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백수 일상...
1.백수는 힘들어요. 캔버스 때문이죠. 아침에 일어나면 어쨌든 눈앞에는 오늘 하루라는 캔버스가 펼쳐져 있거든요.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기 때문에 거기에 뭐라도 그림을 그려넣어야 하고요.
일이 있는 사람은 차라리 백수보다 나아요. 하기로 약속되어져 있는 일, 어제 한 일을 그냥 또 하면 되니까요. 이러면 누군가는 이러겠죠. 어쨌든 직장은 짜증나는 곳인데 그래도 자유로운 게 썩 나쁘지는 않은 거 아니냐고요.
2.하지만 그렇지가 않아요. 그런 생활이 오래되면 더이상 할 게 없거든요. 어쨌든 일하는 건 어제 한 거를 또 하면 된단 말이예요. 그게 하기 싫고 짜증나는 생활의 반복이라도 완전히 미칠 것 같지는 않아요.
한데 백수는 어제 한 거를 또 할 수가 없어요. 예를 들어 어딜 갈지 궁리하다가 인천 인스파이어에 한번 놀러갔다고 쳐요. 어제 그렇게 인천에 갔으면 오늘 또 인스파이어에 갈 수는 없는 거란 말이죠. 놀기는 놀되 그래도 뭔가 다른 놀 거리를 찾아서 오늘의 캔버스를 채워넣어야 한단 말이예요. 그런데 그렇게 매일 다른 일을 찾는 게 어디 쉽나?
3.이 대한민국에 할 거나 갈 곳이 무한정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아무리 좋고 대단한 곳이라고 해도 한 번 가면 얼마간은 쿨타임이 있어야 해요. 결국 백수생활이 한두달쯤 되면 궁리해볼 수 있는 걸 다 해버렸기 때문에 더이상 새로운 걸 짜낼 수가 없게 돼요.
문제는 이렇게 되면 옛날처럼 되는 거거든요. 낮에는 그냥 밤이 되길 멍하니 기다리고 밤에는 밤문화를 즐기는 거 말이죠. 그렇게 흘러가는 건 좋지 않죠.
4.휴.
5.어쨌든 그래요. '자유로워지는'건 좋은 일이지만 '자유로운' 건 그렇게 좋은 건 아니란 거죠. 애초에 직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거나 길고 힘든 프로젝트에서 자유로워지는 딱 한순간이나 자유가 좋은 거지, 그냥 계속 힘든 일이 없으면 꽤나 힘들어요.
매일마다 눈앞에 한 장씩 빈 캔버스가 놓여지는데 그걸 내가 다 정하는 건 어렵거든요. 나를 고용한 사람, 또는 내게 돈을 주고 프로젝트를 맡긴 사람이 내 시간을 반 정도는 써줘야 남은 절반의 자유로운 시간을 내가 쓰는 게 의미가 있는 거니까요.
6.어쨌든 나이가 들면 그래요. 어렸을 때야 대체 가능한 사람일 수밖에 없으니 돈을 위해 일하죠. 하지만 나이가 들면 대체 가능한 일을 시킬 거면 나보다 어린 사람을 쓰지, 날 고용하지는 않을 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일을 한다는 건 이미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란 뜻이예요. 나이가 들면 내가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란 걸 증명하려고 일을 찾아다니게 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나이가 든 사람은 '사람은 일이 있어야 한다'라는 말을 달고 사는 게 아닐까 싶어요. 어렸을 때는 그런 말이 이해가 안 되는 게 당연하겠죠.
7.여자들이 가끔 그러잖아요. '먹는 배가 있고 디저트 먹을 배는 따로 있다'라고요. 나는 일에도 그 말이 적용된다고 생각해요. '노는 데 쓰는 체력 따로 있고 일하는 데 쓰는 체력 따로 있다'라고 말이죠.
말 그대로, 어릴 때는 노는 데 쓰는 체력이 아주 많았지만 나이들면 체력이 떨어져서 못 놀잖아요. 체력이 안 되는데 놀려고 해봤자 노는 것에 회의만 들게 마련이고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일하는 데 쓰는 체력은 어렸을 때랑 별로 다를 것도 없어요. 놀 때 쓰는 체력이 예전이 10이었다가 지금은 3이라면, 일하는 데 쓰는 체력은 예전이 10정도면 지금도 9.5는 되는 것 같아요. 일을 하면 어렸을 때랑 비슷하게 지치고 비슷한 강도로 할 수 있단 말이죠. 아마 어른들이 나이먹을수록 점점 일 타령을 하게 되는 건 이런 이유가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