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쿠팡에서 개별구매로 봤어요. 이 영화에 대한 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남아 있었는데 마침 다른 영화와 연관 추천으로 뜨길래 봤습니다.

1938년 스탈린 시대를 배경으로 비밀경찰NKVD 일원인 주인공이 자신이 속해 있던 조직의 추격을 당하면서 모종의 목적을 갖고 도시 이곳저곳으로 누군가를 찾아다닌다는 내용입니다. 스탈린, 비밀경찰, 레닌그라드, 이처럼 실재했던 것을 바탕으로 한 내용이지만 SF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인공이 찾아다니는 사람들에게 벌어진 일들이 어처구니 없기도 하고, 시각적으로도 그냥 디스토피아입니다. 사람들은 농담 한 번에 체포됩니다. 그 농담이 퍼지면 사회를 좀먹을 수 있고 그러다 보면 위대한 사회주의국가를 전복시킬 수도 있으므로 미리 싹을 잘라야 한답니다. 그래서 고문을 가해 반정부 조직에 속해 있는 양 자백하게 하고 총살해 버립니다. 스탈린 치하의 이 세계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칠드런 오브 맨'과 분위기가 흡사한데 그보다 훨씬 더럽고 비참해 보여요. 사람도 건물도 땟국물이 흐르고 골목을 돌면 폐허고 흔한 게 시체입니다. 당시 레닌그라드를 사실적으로 재현하지 않았습니다. 온 도시가 빈민굴 또는 거대한 수용소 자체로 보이거든요. 

감독에 의하면 이 영화는 역사 드라마가 아니라 하나의 우화라고 합니다. 스탈린이 악명 높은 비밀경찰을 두고 엄청난 수의 사람들을 수용소로 보내거나 집단 학살하거나 사상을 '검증'하여 처형시킨 건 사실이죠. 그 사실을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고 우화적인 표현 방식을 써서 과거보다 노골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지금도 진행되는 바에 적용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사실 모든 역사 드라마는 우화의 성격을 품는데 이 영화는 표현면에 있어서도 티가 꽤 납니다. 


영화가 도시 전체를 수용소로 보이도록 만든 것은 재현은 아니나 NKVD가 설치고 다니던 당시의 도시 분위기를 표현한 것이겠지요. 스탈린이 문학 작품을 포함한 독서의 취미가 있었고 히틀러가 미술학도 출신이라는 것은 저를 꽤나 암담하게 만드는 정보입니다. 이는 한 인간의 복잡성을 생각하기 보다 그냥 인간 혐오로 나아가기 쉬운 정보 같습니다.  

나치가 유대인에게 저지른 만행은 매체에서 영화나 드라마에서 많이 다루었지만 스탈린 시대에 있었던 일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습니다. 스탈린의 만행은 폴란드나 유대인, 소수민족에 저지른 짓도 심각하지만 아마도 광범위하게 자국민을 대상으로(이 영화에도 나타는데 막판에는 NKVD조차 숙청대상이 됩니다) 한 점이 국내 문제로 취급되어 그런가 싶습니다. 가해와 피해의 구분이 선명하지 않은 채로 섞여 현재의 사회로 이어져서 유야무야 묻힌 부분도 많겠죠. 정부의 통제와 압박도 여전한 거 같고요. 저의 지식이 피상적이니 막연한 말은 이쯤 줄이고, 어쨌거나 공산당이 개인의 머리 속을 샅샅이 뒤져서 통제하려고 했다는 것은, 제노사이드 못지 않은 참으로 섬찟한 짓입니다. 이런 점은 현실 권력을 갖게 된 과거의 공산주의나 극단주의 종교나 비슷하네요.    


러시아 현대 영화는 오랜만에 보았어요. 시각적으로, 미추를 떠나서 약간의 낯섬이 신선하네요. 나름의 색깔이 느껴집니다. 주연인 유리 (알렉산드로비치) 보리소프는 널리 알려진 영화에 출연했어요. '아노라'와 '6번 칸', 저도 보려고 쟁여놓은 영화들입니다. 주연 배우 이름은 '유리'로만 기억하려고 합니다. 온전히 기억하려다 다 생각이 안 날 것 같으니까요. 그런데 러시아인의 이름을 제목에 넣는 패기라니! 저는 이 글 쓰면서 검색 중에 볼고노프, 볼코포프 이러다가 그냥 대위 탈출하다로 찾아 보았어요...     

common?quality=75&direct=true&src=




    • 이 영화 굉장하죠. 저도 보면서 이 영화가 묘하게 초현실적이란 생각을 여러번 했습니다. 감독님이 망명했다든가 하던데, 이런 찐 광기의 영화는 좀 봐줘야 할 것 같더라고요.

      • 보셨군요! 현실이 초현실인 상황을 표현했달까요. 부부 감독이라고 하던데, 앞으로도 영화를 꼭 내놓으시기 바랍니다. 

    • 저는 그냥 실제 스탈린 시절을 배경으로 했다고만 생각했어요. 그냥 대충 이런 식으로 탄압하고 학살했다는 정도만 알고 있어서 다소 영화적으로 과장된 디스토피아라고 느껴지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네요.




      유리 보리소프는 저도 딱 국내에 소개된 6번 칸, 아노라랑 이 작품을 봤는데 거친 느낌의 빡빡머리로 나오는 건 같지만 미묘하게 그 안의 부드러움? 연약함을 드러내는 연기가 인상적이에요.

      • 유리 보리소프 출연작 세 편을 다 보셨네요. 말씀대로 멀리서 보면 거칠고 가까이서 보면 부드러움이 있는 느낌입니다. 다른 작품도 궁금합니다.  

    • 이런 영화가 있는 줄도 몰랐는데 심지어 재밌어 보입니다. 소개글 감사하구요!




      근데... 진짜로 러시아 영화인데, 러시아에서 스탈린 시절은 맘껏 풍자하고 비판해도 금기가 전혀 아닌가 보죠. 쌩뚱맞게 이게 되게 의외입니다. ㅋㅋㅋ 언젠가는 이런 식으로 푸틴 시절 까는 영화도 꼭 나왔으면, 그런 미래가 왔으면 좋겠구요...

      • 신선하고 재미도 없진 않아 저는 좋게 봤습니다.ㅎ


        맘껏 풍자는 어려운 모양입니다. 소련 시기를 배경으로 논픽션 작품 썼던 작가가 재판도 받았고요. 치부가 많은 비정상 권력을 유지하는 정권이니...  

    • 러시아 현대 영화는 본 적이 없는데 재밌을거 같습니다. 추천해주시는 영화들 찜하면서 한편씩 보고 있어요!!!
      • 저도 보던 영화와 다른 약간의 낯섬이 마음에 들었어요. 언제 생각나시면 봐 보셔요^^

게시판 2012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462,407 01-31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147,940 12-31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122,151 04-01
130354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10 187 12-31
130353 아바타 3를 보고 유스포 2 192 12-31
130352 [핵바낭] 올해 잉여질 결산 잡담 14 334 12-31
130351 아바타: 불 과 재 보고 왔어요 짤막 소감 6 229 12-31
130350 [영화강추] '척의 일생' 8 249 12-31
130349 흑백요리사 2 8~10회, 싱어게인 4 탑 4 결정 6 285 12-31
130348 Lacombe Lucien(1974) 7 131 12-31
130347 [관리] 25년도 보고 및 신고 관련 정보. 15 324 12-31
130346 Isiah Whitlock Jr. 1954 - 2025 R.I.P. 2 138 12-31
130345 [왓챠바낭] 우편배달부 말고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잡담입니다 12 267 12-31
130344 [넷플] 말 많고 탈 많은 '대홍수' 드디어 봤습니다 14 453 12-30
130343 [반말주의] 다들 올해 고생 많았어!! 새해 모두 건강하고 복 터지길 바래!! 12 186 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