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 야스지로의 '만춘', 그리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는 세월이 꽤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재밌습니다.

가족 중심의 스토리는 그당시나 지금이나 공감하거나 감정이입할만한 여지가 많고, 다다미쇼트라고 불리는 그 특유의 앵글은 영화 전공자가 아니라도 충분히 '신선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주고 받는 대사들이 참 재밌습니다. 일상에서 평범하게 쓰는 대사들이지만 생동감이 살아 있어서 과거 편안하게 주말드라마 보던 추억들도 떠오르고요. 


'만춘'은 다른 작품과도 조금 다른 재미가 있었는데요,

일단 대사들이 빵 터지는 장면들이 있었는데, 수십년 전에 씌여진 각본이란 걸 감안하면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리고 스토리 진행에 추가해서 일본 전통과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는 장면들이 많이 나옵니다.

전통 연극을 꽤 오랜 시간 보여주고, 케잌을 만들고 빵을 홍차랑 같이 먹는 장면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혹시 서양 평론가들을 고려해서 넣은 장면 아닌가....의구심이 든 건 저뿐일지...ㅎㅎ


암튼 보고 나서 감동과 재미를 느끼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들인데, 고레에다 히로카즈 작품들과 어딘가 결이 비슷하단 생각이 들더군요.

고레에다 감독이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는지 자신의 영화랑 비교하는 걸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는 인터넷 기사도 있네요.


헌데....오즈 야스지로 영화랑 비교하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품들은 저에겐 너무 심심하고 지루합니다.

저는 Departures를 가장 인상적으로 보았습니다만 대중적으로 유명하진 않더군요.

그 외엔 사실 딱히 대단한지도, 재밌지도 않았어요. 그냥 뭐.....그냥...


특히 넷플릭스에서 작업한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이나 '아수라처럼'은 끝까지 정주행을 못했습니다.

뭔가 등장인물들은  행복하고 애틋하고 서로 교감하는 듯해 보이는데 관객은 감정이입할 구석이 없달까요.

다음 회와 주인공의 미래가 전혀 궁금하지 않게 만드는 마력..... 


'아수라처럼' 1회만 보고 포기한 후 '만춘'을 본 저의 개인적인 소감이었습니다.

    • 2008년 영화 [Departures]라면 그건 다키타 요지로의 작품입니다. 

      • 오모나 그렇군요. 전 왜 여태껏 이렇게 알고 있었지...ㅎㅎㅎ 감사합니다.


        그것 빼니까.... 역시나 저랑은 안맞는 감독이군요.

    • 재작년에 출간된 아주 중요하고 재미있는 영화 관련 서적으로 [구로사와 기요시, 21세기의 영화를 말한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큐어], [도쿄 소나타], [스파이의 아내] 등으로 유명한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가 이곳 저곳에서 강연한 내용을 묶은 책인데요, 하스미 시게히코의 제자답게 역시나 오즈 야스지로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깊이가 있으면서도 읽기 편하고 재미있는 책이니 일독을 권해 드리며, S.S.S. 님께서 말씀하신 감상과도 맞닿아 있는 [만춘]과 관련된 한 대목 옮겨 봅니다:

      (2007년 9월 15일, 도쿄 파나소닉 센터, "오즈 야스지로에 관하여" 강연 중)


      오전에 오즈의 대표작 중 한 편인 〈만춘〉을 상영했던 모양이더군요. 저도 얼마 전에 비디오로 다시 봤습니다. 이미 보신 분도 꽤 계시지 않을까 싶군요. 우와, 다시 보고 놀랐습니다. 예전에 봤을 때의 인상과는 완전히 다른 영화였거든요. 여러분은 어떠셨나요? 오즈 야스지로의 〈만춘〉하면, 아버지와 딸의 심리적 교류를 차분히 그린 작품, 소위 말하는 고요하고 양식적인 오즈 스타일을 확립한 작품, 도쿄의 거리를 일본 정서로 충만하게 아름답게 그린 작품 등의 이미지를 갖고 계시지 않으신지요?


      오늘 보신 분은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하지만 〈만춘〉에 늘 따라다니는 그런 이미지는 어떤 부분에서는 들어맞지만 거의 대부분이 전혀 들어맞지 않습니다.


      일단 〈만춘〉은 전혀 차분한 영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분출하는 격정을 그린 영화죠. 영화 내내 보이는 하라 세츠코의 귀기 어린 표정이 더 없는 증거일 겁니다. 그녀는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서 웃거나 화내기만 하지요. 둘 중 한 가지 감정밖에 드러내지 않습니다. 얼굴 표정을 통해 감정을 스트레이트로 표현하고 있지요. 류 치슈가 시종일관 온화한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처음부터 하라 세츠코는 그렇듯 분명하게 격정적인 여성, 상대방에게 당당히 감정을 발산하는 사람으로 설정되어 있는 겁니다.


      게다가 〈만춘〉은 '수수하다'는 말과도 동떨어진 영화입니다. 과감한 화려함과 호화찬란함으로 돌격해 오는 영화였지요. 이것도 이번에 다시 보고 처음 깨달은 겁니다. 오늘 보신 분은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집요하리만치 일본의 전통 문화를 화면에 집어넣고 있습니다. 먼저 다도(茶道)가 등장하고, 노(能), 가마쿠라의 고찰(古刹), 교토의 돌정원(石庭) 등이 잇따라 등장합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마찬가지로 과감히 허세를 부린 서양 취미도 보이지요. 서양식 석조 저택이나 프랑스풍 카페, 코카콜라 간판 등이 그렇지요. 현재 세간에서 무심코 유통되고 있는 소위 오즈 스타일과는 완전히 다르단 감이 듭니다. 오히려 1920년대 독일 표현주의 영화에 가까운 감이 들었습니다. 〈메트로폴리스〉(프리츠 랑, 1926)나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로베르트 비네, 1919) 등의 흑백 무성영화 말이지요. 후기 오즈 작품은 물론이고 초기의 버터 냄새 나는 오즈 작품과 비교해도 이 〈만춘〉만큼 일본영화스럽지 않은 작품은 없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게 중요한 지점입니다. 〈만춘〉에는 거의 도쿄가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도 이번에 깨달은 겁니다. 이야기 설정을 봐도 그렇지요. 하라 세츠코와 류 치슈가 살고 있는 집은 기타가마쿠라(北鎌倉)에 있고, 후반부 둘의 중요한 드라마가 전개되는 장소는 교토입니다. 물론 둘이 다니고 있는 직장은 도쿄 도심이라는 식으로 설정되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찍혀 있는 도쿄 풍경은 '긴자 4초메 근방인 듯한 곳의 빌딩'과 '우에노 미술관 앞' 정도입니다. 나머지는 전적으로 어딘지 알 수 없는 석조 벽 앞이나 세트지요. 하라 세츠코의 친구 츠키오카 유메지의 집은 명백히 세트로 만들어졌음에 분명한 가공의 서양식 저택입니다. 이건 어찌된 일일까요? 오즈는 도쿄도 고토구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애초에 도쿄를 그릴 의사 따위는 아예 없던 감독이었던 걸까요?


      실제로 도쿄를 그리고 싶다는 의지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영화 감독은 여럿 있습니다. 도쿄는커녕 현실의 거리를 무대로 영화를 찍기 싫다라고밖에 보이지 않는 감독도 있지요. 그런 감독의 대표로 맨 처음에 들 수 있는 예가 그 유명한 미조구치 겐지와 구로사와 아키라일 겁니다.


      그러나 이 두 감독의 대표작은 대부분 시대극이지요. 세트로 만든 에도의 마을이 화면에 비치는 경우는 있어도 절대로 현실의 도쿄는 나오지 않습니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현대극도 찍긴 했지만, 현실의 도쿄라기보다는 어딘가의 환락가, 변두리, 빈민굴 같은 드라마틱한 장소를 무대로 설정한 게 대부분입니다. 평범한 도쿄는 거의 나오지 않지요. 시대극이라면 당연히 에도는 물론이고 가공의 마을 같은 곳이 무대가 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니 판타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그런 추상화된 무대 설정 안에서 셰익스피어의 원작 등을 영화화했고, 이게 해외에서 대대적으로 환영 받았지요. 한편 미조구치 겐지는 철저히 옛 일본의 전통적 아름다움에 집착했고, 구로사와 아키라 이상으로 이게 또 세계의 감독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참고로 일본 영화가 해외에서 처음으로 호평을 받게 된 계기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1950)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순간이 가장 유명합니다. 그게 1951년 무렵이던가요? 〈만춘〉은 1949년에 제작되었으니, 오즈가 이 영화를 해외 영화제 그랑프리를 노리고 만들었을 리가 없겠지요. 그렇다고는 해도 〈만춘〉의 호화찬란함은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어쩌면 구로사와 아키라보다도 앞서서 베니스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시 거기까지 생각하고 작품을 만드는 영화 감독은 아직 없었겠지요. 그렇다면 오즈는 무엇을 노리고 있던 걸까요? 도쿄 거리의 평범하기 짝이 없는 풍경은 어째서 이렇게까지 배제되고 만 걸까요?
      • 으아니!!!! 이런 소중한 자료 정말 감사합니다!


        생각해보니 좀 신기한 장면들이 많았네요. 코카콜라 표지판도 그렇고 둘이서 자전거 탈 때 얼굴 번갈아 보여주는 생각보다 긴(!!) 장면도 그렇고요.


        소개해 주신 책 꼭 읽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전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을 애니로 먼저 봤는데요(완결은 못 본) 애니야 그저 음식하는 힐링 애니로 봤는데 드라마는 영 땡기질 않더라구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는 좋아하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는데 전 매번 아무도 모른다의 충격이 잊혀지질 않습니다.

      본문글이나 oldies님 댓글보니 옛날 일본 영화 땡기네요. 저도 좀 생각하면서 영화를 보는 습관을 들여야겠어요ㅎㅎ
      • 아무도 모른다가 넷플에 떴을 때 조금 심드렁해서 못봤습니다. 충격적이었다고 하시니 땡기네요.


        옛날 일본 영화들 참 재밌어요. 어쩌다 지금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서두...ㅎㅎㅎ

    • <초여름> <동경 이야기>는 뭐에 홀린 듯 수십번을 봤습니다. 하라 세츠코는 참 신비로운 배우에요

      • 몰랐는데 늦봄, 초여름, 늦가을 다 있더라고요. ㅎㅎㅎ


        하라 세츠코는 정말 흑백영화에 잘 어울리는 비주얼과 목소리인 거 같습니다. 무성영화 여주인공같이 보이기도 하고요.

    • 세기말 시네필 호소인 시절에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는 많이 봤는데 오스 야스지로 영환 본 게 별로 없었어요. 그나마 제일 유명한 것 두 세 개 정도 의무감(ㅋㅋㅋ)에 챙겨 봤던 기억인데 이 글을 보니 다시 한 번 찾아 봐야... 하는 생각이 드네요. 잘 읽었습니다!
      • ㅎㅎㅎㅎ 무려 시네필.....


        전 구로사와 아키라보다는 오즈 야스지로가 더 취향에 맞는 거 같아욤...

        • 호소인에 방점을 찍어 주셔야 합니다. ㅋㅋㅋㅋ


          제가 그러고 놀던 시절(...)엔 아무래도 조지 루카스와 스티븐 스필버그가 대놓고 싸부님!!! 이라고 외쳐대던 구로사와의 입지와 인지도가 압도적이었죠. 또 대중적으로 아주 재미난 영화를 잘 만들던 게 구로사와이기도 했구요. 암튼 덕택에 맘 먹고 조만간 오즈 야스지로 영화를 도전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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