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할머니 상을 치뤘습니다

지난주 월요일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어머니께 들었습니다. 그 전날 요양병원에서 많이 안좋아지셨다가 다시 좋아졌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만에 생긴 일이라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회사에 말하고 짐을 챙겨서 황급히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오후 여섯시쯤에 부고를 돌렸기 때문에 방문객은 아무도 없었고 장례식 의상도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오래간만에 가족들이 모여서 반갑기도 하고, 이런 일이 아니면 모일 일이 정말 없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할머니에 대한 저희 가족의 공통된 기억은 그렇게 곱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어서 딱히 슬플 일은 없었습니다. 자세한 말은 좀 어렵고, 그는 본인의 혈육들에게는 상처를 많이 남겼던 분이라고만 하겠습니다. 할머니를 잘 아는 친지나 다른 분들은 장례식장에서 회한을 뱉어내기도 했고, 조금 모진 농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별의 아픔은 죽음이라는 사건이 아니라 살아 생전에 축적한 다정과 은혜에서 비롯된다는 걸 씁쓸하게 실감했습니다.


둘째날부터 사람들이 조금씩 찾아왔습니다. 공교롭게도 저희 고모부가 "어깨" 시절을 보내신 분이라 동종업계 분들이 많이 와주셨습니다. 그걸 보면서 저는 사촌동생과 한국영화가 어둠의 세계를 얼마나 미화하고 있는지를 토론하기도 했습니다. 저희 고모는 뒤에서 질린 표정을 하면서, 만약 장례식장 앞에서 사람들 우르르 세워놓고 인사하는 그런 퍼포먼스를 하면 진짜 가만 안둔다고 미리 언질을 해놓았다고 합니다. 저희 아버지는 하필이면 또 법조계에서 일하시던 분이라 만일 아버지 직장 동료분들이 오시면 이 자리는 수사현장이 되버리겠구나 하는 뻘생각도 했습니다. 장례식 중에 별 일은 없었고, 고모부 지인분들은 오래 자리를 지키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젊은 사원(?)들이 가끔씩 벌떡 일어나 우르르 마중나가는 것만 빼면 그냥 흔한 장례식장의 풍경이었습니다. 


장례식 내내 느꼈던 것은 가족이라는 바운더리의 끈끔함이었습니다. 저야 잘난 거 없고 이제 살만 쪄버린 아들이지만 아버지는 그런 저를 듬직해하셨는데, 그건 아버지 친구분들에게 저를 소개시킬 때 특히 두드러졌습니다. 아들놈이라고 저를 인사시키는데 어떤 분들은 어릴 때 보고 오랜만에 본다면서 놀라워하셨고 어떤 분들은 아버지를 잘 챙기라면서 조언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저는 일반적인 한국의 가정의 부자 관계처럼 아버지랑 딱히 살가운 말을 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아버지를 덜 외롭게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상가족의 프레임에 비판적인 입장이지만 그런 제 관념과 무관하게, 부모님 세대 분들 앞에서 아들 구실은 해야되지 않나 하는 책임도 느꼈습니다. 저는 진짜 제 인생을 멋대로 산 사람이라 그래도 공부 좀 더 열심히 하고 그럴싸한 직업이라도 얻어서 아버지의 명예욕을 조금 채워드릴 걸 그랬다 하는 후회도 들구요. 


동시에 혈연이라는 관계는 운명에 필적하는 강한 힘을 가진 것처럼도 느껴졌습니다. 가부장제 문화 때문에 할머니의 장남인 저희 아버지와 장손인 제가 주로 조문객들을 맞아 절을 했고, 제사를 지낼 때에도 앞쪽에서 이것저것을 했는데요. 세상에는 어떤 식으로든 정해진 자리가 있고, 그 정해진 자리에는 반드시 정해진 사람이 와있어야한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것이 가모장제라면 저희 고모와 장손녀인 제 동생이 되었겠죠. 어떤 의도나 행적이 아니라 오로지 태어난 순서나 성별로 어떤 자리는 자동으로 주어지고 책임이 뒤따르는 것이 무시무시하단 생각을 했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할머니의 아들인 걸 부정할 수 없고 저 또한 할머니의 손자인 걸 부정할 수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태어났으니 낳아준 사람이나 그 위의 조상들로부터 무언가를 자동으로 물려받게 된다는 이 질서에 처음으로 압도당했습니다. 그래서 예전의 왕위계승이나 가문의 유산상속도 그렇게 핏줄을 중시했던 것이겠죠. 중간중간 코폴라의 [대부]나 오정민의 [장손]을 좀 떠올렸습니다. 어쩌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운명에 의해 살아가게 되는, 순응할 뿐인 존재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모든 '식'들이 그렇듯 이것저것 뒤섞인 감흥을 계속 받았습니다. 제 사촌동생은 군대에서 황급히 휴가를 나왔는데 그 동안 헬스를 열심히 해서 몸이 꽤 좋아졌습니다. 제 조카는 다섯살이 되어서 저만 보면 악당 취급을 하면서도 자길 괴롭혀주길 바라고 계속 꺄 꺄 신나게 소리를 질러댑니다. 특히 주변을 정신없이 휘저으며 뛰어다니는 조카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다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긴장과 피로가 꽤 풀렸습니다. 떠나간 자를 보내는 자리에서 어떤 가족들은 쑥쑥 자라고 활기를 뿜었습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는 어떤 상태들이 다 섞여있는 거겠죠. 

    • 할머님의 명복을 빕니다. 


      저는 자랄 때 할머니와 가까웠는데 성인이 된 다음 잘 해 드리지 못하고 떠나셔서 후회가 많이 되었어요. 할머니의 부재는 시간이 가면서 더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Sonny 님 역시 일이 닥친 지금보다 나중에 더 실감하실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제사나 관혼상제에서의 구성원 위치는 저에게도 생각거리를 많게 합니다... 떠나간 가족과 새로 자라나는 가족 얘기를 하시니 마침 최근 본 '룸 넥스트 도어'의 결말이 생각이 나네요.  

      •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특히 저희 아버지나 고모에게는 아무리 미웠어도 그 공백이 크게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챙겨드려야죠...




        [룸 넥스트 도어]가 그런 내용이군요. 나중에 봐야겠습니다. 

    • 조부모의 조건없는 애정덕분에 부모보다 더 깊은 관계를 만드는 사람도 있는데, 저도 할머니가 떠났을 때 그리 슬프지 않아서 참 어색했던 생각이 납니다. 장남인 아버지가 딸만 낳아서 첫째 작은아버지의 아들인 사촌동생이 장손인데, 호스피스에서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이 장손만 알아보시는 걸 보면서 정말 가부장제는 이상하다고 느꼈습니다. 아직 어렸던 장손 사촌동생이 뭐 대단하게 할머니를 위해 한 것도 없는데 그러셨거든요. 

      • 그러셨군요. 할머니들의 장손사랑은 저희가 좀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있죠. 제 동생도 할머니한테 대놓고 항의하고 그랬으니까요. 조부모란 존재는 한다리 건너에서 다른 세대로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저도 거동이 어려운 어르신을 자주 찾아뵈려고 노력하는 입장이라 여러 생각이 교차합니다.

      과연 삶이란 무엇인지...
      • 저는 조금 특수한 경우라 큰 감흥이 없었지만 일반적인 애정을 주고 받은 사람들이라면 큰 상실감을 느낄 것 같습니다. 


        나보코프님에게도 평화와 위안이 찾아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가족사에 그런 사정이 있으셨다니 진짜 맘이 복잡하고 많은 생각이 드셨을 것 같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저는 저희 고모가 제일 짠하더라고요. 당신의 어머니인 사람을 마지막까지 케어하고 고된 감정받이까지 했어야 하기에...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할머님의 명복을 빕니다.

      가족간의 왕래가 많지 않은 집안이라 어른들 돌아가시고 후회하지 않게 평소에라도 찾아뵈어야지 하면서도 참 마음처럼 안되는 그런 못난 인간인데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글이었어요.
      • 저는 정말 그런 걸 신경안쓰고 살았는데 이제 부모님이나 친척들 경조사는 꼭 챙겨야겠단 생각이 들더군요... 혈족의 끈끈함이 따로 있달까...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장례 치르느라 애쓰셨어요.
      • 저는 별로 한 게 없고 저희 부모님이랑 고모가 고생 많이 했네요. 감사합니다.

    • 할머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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