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만에 다시 본 ‘알파빌’(스포일러!)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1995년에 EBS에서 방영했으니까 30년 만에 극장에서 본 영화입니다.
원래 1965년 작이니 공개 30년 후에 제가 TV에서 본 거고, 지금 시점에서는 60년 전 영화이네요.
어린 나이에 본 영화를 나중에 다시 보고 여성차별적 시작에 경악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영화가 그랬습니다.
30년 전에 처음 보았을 때는 수퍼컴퓨터인 알파60의 최면을 거는 듯한 음성과 반짝이는 불빛만으로 표현한 시각 효과가 멋있었고, 실제 파리 시내에서 찍었다는 미래 도시 풍 흑백 화면이 인상적이어서 터프 가이 주인공이 컴퓨터가 지배하는 전체주의 사회를 뒤엎는다는 줄거리는 거의 기억을 못했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다시 보니 외계에서 온 스파이인 남자주인공이 백치 상태인 여주인공을 가르쳐서 해방시키는게 중심 줄거리를 이끄는 축이고요. 안나 카리나가 연기하는 여주인공 나타샤는 인공지능 컴퓨터의 발명자인 천재 과학자의 딸이자 본인도 명목상 과학자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아버지 뻘 나이인 남주에게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러 갔다가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을 통해 스스로가 인간임을 깨닫게 되는 걸로 결론이 납니다.
컴퓨터가 지배하는 전체주의 사회에 남자들은 양복입은 직장인이거나 가운입은 과학자/기술자인데, 여자들은 걸핏하면 벗어 부치는 섹스 워커거나 수영복입은 처형부대원들입니다. 당연히 여러 연령대의 다양한 얼굴, 체형을 가진 남자들에 비해서 섹스워커와 처형부대원들은 공장에서 찍은 것 같은 젊고 예쁘기만 한 백인들입니다.(중간에 대사 없는 흑인 여자 비서가 잠깐 나오는데 이 사람도 젊고 예쁘기는 했습니다;;;;)
호텔에 체크인하는 손님들에게 제공되는 유혹녀들은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한 설정이라고 생각했는데, 감정을 가졌다는 이유로 처형되는 남자들이 총알을 받고 수영장에 쓰러지면 입에 칼을 문 수영복 미녀들이 다이빙해 달려들어 싱크로나이즈 스위밍 팀처럼 호흡을 맞추어 처형자를 찌르는 처형식은 정말 다시 생각해도 이해가 안되는 장면이었습니다.
(왜 하필 수영장에서 처형식을? 총을 맞아서 쓰러진 사람을 왜 다시 칼로 찌르지? 실제로는 수영장에 핏물이 가득해야 하는데 물은 어떻게 계속 맑을 수 있지? 이 여자들은 인간이 아니라 처형 로봇인가?)
하지만 다시 봐도 알파60의 묘사는 인상적이기는 했고요. 안나 카리나를 좋아하는데 유명한 스틸 사진 장면이 무척 아름답기는 합니다. 어떻게 동시대 파리를 미래 도시로 만들었나 싶었는데, 주로 밤장면 촬영해서 깔끔하고 기계적인 느낌을 나게 처리한 미술 효과는 정말 훌륭합니다. 자기 테이프가 돌아가는 거대 인공지능 컴퓨터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너무 오래되서 복고풍의 매력도 잇네요. 제가 불어를 알아서 싯구가 많은 대사를 이해하면 더 좋게 봤을 수도 있겠고요. 하지만 conscience를 ‘양심’으로 번역한 자막은 좀 문제가 있는 듯 합니다. 맥락상 이것은 ‘양심’이 아니라 ‘의식’을 나타내는 내용이 분명하거든요.
누벨바그를 기념한다는 “파격과 상상’ 영화제 4편 중에서 이제 ‘암흑의 군단’만 남았네요.
안나 카리나 스틸 사진
https://cdn.moma.cymru/wp-content/uploads/2022/09/27114605/alphaville-1965-anna-karina-behind-glass-frame-holding-book-1400x700.jpg
이게 분명히 OTT인지 iptv vod인지에 무료로 있었는데, 작년 말쯤에 갑작스레 다시 보고 싶어져서 찾아보니 사라졌더라구요. 그래서 아쉬워하며 방치 중이었는데 이런 글이 올라 오니 너무 반갑습니다. 그것도 극장에서 보신 듯 하니 부럽구요.
다시 보고 싶었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처음 볼 때 정말 엄청나게 재미 없게 봐서(...) 지금 다시 보면 어떨까 싶어서였어요. ㅋㅋ 당시에 활동하던 동아리에서 고다르, 트뤼포 위주로 누벨 바그 영화들을 챙겨 보며 스터디 같은 걸 하고 있었는데요. 의외로 두 감독의 다른 영화들은 생각보다 재밌게 보던 와중에 '어, 이건 SF니까 좀 재밌겠는데?'하고 덤볐던 이 영화에서 극한의 고통을 체험했던 슬픈 기억이... ㅋㅋㅋ 결국 세 번 보고 네 번 보고 하면서 동아리 댓거리에서 말할 거리는 만들어냈지만 다시 보고 싶진 않다! 라는 강력한 다짐을 남기게 되었죠.
암튼 이 글을 읽고 나니 정말로 다시 한 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불끈불끈합니다만. 일단 유료라도 vod 서비스 하는 곳이 있나 찾아봐야겠어요. 글 잘 읽었습니다.
+ 근데 왜 저는 이 영화 주인공 이름을 계속 기억하는 걸까요. 레미 꼬숑. 이유를 알 수 없게 30년간 까먹지를 못하고 있네요. 레미 꼬숑 레미 꼬숑
1995년에 EBS에서 고다르의 영화 5편(네 멋대로 해라, 미치광이 삐에로, 알파빌, 작은 병정, 메이드 인 U.S.A)를 상영했다는데 ‘네 멋대로 해라’랑 ‘알파빌’은 꽤 재미있게 보았는데 ‘미치광이 삐에로’를 보면서 얼이 빠졌던 기억이 나네요.
2025년 지금 극장에서 상영하는
‘알파빌’은 모 영화 체인에서 “파격과 상상“란 이름으로 리마스터링 시리즈 기획전을 해서 볼 수 있었습니다. ‘몽상가의
나흘 밤’, ‘미치광이 피에로’는 이미 상영했고 현재 ‘알파빌’이 걸려 있고요, ‘그림자
군단’ 상영 예정입니다. 영화 타이틀에도 나오지만 ‘알파빌’의
원제는 ‘알파빌: 레미 꼬숑의 이상한 모험Alphaville: Une étrange aventure de Lemmy Caution’입니다^^
https://youtu.be/7aCEe9MYdvM?si=KweVtni8fh5pLmXE
2분 35초
알파 60의 질문 중 종교가 뭐냐는 질문에 존슨은 Je crois aux données immédiates de la conscience
의식이 즉각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믿는다고 한 거 같긴 합니다.
알파60은 목표에 맞는 결과를 내기 위해 적합한 인지적 능력을 알파5가 가졌는지 시험해 보는 거긴합니다
스페인 어 자막으로는 의식이 불러 일으키는 것(inspiracions de la consciencia)라고 했네요
chinos
Pekingville 나오는 거 봐서 중국혐오증이 또
도입부에 남주가 고통의 수도라고 말해서 뭔가 했더니 엘뤼아르 시였군요
흥미로운 정보 감사합니다. 알파60의 질문에 대한 답이 우리말 자막으로는 "양심" 운운 하는 내용으로 나와서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했더니 무려 프랑스 철학과 연결되는 대사였군요;;;;
https://m.facebook.com/watch/?v=1001803270730412&vanity=Endorfinart
안나 카리나가 엘뤼아르 시 읽는 부분에서도 의식이 맞아 보입니다
Notre Mouvement
Nous vivons dans l'oubli de nos métamorphoses
Le jour est paresseux mais la nuit est active
Un bol d'air à midi la nuit le filtre et l'use
La nuit ne laisse pas de poussière sur nous
Mais cet écho qui roule tout le long du jour
Cet écho hors du temps d'angoisse ou de caresses
Cet enchaînement brut des mondes insipides
Et des mondes sensibles son soleil est double
Sommes-nous près ou loin de notre conscience
3일 동안 스페인 어 자막으로 토막토막 봤는데 재미있네요
레미 ㅡ 나타샤는 완전히 블레이드 러너의 데커드 ㅡ 레이첼이잖아요,그 영화도 넓게는 필름 누아르로 분류되고요
저는 오손 웰즈의 심판도 드문드문 생각났습니다.
제가 핀처의 킬러를 보고 프랑스 원작이 있지 않나 싶었고 그래픽 소설같다고 생각했는데 프랑스 그래픽 소설이 원작이었습니다. 알파빌도 초반부터 그런 느낌이 드네요.
안나 카리나가 말하는 conscience는 의식 맞는 듯 합니다. 의식이란 단어를 알게 되니 두려움(J'ai peur)도 생긴다고 하는 게 맞는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