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이어 이런 것도 나와 버리는군요. 대니얼 대 킴 주연의 아마존 프라임 시리즈, [버터플라이]
유튜브에 새로 올라온 아마존 신작 예고편들을 반쯤 멍하니 보고 있다가 어느 순간 눈앞을 스치는 이미지에 '엥, 한국 영화인가?'하는 생각이 들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미국인들이 익숙한 한국 도시 풍경 곳곳을 누비며 싸움박질 중이었습니다.
(영어 자막 제공)

(남산타워 옆 "방탈출 4F")
[로스트]로 유명한(이라고 말하기에는 십오 년 전에 끝난 시리즈고 밈으로 유통된 방식─한국계 미국인 배우의 한국어 발음을 놀리는─도 좋아하지 않아서 미안하네요) 대니얼 대 킴이 주연뿐만 아니라 제작자로도 참여했군요.
IMDb를 보니 김태희, 성동일, 김지훈, 이일화, 장서연, 박해수, 김나윤 등의 한국 배우 이름도 보입니다.
부녀 첩보원 이야기인가 본데, 원작은 아라쉬 아멜이라는 웨일스계 이란인 각본가/만화가의 동명 만화입니다만, 잠깐 검색하니 캐릭터 이름으로 보나 그림으로 보나 원래는 한국과는 무관한 내용이었던 것 같아요.




기획이 기획이라서 그런지 제작진 명단 중에 캐스팅 감독 줄리아 킴([스파 나잇], [미나리]), 프로덕션 디자이너 김지아([해적: 바다로 간 산적], [블랙 팬서]) 등 한국인 또는 한국계로 추정되는 이름이 여럿 보이는데, 그중에서도 제작자 겸 각본가로 참여한 스테프 차(Steph Cha)가 눈에 띄네요.
최근 윤제균 감독이 이성민, 강하늘을 주연으로 [국제시장 2]를 만들 건데 LA 폭동을 다룰 거라고 해서 매우 몹시 아주 무척 걱정스러워졌습니다만, 아무튼 스테프 차는 바로 그 LA 폭동과 두순자 사건을 모티브로 한인-흑인 갈등을 다룬 소설 [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를 쓴 소설가이기도 합니다.


이런 흐름을 두고 한국 문화의 국제적 위상 어쩌고저쩌고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고요(그나저나 '눈꼽'이 아니라 '눈곱'이 표준어라는 걸 아시는지요. 제가 자주 틀려서...), 다만 한국계 미국인들이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가시화하고자 할 정도의 토양은 마련된 모양이니 그 점은 당사자들에게 잘된 일이라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어요.
마지막 부분을 부연하고 싶어서 덧붙이자면─
조금 다른 경우입니다만, 저는 이소룡의 아들인 중국계 미국인 배우 브랜든 리가 출연한 영화 중에서 제일 유명한 작품이자 유작인 [크로우] 직전에 찍은 [래피드 파이어]라는 영화를 상당히 좋아해요. [할로윈 4: 마이클 마이어스의 귀환]이나 스티븐 시걸 주연의 [죽음의 표적] 같은 작품을 만들기도 했던 드와이트 H. 리틀이 감독한, 어찌 보면 '안 봐도 다 알 것만 같은', '오다가다 비디오나 케이블 TV로 봤음 직한' 기성품 액션 영화죠. 하지만 거기에는 브랜든 리가 그냥 공장제 기성품에 주연으로 발탁되어 연기만 하고 빠진 게 아니라 각본이나 무술 안무 단계에도 창작자로서 주도적으로 참여해 홍콩/중국적인 것을 담아내고자 했으리라는 확신이 드는 순간들이 있어요. 영화를 천안문 항쟁에서 아버지가 죽는 묘사로 시작한다든가, 1:1 격투 장면에서 교과서적인 영춘권을 보여준다든가. 같은 시기 홍콩에서 널리 유행했던, 하지만 미국에는 아직 충분히 퍼지지 않았던 오우삼 스타일의 총알 발레를 보여주고 싶다는 결기가 느껴지는 대목도 있고, 또 '어, 이건 쇼브라더스... 장철 영화의 객잔 액션 장면이 잠깐 떠오르는데?' 싶은 장면도 있지요. 그게 단순한 영화광적인 인용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소속된 국가와 업계 모두에서 명백한 소수자인 사람이 타성적으로 주어진 틀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표출하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으로 다가와서 사뭇 감동을 줍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때 감동을 느끼는 저의 정체성은 '홍콩 영화 팬'으로서의 저인가, 아니면 '미국 영화 팬'으로서의 저인가 생각해 보면, 물론 중국계 미국인의 문화적 정체성과 마찬가지로 딱 잘라 나눌 수는 없겠습니다만, 아마도 '홍콩적인 것을 의식하는 미국 영화 팬'으로서의 저겠죠. 홍콩 영화가 잘나간다 싶더니 그 영향력이 미국 영화에 이렇게까지 침투했구나! 가 아니라 중국계 미국 영화인이 미국 영화에서 홍콩적인 것을 여기까지 해 보는구나! 랄까. 그게 그거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방향이 달라요.
당연히 한국계 미국인 창작자들에게는 또 그들만의 고유한 특성과 고충이 있을 것이고, 물론 브랜든 리의 시절과는 또 다른 점들이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미국인들이 초거대 기업 아마존의 자본을 바탕으로 한국에 로케이션 촬영을 와서 영어를 주 언어로 사용하는 시리즈를 만드는 것은 [래피드 파이어]와는 지역도 방향도 다르니까, 작품이 공개된 이후에 더 자세히 따질 문제이기는 합니다만(그래서 제가 위에서 "조금 다른 경우입니다만"이라고 했잖아요), 말하자면 [버터플라이] 같은 기획도 한국인 감상자의 입장에서 '요즘 잘나간다는 우리나라 문화가 어떤 식으로 (잘/잘못) 반영되었는가'보다도, 일단은 미국 자본 실사 영상물이라는 조건 하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려 애쓰던 한국계 미국인들의 시도가 이제는 아예 바다 건너 한국에서 전면적으로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하고 제법 유명한 한국인 배우를 캐스팅하는 단계에 이르렀구나, 라는 관점으로 보게 된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일단 이게 얼마만의 oldies님 글인가 싶어서 감동의 눈물을... ㅠㅜ)
어라. 마침 엊그제 '크로우'를 다시 봤는데 브랜든 리 이야기를 듀게에서 읽게 되네요. ㅋㅋ 물론 저는 이런 디테일 같은 건 하나도 몰랐지만 '래피드 파이어'는 재밌게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근데 정말로 '재밌게 봤던' 기억만 있고 적어주신 내용들은 하나도 기억이... (쿨럭;) 크로우도 별 생각 없이 그냥 와 이게 의외로 지금 봐도 영화가 멀쩡하게 잘 만들었네. 브랜든 리는 아버지보다 훌륭해 보이는 면도 있는 유망한 배우셨네. 아깝네... 이러면서 봤지요.
현실적으로는 한국계를 비롯해 미국 내 아시아계의 영향력이 커지고, 구매력이 높아지고, 또 아시아 시장에서의 수입도 중요해지고... 이런 부분들의 영향이 우선이겠지만 어쨌든 다인종, 다문화를 존중하고 추구하는 쪽으로 꾸준히 이어져 온 미국 사회의 노력이 이런 식으로 결실을 맺는 게 아닌가 싶어서 잘 하셨어요 (인종 불문) 미국인들. 이라는 생각도 들구요. 또 그 안에서 굳세게 발 붙이고 노력해 온 한국계, 동양계 사람들도 참 훌륭하시다 싶구요. 저 대니얼 대 킴 배우님만 해도 동양계 배우들 출연료 차별에 항의하다 잘 나가던 드라마에서 자진 하차하셨다거나... 하는 일들이 기억나고 그래요.
암튼 말씀해주신 내용을 보니 '래피드 파이어'를 다시 보고 싶어졌는데 볼 수 있는 곳이 있으려나 모르겠습니다. ㅋㅋ 해외 디비디 같은 방법 밖에 없을 것 같아요. 일단은 언급해주신 '버터플라이'부터 봐야겠지요. 재밌게 잘 뽑혀 나오면 좋겠네요.
환대 감사합니다.
브랜든 리는 말씀하신 것처럼 여러모로 이소룡보다 더 나은 면, 유리한 면이 있었고, 그래서 때 이른 죽음이 더 안타까워요. 아버지가 워낙 독보적인 이미지를 지닌 아이콘이라 그렇지 브랜든 리도 배우로서 카리스마가 있었고, 출연작들의 품질도 여러 면에서 아버지 대표작들보다 나았고, 이소룡-성룡-이연걸이 미국 영화계의 입장에서 이방인이었던 것에 비하면 브랜든 리는 미국인으로서 할리우드에서 취할 수 있는 고유의 영역이 있었을 테고, 유작 [크로우]는 흥행에도 꽤 성공한 컬트 영화가 되었으니 업계에서 권력도 조금은 생겼을 텐데...
근데 예고편 보고 '엥?' 싶어서, 또 스테프 차를 비롯해 참여한 사람들의 면면이 반가워서 무심코 글을 쓰기는 했지만 사실 [버터플라이]에 대한 기대는 크지는 않아요. 수도권이나 대도시 권역에 살지 않는 지방 시민으로서 마치 외국인이 된 처럼 '한국 구경을 하려고' 일단 한두 편 볼 것 같기는 합니다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