대한 극장체인을 소유한 영화재벌이었다고 합니다. 자기네 극장에 안정적으로 영화를 공급하기 위해 영화제작사를 차리기로 하고, 이래저래 따져보고 홍콩이 입지가 좋다고 생각해 58년에 회사를 설립합니다.
처음부터 돈 많은 사람들이었으니까요. 물량전을 펼칩니다. 아시아 최대규모라는 스튜디오를 지었고, 기타 부대시설을 갖춰, 영화 촬영뿐 아니라 인재양성에 기타등등, 영화와 관련된 거의 모든 걸 다 한큐에 처리할 수 있는 거대한 영화도시를 지었습니다.
그안에서, 어떤 장르건 형식이건 가리지 않고 돈된다 싶은건 뭐든 다했습니다. 홍콩 영화의 발전이 쇼부라다스 없이 설명될 수 없고, 70,80년대 홍콩에서 이름좀 날렸다 싶은 영화인 중에 분야를 막론하고 한번도 소씨와 인연이 없었던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60년대 중반 소씨는 국태(캐세이) 영화사와 정면 대결을 벌여 승리한 뒤로는 홍콩의 유일한 메이저로 우뚝 서게 됩니다. 그리고는 곧장 무협영화를 대량생산하기 시작하면서 홍콩대만 영화계 전체가 무협영화에 올인하게 만들고 무협(그리고 뒤를 이은 쿵후) 영화가 홍콩을 대표하는 장르로 뜨게됩니다.
소씨는 처음부터 홍콩 내수가 아닌 아시아 화교시장을 타겟으로 만들어진 곳이라 홍콩지역 방언인 광동어가 아닌 중국 표준어 북경어로 영화를 만들었고, 소씨가 홍콩 영화계를 장악하게 되자 홍콩 영화계 전체가 북경어 영화 제작으로 기울게 되었을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60년대 말, 소일부 사장님은 방일화 여사를 데려다 회사내 2인자 자리에 앉힙니다. 영화계 인물도 아닌, 이 뜬금없는 낙하산에 당시 2인자였던 추문회를 비롯해 여러 사람이 반발하게 되고, 그때까지 소씨가 승승장구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했던 추문회는 자기를 무시한다는 생각에 회사를 뛰쳐나갔고, 이때 동조하는 몇사람이 같이 나가서 가화전영공사(골든 하베스트)를 차립니다.
추문회가 돈은 없어도 가오는 있었기 때문에 영업력과 인맥을 동원해 회사의 모양새를 갖췄고... 소씨가 잘나가는 회사긴 했어도 오너 일가 마음대로 굴러가던 곳이라 내부적으로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고 가화에선 이런 사람들을 포섭해갑니다.
당시에 소씨의 에이스 감독이던 나유, 아시아 최고 스타이던 왕우 등이 가화에 참여해 가화는 런칭 초기에 주목을 받을 수 있었고, 얼마후 생각지도 못한 귀인을 얻게됩니다.
이소룡은 소씨에서 만든 쿵후영화를 보고는 미국에서 못이룬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겠다 여겨 홍콩으로 돌아와 소씨의 문들 두드렸는데 소씨측에선 아역 시절 잘나갔다지만 성인 배우로 이렇다할 성과를 보인적이 없는 이소룡을 채용할지 여부를 두고 밍기적거렸습니다. 이때에 가화는 결혼하고 미국 이민간 정패패를 다시 불러오려고 공작중이다가 정패패가 고사하는 바람에 난감한 처지에 있었는데 이때 이소룡이 포착된 거죠. 추사장님은 이소룡을 바로 데려옵니다.
생긴지 얼마 되지도 않은 가화공사는 이소룡 한사람 때문에 바로 소씨에 이은 홍콩 영화계의 2인자 자리까지 올라갑니다. 그렇지만 이소룡의 재임기간이 그렇게 짧을 줄은 아무도 몰랐겠죠. 회사를 먹여살리던 탑스타를 갑자기 잃게된 가화에게 또다시 귀인이 나타납니다.
TV 출신 희극인 허관문은 영화계에 진출해 최고의 매출을 올리는 탑스타가 됩니다. 허관문은 TV 출신이라 홍콩 현지 언어인 광동어로 코미디를 해왔고 영화도 광동어로 만들고싶어했지만 소속사인 소씨는 북경어 영화에 주력하는 회사였어서 허가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때 추사장님이 하고싶은 거 하게 해주겠다고 허관문을 꼬드겼고, 그렇게 해서 가화에 간 허관문은 광동어 코미디 영화들(일본에서 미스터 부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엮어버린 것들)을 만들어 연속으로 박스오피스 정상을 굳건히 지킵니다. 홍콩 박스오피스 성적만 따지면 이소룡도 허관문에게는 쨉도 안되죠.
그런식으로.... 소씨는 인사관리에 실패해 인재들을 놓친 경우가 많고 가화는 그런 사람들을 또 제꺽 받아들였습니다.
가화란 회사부터가 소씨에 반발해서 생겨난 회사였기 때문에 소씨의 정책과는 반대로 갔죠. 소씨는 인기와 관계없이 소속 배우들을 전부 직원으로 간주해 월급 주고 부렸지만 가화는 배우들의 이익을 적극 보장하고 스타 배우가 자신의 명의로 영화사를 차리게 해서 자존감을 높여주었다든가 하는식으로...
70년대 홍콩 영화계의 주력 상품은 무협/쿵후영화였고, 소씨와 가화 둘 다 그방면으로 생산에 열심이었습니다. 장철, 초원, 유가량 같은 스타 감독에 기라성같은 스타들이 우글거렸던 소씨에 비하면 인력파워에서 가화가 좀 밀리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홍금보가 중심역할을 해서 가화도 선전하고 있었습니다. 주로 무술감독으로 활동했던 홍금보는 77년경에 본격적인 주연배우 활동에 들어가 박스오피스 상위권에 안착하는 좋은 출발을 보입니다.
78년에 가화는 오랫동안 비장하고 있던 이소룡의 유작필름 사망유희를 완성시켜 공개합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 튀어나와 사망유희를 박스오피스에서 눌러버립니다. 추사장님은 이소룡의 시대는 이제 지났다는 걸 직감합니다. 새로운 귀인의 출현...
성룡은 나유 감독에게 픽업되어 성룡이라는 이름으로 제데뷰하고는 소처럼 일하며 열심히 영화를 만들었지만 성룡이라는 배우의 특성을 파악하지 못한 나유가 계속 삽질만 시켜서, 인지도를 올리지도 못하고 스트레스가 쌓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인디 제작자 오사원이 나유공사에서 성룡을 대여해 가서 사형도수와 취권을 만들었고, 그 두편으로 성룡은 일약 이소룡 이후 최고의 쿵후스타가 됩니다.
대여기간 끝난 성룡은 다시 나유 밑으로 돌아와 영화를 만들었고 나유가 성룡을 계속 자기 의도대로 콘트롤하려고 하자 성룡의 스트레스는 더 쌓여갑니다. 그걸 알게된 추사장님은 성룡을 꼬드깁니다.
썩 아름답지는 않은 경과긴 했지만 가화는 결국 성룡을 확보하는데 성공합니다. 거기다 회사 창립할 때 부터 있었던 홍금보가 아는 동생을 주연배우로 데뷰시켜 원표를 꽁으로 얻게됩니다. 이렇게 가화삼보를 얻게된 가화는 80년대가 되면 드디어 소씨를 추월하고 홍콩 1위의 영화사가 됩니다.
70년대를 신예 가화가 챔피언 소씨에 도전하는 시기라고 한다면 80년대에 홍콩영화계에는 좀 더 다양한 선수들이 참전합니다.
최가박당 시리즈를 터뜨리며 급부상한 신예성(시네마시티)이나 마담물 등을 성공시킨 덕보(디엔비)등. 소씨는 1위자리를 빼앗겼을 뿐 아니라 또다른 강력한 도전자들까지 등장했고, 매출도 점점 시원치않아집니다.
그러자 소일부 사장님은 중대결단을 내립니다.
"나 영화 안해!"
명목상으로는 영화업계는 이미 내리막이니 전도유망한 티비쪽에 올인한다...라는 거였다든가...
그래서 소씨의 영화촬영 인프라는 자매회사이던 TV-B로 넘어가게 됩니다.(대략 그 뒤쯤 부터 TV-B에서 만든 무협 드라마들이 한국에서 열나 히트했던 듯...)
소씨는 오너 마음대로 하던 회사니까요. 사장님이 결정을 내리자 영화제작이 스톱된 것은 물론 그때까지 만들었던 모든 자산들까지 전부 창고에 넣고 봉인해버립니다. 무슨 회사가 망해서 자산이 흩어진 것도 아니고, 주인장이 스스로 자물쇠 채우고 '안팔아' 이런 거니까요. 그뒤로 약 15년간 소씨 영화는 공식적인 루트로는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춥니다.
하필이면 그 시기가 딱 국내에서 홍콩영화에 전문적으로 관심을 갖는 매니아들이 생산되던 시기라서요... 이사람들은 꽤 오랜 기간동안 쇼부라다스에 대해서 전혀 모르면서 홍콩영화를 이해하려드는 오류를 보였죠.
못구하게 되면 더 구하고 싶어지는게 인지상정. 소씨영화가 봉인되어 있는 동안에 매니아들 사이에서 소씨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게 되고 쇼부라다스라는 브랜드 자체가 전설화됩니다. 그렇담... 이거 돈 되겠죠. 천영오락(셀레스쳘)에서 방일화 여사를 끈질기게 설득해 2000년대 초에 드디어 창고에 갇혀있던 영화들이 디비디로 세상에 선보입니다.
그렇게 해서 영화매냐들 사이에 쇼부라다스 붐이 불었고, 마침 그때 타란티노가 킬빌을 내놔서 휘발유를 끼얹었죠. 그덕에 국내에도 소씨 영화 디비디가 나올 수 있었고...
80년대 가화삼보 90년대 황비홍으로 잘나갔던 가화는 홍콩반환 이후론 별다른 두각을 보이지 못하더니 2000년대 쇼부라다스 르네상스 시기에는 거의 망한 상태가 되었고.... (CGV에 G자를 남기긴 했습니다만...)
쇼부라다스 디비디가 인기를 끄는 걸 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소씨는 영업재개를 해봤지만... 망했습니다.
소일부는 제대로된 개런티는 고사하고 배우들에게 단순히 봉급주는 수준을 넘은 희대의 수전노였었죠.
당시 주연급 배우들은 어찌어찌 봉급받아서 밥을 먹고 살았지만 조단역 배우들은 소일부의 짜디짠 박봉에 생활고에 시달렸다고합니다.
한 단역 여배우는 그에 못이겨 성매매라는 투잡을 뛰기까지했고 이 사실을 안 왕우가 제대로 빡쳐서 장철과 소일부에게 따져들었다죠. 역시 의리의 사나이?
뭐 싸나이 왕우가 당시 성깔부리는거야 많이 알려졌지만 그렇게 좋은쪽으로 발휘된 적도 있다니 조금 놀라긴했습니다.
무튼 당시 왕우는 저런 쫌팽이 밑에선 더 이상 자신의 미래가 안보였겠고 이미 거물이된지라 장철, 소일부의 통제도 안통하니 결국 자기의 길을 간거겠죠.
셀레스티알픽처스가 공개하기전까진 쇼브라더스 영화들은 완전히 실전된 영화들이긴했었죠.
저 역시 80년대 국내 출시판 VHS로 13태보나 독비도 정도를 본거외에는 별로 본게 없었습니다.
그나마 왕우 영화들은 골든하베스트나 대만시절 찍은 영화들이 제법 나와있었지만요.
깡따위, 추룡, 푸솅......이들의 쇼부라더스 시절 영화는 국내에선 거의 보기 힘들었던....
그나마 2000년대 초반쯤에 인터넷 영화커뮤니티에 복수, 금연자 등등 쇼브라더스 영화들의 리뷰가 올라왔었습니다.
홍콩, 대만, 동남아등지에는 부틀렉 형태로 과거 VHS만 소스들이 계속 돌고있었던 모양이고 이게 어찌어찌 삐짜판으로 국내에도 들어왔었던 모양이더군요.
80~90년대 삐짜테입 시절엔 그리 보기어려웠는데 어떻게 2000년대 초반에 유입이 된건지는 잘모르겠습니다만.
또 2001년 작가 오현리가 중국무협영화라는 책에서 쇼브라더스의 고전들을 많이 소개했는데 이 분이야 어린 시절 극장에서 쇼브라더스 작품들을 봤겠지만
아마 이런 삐짜테잎 역시 섭렵했을걸로봅니다. 책속에 리뷰된 자료들도 소스가 그쪽같았구요.
다행히 셀레스티알에서 DVD로 소스를 풀면서 스펙트럼DVD에서 쇼브라더스 작품들은 대대적으로 출시하며 홍보를 했고
당시는 나름 국내 2차 매체 시장의 전성기라 많은 매니아분들이 이 소식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는 후문이.....
거기다 장철, 왕우의 광신도 오승욱 감독과 국내 대표 홍콩영화빠 주성철 기자 콤비의 오디오코멘터리까지.
다만 아쉽게도 국내에는 쇼브라더스 작품중 일부만 출시된지라 오랑팔괘곤이나 여타 보고싶던 작품들은 결국 해외DVD를 직구하는 수밖에 없었네요.
우리나라에 쇼부라다스 디브이디가 나올 수 있었던 건 순전히 킬빌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킬빌이 유행하는 동안 잠깐 나오다가 중단되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