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챠바낭] '여행자'를 봤습니다
- 2009년작입니다. 런닝타임은 1시간 32분. 스포일러는 안 적도록 하겠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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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는 1975년. 9살 소녀 진희는 아빠와 둘이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식당에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평소 궁금했던 아빠 소주도 살짝 맛 보구요. 예쁜 코트도 사고 신발도 사고 커다란 케이크까지 하나 사서 버스를 타고 함께 먼 길을 가요. 그리고 카톨릭 고아원에 버림 받죠. 자신이 버림 받았다는 걸 인정할 수도, 받아 들일 수도 없는 진희는 고집도 부리고 성질도 내 보지만 뭐 그런 게 먹히겠습니까. 차츰차츰 기가 죽고, 자존심을 굽히고서 주변에 의지하게 되고... 그렇게 현실을 받아들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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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든 소설이든 대부분의 경우에는 거기에 담겨 있는 이야기가 중요하겠습니다만. 또 어떤 경우에는 이야기 자체는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은 작품들도 있죠. 영화라면 시청각적 요소들을 통해 담고 있는 이야기보다 특별한 무언가를 표현할 수도 있겠고. 소설이라면 문체나 표현들로 비슷한 이야기도 전혀 다른 느낌으로 표현해낼 수 있구요.
'여행자'의 이야기는 참 뭐랄까... 원형 그 자체입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첫 장면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무엇 하나 특별히 이 영화만의 것이라고 할만한 사건이 없어요. 부모에게 버림 받고, 반항하다가 결국 받아들이고, 친구를 만들고, 그나마 적응하고 나서부터는 반드시 입양 되어야만 한다는 현실을 깨닫게 되고. 어떤 친구는 선택 받고 어떤 친구는 버림 받고... 이렇게 뻔한 이야기로 극장용 영화를 만들었다니!! 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만. 그게 그렇게 뻔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그러기엔 전달되는 감정들이 너무나 진실하고, 또 70년대 고아원과 그 곳의 아이들이 지내는 모습이 생생하고 그래요. 디테일의 승리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게 감독님의 자전적인 이야기라는 걸 생각하면 그냥 고개가 끄덕여지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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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한 가지 이 영화의 특징이라면, 제가 그동안 본 '버림 받은 아이' 이야기들 중에 거의 최상급으로 바람직한 어린이 시설이 나온다는 겁니다.
원장님 완전 인자 그 자체. 수녀님들도 그 흔한 엄격한 수녀님 하나도 없구요 그나마 무서운 척 하는 보모 아줌마는 딱 봐도 츤데레 캐릭터에요. 거기에 덧붙여서 함께 생활하는 아이들도 다 둥글둥글 귀엽고 순딩순딩합니다. 당연히 찢어지게 가난한 시설이지만 그런 형편 하에서 사람들이 최선을 다 해서 돌보고 있다는 게 충분히 느껴져서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네요.
그리고 이게 참 중요한 포인트였던 것 같아요. 철석같이 믿었던 친부모에게 버림 받은 아이가 고통 받는 데엔 굳이 빌런이나 사회적 부조리 같은 것까지 출동할 필요가 없다는 것. 어차피 이야기의 핵심이 버림 받은 아이의 고통과 성장을 보여주는 거라면 일부러 양념을 칠 필요가 없는 거죠. 오히려 이렇게 좋은 사람들에게서 돌봄 받는 상황이 되니 곁가지로 새어나가는 일 없이 주제에 집중하게 되어서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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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간 '문예 영화' 느낌이 나기도 했네요. 그러니까 뭔가 단편 소설 같은 게 원작인 영화 같은 느낌이 들어요. 비중 있는 캐릭터들 하나하나가 분명하게 상징하고 대표하는 바가 있고 (희진의 절친이 되는 숙희라든가, 고아성이 맡은 다 커 버린 아이 예신이라든가...) 또 소소하게 벌어지는 사건들에도 다 그런 식으로 '의미하는 바'가 보입니다. 다친 참새 키우는 이야기나 클라이막스 즈음의 무덤 장면이라든가... 그래서 이창동이 좋아할만한 이야기였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구요. 제가 원래 이런 느낌의 영화는 별로 안 좋아합니다만. 그래도 이게 과하지 않게, 적절한 선에서 표현되고 넘어가서 거슬리지 않고 괜찮았습니다.
그리고 뭐랄까... 되게 슬퍼서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영화란 얘길 많이 듣고 봐서 그랬나. 의외로 덤덤한 톤에 좀 놀랐습니다. 그렇게 '울어라!!!' 하는 연출이 전혀 없어요. 그렇다고해서 안 슬픈 영화라는 건 아니구요. ㅋㅋ 오히려 이렇게 덤덤해도 어차피 왕창 슬플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던 것이고. 이런 선택도 맘에 들었습니다. 가끔은 '차라리 화끈하게 울려줘!'하는 부분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미 말했듯이 아무리 덤덤해봐야 어차피 슬프고 오히려 더 슬프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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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들 아시다시피 김새론의 영화 데뷔작입니다. 굉장히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발탁된 경우였고. 이 영화로 바로 연기력을 인정 받고 이듬해에 출연한 게 '아저씨'. 그 후로는 꽤 오랫동안 탄탄대로를 걸었죠.
이걸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요.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반짝반짝 빛나요. 솔직히 영화 자체도 분명히 좋았지만 가장 좋았던 부분을 꼽으라면 '김새론을 캐스팅한 안목'이라고 말하고 싶어질 정도였구요. 표현력이 부족해서 더 이상 설명하기 힘드니 그냥 듀나님의 표현을 긁어 오겠습니다.
"특히 김새론의 경우는 인공적인 느낌 없는 사실적인 생활연기를 하는 동안에도 거의 '무비 스타'와 같은 위엄을 갖추고 있어요. 굉장히 매력적이고 신기한 경험입니다."
사실 영화 초반엔 아 이거 보는 타이밍이 영 안 좋았네. 라는 생각을 계속 했어요. 김새론이 밝게 웃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현실의 사건이 떠올라서 몰입이 안 되고 우울해져서 말이죠. 그래도 계속 보다 보니 나중엔 현실을 잊고 그냥 영화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만. 그렇게 감상을 끝내고 나니 착잡한 마음이 더 커지네요. 이렇게 훌륭한, 타고난 배우를 잃었구나... 라는 게 확 와닿아서요.
그 외에도 고아성이 나와서 작은 역이지만 좋은 연기 보여주고요. 설경구, 문성근 같은 유명 배우들도 카메오 수준이나마 힘을 보태주는 가운데 성인 배우들 중에선 아무래도 '보모' 역할의 박명신씨가 가장 눈에 띕니다. 캐릭터도 매력적이구요. 과장 없이 차분하게 이 슬픈 이야기에 힘을 보태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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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마무리를 하자면요.
아주아주 슬픈 이야기를 차분하면서 단아한 느낌으로 담아낸 영화였습니다. 슬픈 게 보고 싶은 분들이라면 무진장 슬프니 좋고. 너무 슬픈 게 부담스러운 분들이라 해도 이런 담담한 태도 때문에 거부감 없이 좋게 보실 수 있는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저처럼 예전부터 관심만 갖고선 '엄청 슬프다!'는 평들에 겁먹어서 못 보신 분들이 계시다면 그냥 보셔도 좋을 겁니다.
영화 외적인 요인으로 맘 편히 감상할 수 없는 작품이 되어 버린 건 안타깝지만. 그래도 제가 본 중 가장 인상적인 데뷔작으로 오랫 동안 기억하게될 것 같습니다. 정말 훌륭한 배우였어요.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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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했을 때부터 무척 좋아하던 영화인데, 주연배우가 이렇게 된 지금 다시 보기가 좀 망설여지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어린애들은 자기만 알아서 이기적이라고 하는데, 자기 입장만 알기 때문에 오히려 엉뚱한 자책감을 키운다든지(옷핀ㅠㅠ) 하는 아이다운 모습의 다른 면모를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무덤 장면도 아이로서는 무척 심각한 결심과 행동이었다는 걸 아주 진지하게 보여주고 있거든요. 저는 영화의 처음과 끝을 이어주는 아버지 등에 매달려 자전거를 타고 가는 환상 장면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사진을 보니 당시에 김새론 배우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호평과 관심, 사랑이 기억나네요.
차사고나 이후 일의 상세한 전개를 모르지만 너무 안타깝고 억울한 느낌이 많이 듭니다.
김새론 배우가 단번에 주목받는 아역으로 떠올랐던 데뷔작 사진들을 지금 보니 참... 에휴... 그렇습니다. 이 작품과 '아저씨', '도희야'가 아역시절 대표작일텐데 하필 다 작중에서 고통받는 역할이라 지금보면 더 마음 아플 것 같아서 망설여지네요.
입소문이 영화팬들 사이에서 상당히 좋았고 듀나님 리뷰까지 읽고나니 기대치가 너무 높아졌었는데 막상 보고나니 작품도 김새론 배우의 연기도 실망시키지 않았었어요. 개봉 당시 이후 재감상을 안해봐서 고아원 배경이라는 것 빼고는 내용을 많이 까먹었는데 사진들을 보니 저 단짝 역으로 나왔던 아역도 나름 인상적이었던 것 같고 언급하신대로 박명신 배우의 연기가 특히 좋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괴물'의 당찬 현서였던 고아성이 배우로서 바람직하게 잘 성장하고 있다는 걸 느꼈었죠.
지금 다시보면 너무 슬플 것 같긴한데 그래도 아저씨, 도희야 처럼 정신, 육체적 고통을 동시에 당하는 작품보다는 나을 것 같고 배티님 글 읽고 생각난김에 추모겸 오랜만에 재감상을 해봐야겠어요.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