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소설 - 단
70년대 말에 설립된 정신세계사라는 출판사가 있었습니다. 당시 보기 드물었던, 컨셉 확실하게 잡은 출판사였던 것 같아요.
회사 이름에 맞아떨어지는 그런 책들을 주로 냈었죠. 4차원 세계, 히피 문화가 유행하던 시절 인기를 끌었던 소위 구도자의 수기/전기 등등등... 근데 당시 대한민국에선 그런 소재는 그닥 인기가 인기가 있었던 것 같지는.....
정신세계사에서 낸 책들이 대부분 넌픽션 형태였던 것 같은데 당시 한국은 넌픽션도 잘 안먹혔던 것 같아요. 그러다 어느날 소설을 하나 냈는데 이름이 '단'이었습니다.
그래도 회사 컨셉을 버린 건 아니라 이 책은 '구도소설'이란 설명문구가 붙어있었어요. 형식은 소설이지만 실존인물인 한 도사의 인생을 기록한 일종의 넌픽션이란 거였죠. 글쎄... 넌픽션이 안먹히니 소설 형태로 함 내보자 그랬던 건지도...(당시에 해외 원작은 소설이 아니었던 책들이 소설로 각색되어서 국내에 출간되는 일이 꽤 있었더랬어서, 우리나라는 뭐든 소설로 만들어야 팔리는구나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뭐 잘은 모르겠지만...)
도사는 원래는 도교를 업으로 삼은 사람을 이야기하지만 국내에서는 온갖 신기한 도술을 부리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로 뜻이 변질되었죠. 이 소설 역시도, 주인공인 우학도인이 도사가 되어가면서 이런저런 도술...을 익히는 과정을 그린 책이었습니다.
책은 대박을 쳤습니다.
이야기가 재미있었냐하면... 글쎄 뭐 시간때우기용 삐끕 무협소설 정도는 되었던 것 같아요. 뭐 어마어마하게 재미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시기를 잘 탔던 것 같아요.
그때가 마침 유리 겔러가 전국민 앞에서 '초능력 시연'을 보였던 직후쯤이었거든요.
그시기엔 대부분 사람들이 비현실적인 것들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성향이어서, 환타지나 에세프 같은 비현실 허구작품조차 잘 안먹혔습니다. 무협물 정도나 좀 먹히지 않았나 싶었는데, 그 무협지도 만화방에서만 향유되는 아주 저질문화-황당무계하고 만고짝에 쓸데없는 것 취급을 받고 있었죠. 나이먹은 어른이 나 무협지 읽는다고 어디가서 당당하게 말하지는 못하던 시절...
그런데 유리 겔러가 황당무계한 비현실의 끝이라할 초능력이 진짜로 존재한다고 국민들 앞에서 검증(당시 기준으로요. 지금은 사기라고들 하죠)을 해줬단 말이죠.
그냥저냥한 무협지였던 '단'이 국민적 관심을 끌게 된 건 대략 두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는 무협지에 나오는 각종 무공, 전래동화에 나오는 축지법 같은 각종 도술들이 실재로 존재하는 초능력이었다고 주장한 겁니다.
거기다, 유리 겔러의 초능력은 그냥 태생적으로 잘난 사람이 보여준 기적일 뿐 나하고는 관계 없는 일이지만, '단'에서 말하는 초능력은 누구나 수련만 하면 할수 있다는 거였어요.
여기 사람들이 넘어갔죠.
전국에 단학 수련원이 생겼고 나도 도술-초능력을 할 수 있게 될거라는 꿈을 품고 수련원 들어간 사람들 꽤 있습니다.
좌우간 엄청난 히트였어요.
'국민의 방송' 케볘스에서 '단'을 모티브로한 연속극을 만들었을 정도ㅂ니다.(책 내용과는 관계 없고, 걍 주인공이 도술부리며 돌아다니는 내용의 시대극. 보면서 저게 대체 책'하고 무슨 관계가 있나 싶었지만 방송전에 '단'을 영상화하는 거라고 광고 엄청 떄렸습니다.)
'단'의 히트는 무협지의 부흥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무협지 내용 그거 다 사실이라잖아요. 그럼 몰래 읽을 필요가 없는 거죠. 70년대 이후 만화방 문화로 내려갔던 무협지가 다시 당당하게 서점에 복귀했습니다.
무협지의 부흥 역시 단학이 흥하는데 기름을 부었습니다. 무협지에 나온 무슨 혈도가 어쩌고 내공이 어쩌고 하는 걸 단학 수련의 단서라고 본 사람들이 꽤 있었던 거죠(본토에선 양우생 같은 분이 오래전에 다 뻥이라고 밝힌 건데...)
히트의 또한가지 요소는, 국뽕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은 후진국을 겨우 면한 나라였거든요. 국가의 자존감이 낮았습니다. 좁아터진 반도에서 벗어난 일 없이 집안싸움이 아니면 외침만을 받아온 나라라는게 일반적인 역사인식. 할일 없는 사람들이 역사이래 몇번의 침략을 받았는지 같은걸 세보고 있던 그런 시절이죠.
그런데 '단'은, 한민족이 한반도가 아닌 대륙 전체를 호령하던 사람들이었다고 주장한 겁니다. 아마 이게, 이 소설이 그렇게 어마무시한 히트를 한 진짜 요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당시 독자평중에는 '책을 읽고 나니 키가 몇배는 커진 것 같다'는 것도 있었습니다. 맨날 두들겨 맞고 삥만 뜯기던 나라라고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우리가 세상을 문화적 지리적으로 지배하던 나라라는 겁니다. 혹하지 않을 수 없겠죠.
'단'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근거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한단고기라는 역사책에 나오는 내용이라는 겁니다. 대한민국 사학계가 왜놈들 밑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어서 진실을 담고있는 이 책을 인정하지 않고있다는 거였습니다.
사실 '단'에는 한단고기에 대한 언급은 많이 안나옵니다.
하지만 독자들이 그책 어디서 볼수 있냐고 질문이 쇄도해서, 정신세계사는 노들어올 때 물 젓자고 한단고기 관련해서 막 책을 찍어냅니다.
직접 번역판을 내기도 하고, 소설화시켜서 내기도 하고, 파생작으로 무협소설에 에세프 소설까지 냈습니다. 다 잘나갔죠.
그리고 여기 심취한 사람들이 생겨나 지금까지도 이어지게 됩니다.
남들이 보고만 있겠습니까. 너도나도 여기 뛰어듭니다.
다만, 정신세계사 이외에서 낸 책들에선 '환'단고기란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명칭에 대한 논란이 있었던 모양인데, 지금 여전히 그 세계관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환빠'라고 부르는 걸 봐선 환단고기파가 승리한 모양이죠.
'단'이 나오던 때는 경제적으로 막 못사는 나라에서 벗어나 이제 잘사는 나라가 되어보자는 꿈을 꾸기 시작한 때입니다.
사람이 먹고사는게 해결이 되면 명예욕이 생기죠. 그럼 학력위조의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국가 단위로도 마찬가지. 한국만 그런 것도 아니예요.
마침 먹고살기 좋아지고 이제는 자존심도 좀 세워보고 싶어졌는데 거기에 좋은 건수가 던져진 겁니다. 세상을 지배하던 나라였다고 하잖아요. 여기에 사람들이 넘어간거죠.
시간이 꽤 지나면서 그게 허위학력이란 걸 인식하게 되어 손절한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아직도 굳게 믿고 있는 사람들도 있죠.
주인공이 명색이 도사이니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예언도 하고 있는데, 이미 '단'에서 예언했던 시기는 다 지나간 것 같고... 그중에 몇가지는 대충 맞지 않았나 싶기도 하지만...
제가 기억하는 예언 몇가지는요...
한국 운동선수들이 단학수련을 하게되면서 한국 스포츠가 전세계를 석권하게 된다.
남북이 통일되고 중국은 분열되어 한민족이 과거 영토를 수복한다.
한국에서 핵무기를 무력화시키는 기술이 개발된다...
등등이요.
저게 이미 다 일어난 일들이라는 거죠ㅎㅎ
kbs 드라마에는 길용우씨가 도사로 나왔던 걸로 기억합니다. 사극으로 유사한 소재를 다룬 길손이라는 드라마도 했고....의외로 당시 KBS 가 이런 주제에 관심이 많았네요.
'나는 왜 환단고기를 자꾸 한단고기라고 생각하는 걸까' 라는 해묵은 의문의 해답이 여기 있네요. ㅋㅋㅋ 뇌가 시원해지는 기분입니다!
그 시절 동네 서점에 커다랗게 이 책 포스터 붙어 있던 게 기억나요. 잘 팔리는 책들 칸에 꽂혀 있어서 그러려니 했고, 소설일 줄은 꿈에도 모르다가 몇 년 전에 어디선가 들었네요. 당연히 단학이란 게 원래 존재하고 그것에 대해 설명하는 책일 줄 알았습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