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퇴마록]을 보고 나서

* 평어체로 씁니다.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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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에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이 한국에 개봉했다. 표면적으로 이 영화는 미국의 한 영웅적 시민의 실화였다. 동시에 이 영화는 911 테러의 상흔으로부터 자신을 구해내려고 하는 미국 그 자체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비행기가 날아가는데 통제가 안된다... 이 문장 하나에 담긴 미국적 공포를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영화 속 설리의 악몽에서 비행기는 도심 건물을 향해 돌진한다. 그러나 이 미국적 영화가 한국의 관객들에게는 전혀 다른 질문을 던졌다. 많은 사람들이 2016년 한국의 바다에서 어떤 일이 생겼었는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영화 속에서 비행기가 안전하게 착륙하는 그 순간, 한국의 극장에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전혀 짐작하지 못했을 감정이 맴돌았을 것이다. 왜 우리는. 우리도 언젠가는.


어느 토요일, 정성일 평론가는 영화와 사회의 관계를 이야기하며 말했다. [서울의 봄]에 천만관객이 들었을 때 그것은 하나의 징후가 아니었겠냐는 식으로, 그 상업적 흥행을 아리송해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신호를 읽었어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아주 정확한 워딩은 아니다) 김성수 감독이 윤석열의 쿠데타를 예언했다는 그런 유튜브 썸네일 같은 소리가 아니다. 그 천만명이 현 한국사회에 느꼈을 불안과 공포가 천만관객이라는 숫자로 나타난 것이라면 영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게을렀던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이야기였다. 영화가 세상의 거울이라면 그 세상의 집단적인 감정은 극장에서도 확인될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영화는 세상에 대한 질문을 영화를 넘어서, 훨씬 더 이르게 던지기도 한다. 관객인 우리는 그 질문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다. 


[퇴마록]을 보면서 문득 어떤 질문이 다가왔다. 이 영화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제목을 그대로 풀어보자면 마를 쫓아내는 이야기다. 마는 나쁜 존재이고 싸우는 사람들은 좋은 존재이다. 그렇다면 이 원초적인 선악의 대결은 왜 일어나고 있는가. 그것은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어른들이 어떤 아이를 구하지 못했던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2025년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나에게는 이 설정이 픽션 속 뼈대로만 느껴지지 않는다. 아이는 약한 존재이고 성인은 아이를 향해 본능적인 책임감을 느낀다. 그런데 21세기의 대한민국은 태초의 인류가 늘 수행하던 이 근본적 도덕을 너무 크게 실패한 곳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서교주를 제외한 모든 어른들이 아이를 구하기 위해 헌신한다.  


90년대에 써진 이 관념적이고 도식적인 이야기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우리에게 훨씬 더 능동적인 해석을 자극한다. 현암은 혼자 태극기공을 수련하다가 몸의 혈도가 뒤틀린 사람이다. 물론 이것은 무협지 세계관으로 능력제한을 걸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어떤 죽음 앞에서 무력함과 자기학대를 간접적으로라도 경험한 사람이라면 상상력을 발휘할 수 밖에 없다. 현암의 그 신체적 불편은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PTSD의 증상이 아닐까. 박신부는 원래 의사였고 이제 교계에서도 이단으로 취급받는 사람이다. 의를 실천하기 위해 그는 의사의 직을 포기했고 신부의 공식적 자리를 포기했다. 박신부가 자처하는 사회적 박탈은 단지 사회가 부패했다는 막연한 문장이 아니라 기득권 세력 속에서는 어떤 사회적 실천도 불가하다는 걸 반증하는 것 같다. 그리고 준후는, 사이비 종교 교주의 양아들이다. 그 교주는 그저 힘을 추구하며 자신을 따르지 않으면 다 죽여버리겠다는 독재적 인물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굳이 더 말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24년 12월 3일을 기점으로 제물이 될 뻔 했으니까.


격동하는 세계는 닫혀있는 영화를 뒤흔들며 연결지점을 찾아낸다. 혹은 그것이야말로 영화를 현실과의 단절이라 여기는 평소의 안일한 태도를 갱신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독법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퇴마록]을 완성도가 아닌, 정동을 뒤흔드는 힘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소 지나친 플래시백과 조금은 성기게 얽히는 인물들, 왜 교주가 누구는 죽이고 누구는 죽이지 않으며 어떤 신도들은 외부와 차단된 저 사회를 굳이 채우고 있는지 등의 의문점들은 이 영화에서 아주 크게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어떤 면에서는 주인공들을 닮아있다. 당장 어떤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앞뒤를 정확히 예측하여 뭔가를 주도하지도 못하지만, 맞닥트린 상황에서는 그저 있는 힘을 다해 싸우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능력자 배틀의 감정적 알리바이라 하더라도 '아이를 구하기 위한' 싸움이라는 점에서 사력을 다하는 박신부와 현암의 모습은 무겁게 다가온다. 이를테면 클리셰 덩어리였지만 그 비장미만큼은 무시할 수 없었던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의 렌고쿠가 그랬던 것처럼. (물론 [귀멸의 칼날]이 담고 있는 비장미가 일본 군국주의의 '옥쇄'를 떠올리게 하는 점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한다)


나는 [퇴마록]이 단지 판타지 무협으로 끝나지 않길 바란다. 이 영화 속에서 목소리를 갖고 움직이는 인물들에게 현실과 얽혀 박동하는 핏줄 같은 것이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박신부와 현암은 한 아이를 구해냈다. 이것이 이들에게 자리잡은 상처를 어떻게 어루만질 것인가. 동시에 준후는 최초의 살인을 아버지에게 행했으며 또 다른 아버지를 구해내지 못했다. 구해졌지만 구할 수 없던 기억을 가진 이 어린 세대는 과연 어떻게 헤매며 자라날 것인가. 원작에서는 남자였던 도혜스님은 애니메이션에서 여자로 바뀌었다. 이로써 현암은 여성을 구하지 못했고 여성의 원혼과 함께하며 여성에게 구원을 받은 남자가 되었다. 그의 안에서 그 여성적 힘은 어떤 생명력이 될 것인가. 그리고 이들은 승희를 만날 것이다. 승희는 같은 여자인 언니를 남자들의 폭력으로 잃었고 복수심에 완전히 사로잡힌 아버지가 있다. 이것을 여자와의 인연 안에서 살아가는 현암은 어떻게 반응할 것이며 승희는 현암을 통해 어떤 세계를 마주할 것인가. 이들에게는 어쩌면 영영 낫지 않을 상처가 있고 또 다른 수많은 상처를 마주해야한다. 그리고 그것이 현재의 한국사회다. 기쁨도 슬픔도 모두 지독할 수 밖에 없는 세계 속에서 관객인 우리는 살고 있다. 이 영화는 희미하게나마 우리의 이 현실과 분명히 연결되어있다.


누군가는 [퇴마록]을 레트로 열풍의 결과물이라고 할 것이다. 또 다른 이는 자극이 끊이지 않는 K 컨텐츠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는 것은 현실 속에서 무력한 이들이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마침내 찾아낸 영의 세계의 출입구다. 그렇기에 다음 [퇴마록]이 단지 마를 쫓는 이야기에서 더 나아가길 바란다. 죽어버린 사람들과 죽었는데 이승을 떠도는 존재들, 그리고 그런 세계를 헤매는 퇴마사들에게 사연이 없을리가 없다. 20세기말, 한 때 유행했던 신비한 소재로서 '퇴마'가 지금 이렇게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은 분명히 이유가 있다. 준후, 박신부, 승희, 현암은 스크린 안에서 우리의 마음을 구해내기 위해 절실한 굿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돈과 권력이라는 속된 힘으로 감히 어찌할 수 없는 영과 마의 세계가 있고 거기서는 자신들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고. 

    •  글 잘 읽었습니다. 관념적인 부분이지만 분명히 이런 쪽으로 해석하는 것도 의미가 있는 내용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퇴마록 애니는 일본식으로 말하면 '라노베 원작 애니 극장판'인 거고 비교도 그런 쪽과 먼저 해야 하지 않나 싶은데, 어쨌든 시대의 변화로 원치 않았던 무게감이 붙기도 했습니다만 결국 단순한 액션 애니로 봐도 무난 이상으로 잘 나왔다 할 수 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덤으로 제 생각을 좀 덧붙인다면 (원작 관련 스포일러 있습니다…) 원작 소설 퇴마록은 당시에도 이미 옛스런 소재들의 퓨전 하이브리드 집합체였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와중에도 좀 환빠로 압축되는 국뽕을 제외하면 나름 세기말 작품답지 않은 어떻게든 긍정적인 선택과 의지에 중심을 두는 이야기였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사실 퇴마록 소설의 연재 당시 마지막 분량도 처음에는 '구해졌던 아이'였던 준후가 갓 태어난 아이들을 맡고 뭔가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데에서 작지만 큰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었죠. 아이들도 지키지 못하는 사회에서 선과 악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같은 게 요즘에 와서는 뜬구름 잡는 이상만 쫓는 흰 소리처럼 보이는지도 모르겠지만요.


      지금 전세계적으로 이런저런 복각/리메이크/재탕 같은 문화 코드의 유행은 막연히 레트로 열풍의 결과물이라기보다는 어렸을 때 보았던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에너지를 지닌 작품들이, 어른이 되어서 세상의 쓴 물을 맛본 다음에도 같은 감동과 감정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가에 대한 한 가지의 기능성 테스트가 아닐까 합니다. 어쩌면 이미 아실 수도 있겠지만, 섬나라 쪽에서 20년 넘게 이어져온 여자 아동 대상 애니메이션 중에 '프리큐어 시리즈'라고 어린 소녀들이 변신해서 악한 존재들과 '퇴마(물리)'로 싸운다는 '전투형 세일러문' 같은 스타일의 히어로 시리즈가 있는데, 작년부터 이 프리큐어 시리즈의 잘 끝난 기존 작품들에게 갑자기 주연들이 나이 먹어 어른이 된 이야기를 그리는 속편들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어른 프리큐어] 라던가 [마법사 프리큐어 미래DAYS] 같은 식으로 좀 괴이한 제목이 붙었습니다만, 개중에는 세상을 지켜낸 소녀들이 어른이 된 뒤에 직장의 스트레스로 술을 푸고 있는 이야기도 있고, 꿈을 이루긴 했지만 정작 자신의 현실에 만족하지 못해서 고민하고 있는 아이들도 있고, 그냥저냥 하루를 살아가는 아이들도 있고 그런 식으로 나이에 걸맞지 않게 싸워야 했던 아이들의 후일담을 보는 게, 어른의 시점에서 봐도 또 묘한 감흥이 되기도 합니다. 


       중요한 건 단순히 추억이나 팬들의 팬심을 파고드는 상업적인 이유보다도 그런 재탕이라도 다시 보고 다시 공감하고 싶어지는, 각박한 현실의 속에서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고 싶은 기분들이 K반도국 말고 섬나라에도 있는 것일 거라 생각되기도 합니다. 양덕들 사이에서도 히맨이나 쉬라 같은 것들의 리메이크들이 이어지고 있고 고스트버스터즈 같은 80년대의 유산이 다시 나오는 이유가, 단순히 세대가 바뀌어서 다시 써먹을 수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 쪽에서도 조금이라도 옛날의 긍정적 이미지를 받고 싶다는 것을 드러내는 훈훈함과 서글픔이 공존하는 그런 이야기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리고 [퇴마록] 속편도 나올 수 있다면 그런 긍정적인 이야기로 흘러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단순히 90년대에 즐겼던 이야기를 21세기에 태어난 젊은이들에게 보여주고 공감할 수 있기만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때의 긍정적인 이야기는 현재에도 의미가 있음을 다들 알고 느낄 수 있기를 바랄 수 있는 퀄리티로 잘 나와주기를 기대합니다.


         여담이지만 [귀멸의 칼날]의 시대 배경은 1910~1920년 대입니다. 귀칼 작중에선 경찰은 가끔 나와도 군인은 나오지 않고, 혈귀들을 잡는 것은 귀살대라는 사설집단입니다. 작중에서 그려지지 않지만 아마도 군인들은 침략전쟁에 바쁘다고 해야 겠지요. (이후 귀살대에서 살아남은 애들이 징집되거나 할 수도 있겠구요) 세상이 어떻게 나쁘게 흘러가도 그 안에서 개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일본 특유의 이야기기도 합니다만, 극장판 무한열차편에서 렌고쿠란 캐릭터가 중요한 건 군인스러운 옥쇄로 표현되는 굳건한 희생의 이미지를 뻔뻔하게 늘어놓았기 떄문이 아니라, 렌고쿠가 말하는 개인의 할 일을 실천하는 것 및 최선을 다하는 삶의 방식을 가르쳐준 어머니에게 "당신 같은 분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영광이었다"라는 (좀 과하게 뻔뻔하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노모에게 할 수 없는 부끄러운 고백을 할 수 있는 삶의 방식 같은 게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말을 할수 있을 만큼 최선을 다해서 살아갈 수 있었는가 같은 걸 반성하는 부끄러운 어른일 뿐이지만요. 


       그리고 귀멸의 칼날보다는 좀더 퇴마록에 가까운 결의 작품인 게게게의 키타로 극장판 [키타로 탄생 게게게의 수수께끼]에선 2차대전 패배 후 요괴들의 피로 약을 만들어 일본인들을 강화하려는 어리석은 자들의 이야기가 나오죠. 해당 작 중에서는 주연급 인물을 통해서 그런 생각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며 "이 땅은 죽은 자들의 원한을 모으는 곳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장소다"라는 말이 나오고 요괴의 아이를 구해내는 이야기가 되면서, 그렇게 피와 승리에 눈이 멀어서 망가졌던 당시 일본 사람들을 까는 내용이 됩니다. 그리고 요괴의 아이지만 인간에게서 키워진 키타로가 현재까지 살아서 요괴와 인간이 알게 모르게 공존하는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결말이 되죠. 


        다시 생각하면 아이라는 미래를 지키는 것이 현재의 희망이라는 뉘앙스가, 퇴마록이나 여타 흥행한 유사품 오컬트 계열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중요한 뭔가로 나오고 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하여튼 글을 잘 읽었기 때문에 뭔가 길게 쓰고 싶어졌습니다만, 의미없는 댓글이 좀 길어졌습니다. :DAIN. 

      • 길게 썼는데 댓글이 날아가서 허무하네요. 좋은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이 영화를 단순하게 옛날 인기작을 단순히 영상물로 번역한 작품이 아니라, 그 시대에 다소 두루뭉실했지만 그래도 현재에 더 유효한 원초적인 휴머니즘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작품 내내 이어지는 불살에 관한 신념은 말씀하신대로 혼세편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그들의 기본적 행위와 가장 크게 부딪히게 되는데 그런 부분에서 이 작품이 끝끝내 일관성을 지켰던 부분은 인상깊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만 저는 이 작품이 그 시절 추억을 재현하면서 반가운 영상물에서 그치지 않고, 30여년이 지난 지금 이 작품의 주제나 다른 것들이 어떻게 전달될 수 있을지에 대한 기대를 품고 있습니다. 어른이 되고 나서 보았을 때 달라지는 감흥을 말씀해주셨는데, 저는 [퇴마록]을 다시 보면서 악당의 유치함을 다시 생각해보고 있었습니다. 끽해야 사람을 많이 죽인 연쇄살인자에 그칠 뿐 현재 사회를 뒤집기에는 택도 없는 야망이라고 느꼈습니다. 그것은 아마 제가 어렸을 때 원작을 접하면서 살인이라는 행위나 악의 지배자라는 구도에 훨씬 더 압도당해서 그랬을 것이고 지금은 현실 세계의 보다 실질적인 힘에 대해 더 많이 느끼고 있어서일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원작 퇴마록이 이 현실세계의 조건 속에서 돌아가는 이야기라는 걸 더 명확하게 드러내주길 원하고 있습니다. 어떤 정의의 용사들이 신비한 힘을 휘두르며 싸운다, 가 아니라 그들이 퇴마를 한다는 게 자본주의 세계에서, 혹은 공권력의 폭력이나 의학적 지식등이 사람을 구해내지 못하는 세계에서 누군가를 구해낼 수 있다는 걸 더 곱씹게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이 오래전 작품이 나이드는 방식 중 하나이고 나이든 관객들과 함께, 또 새롭게 어울리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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