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바튼 아카데미] 감상

바튼 아카데미 - 나무위키



[바튼 아카데미] 2023

감독 : 알렉산더 페인     

주연 : 폴 지아마티, 데이바인 조이 랜돌프, 도미닉 세사



1970년, 크리스마스 휴일을 맞아 모두가 떠나간 뉴잉글랜드의 명문 기숙학교 바튼 아카데미.

눈보라가 몰아치는 텅 빈 교정에 세 사람이 남겨집니다. 

고대 문명과 역사에 대한 지식은 해박하지만, 현실의 인간관계에서는 낙제점을 면치 못하는 까칠한 역사 교사 폴 허넘. 그는 원칙과 고집이라는 두꺼운 보호막으로 세상과 거리를 둡니다. 

똑똑하지만 반항적인 태도로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앵거스 털리는 가족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상처를 분노와 냉소로 감추고 삐딱하게 서 있습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슬픔을 묵묵히 삼키며 학교 주방을 지키는 메리 램. 그녀에게 떠들썩한 크리스마스는 아들의 부재를 더욱 아프게 상기시킬 뿐입니다.

그들의 겨울은 어떻게 서로의 봄을 피워낼까요.


영화는 예기치 않게 시작된 이들의 동거를 통해, 단단해 보였던 각자의 벽에 균열이 생기는 과정을 섬세하게 따라갑니다. 

사사건건 부딪치며 으르렁대던 폴과 앵거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말없이 중심을 잡아주는 메리. 

이들은 함께 식사를 하고, 망가진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고, 예기치 않은 보스턴 여행을 떠나며 감춰진 서로의 속내를 마주하게 됩니다. 

폴은 앵거스의 반항이 실은 애정과 관심을 갈구하는 외침임을 깨닫고, 앵거스는 폴의 괴팍함 뒤에 숨겨진 깊은 상처와 따뜻한 인간미를 발견합니다. 

메리는 두 사람의 서투른 유대를 지켜보며, 자신의 슬픔을 조심스럽게 꺼내놓고 위로를 받습니다. 


[바튼 아카데미]는 1970년대 극장으로 돌아간 듯한 레트로 스타일을 보여줍니다. 

영화의 시작부터 70년대 풍의 빛바랜 영화제작사 로고가 등장하고, 필름 고유의 거친 입자감과 미세한 화면 떨림, 자연광을 활용한 듯한 부드러운 색감, 그리고 장면 전환에 사용되는 디졸브 효과가 익숙하게 구현됩니다. 이러한 연출은 과거를 기술적으로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영화의 주제와 조화를 이루며 정서적 깊이를 더하는 장치로 기능합니다. 

폴, 앵거스, 메리는 모두 과거의 상처와 기억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폴은 고대 로마의 영광과 바튼 아카데미의 낡은 전통에 갇혀 있고, 앵거스는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메리에게 현재는 아들이 살아있던 과거를 끊임없이 되새김질하는 시간일 뿐입니다. 

낡은 필름의 질감은 이들이 짊어진 시간의 무게를, 느릿한 호흡의 편집은 이들의 정체된 삶을 시각적으로 대변하며, 1970년대라는 아날로그 감성에 담긴 '과거에 붙들린(holdover)' 인물들의 이야기는 설득력을 얻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죽은 시인의 사회]와 [여인의 향기]입니다. 권위적인 학교를 배경으로, 괴팍하지만 인간미 넘치는 스승과 상처 입은 제자가 서로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며 구원하는 서사는 두 영화의 핵심과 맞닿아 있습니다. 다만 [바튼 아카데미]는 [죽은 시인의 사회]나 [여인의 향기]의 극적인 카타르시스와 달리. 더 건조하고 현실적인 유머와 페이소스를 통해 인물들의 관계를 쌓아 올리며 잔잔하지만 깊은 울림을 만들어냅니다.

또한, 우연히 한 공간에 갇히게 된 서로 다른 부류의 인물들이 편견을 깨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설정은 [브렉퍼스트 클럽]을 연상시킵니다. 텅 빈 학교라는 고립된 공간이 역설적으로 소통의 장이 되고, 각자가 지닌 가면 뒤의 진짜 얼굴을 발견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 궤를 같이 합니다.

마지막으로, 영화 전반에 흐르는 정서는 웨스 앤더슨의 영화들과 닮아 있습니다. 어딘가 결핍되어 있지만 미워할 수 없는 독특한 캐릭터들의 앙상블, 화면의 구도와 색감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영상미, 그리고 씁쓸한 현실을 따뜻한 시선과 위트로 감싸 안는 방식은 웨스 앤더슨 영화의 팬이라면 익숙하게 느낄 만한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합니다. 


[바튼 아카데미]는 차가운 겨울, 고립된 공간에 남겨진 세 사람이 서로에게 조금씩 곁을 내어주고 온기를 나누는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겨울을 버티게 해주는 온기는 어디에서 오는지, 나의 상처에만 매몰되어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지, 혹시 곁에 있는 누군가의 상처를 애써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 영화는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는 것이야말로 가장 깊은 치유의 시작임을 일깨워줍니다.

최첨단 기술과 빠른 속도에 익숙해진 시대, 조금은 느리고 투박할지언정, 시대를 초월하는 '사람 사이의 온기'라는 고전적 가치의 소중함을 다시금 되새기게 합니다.



넷플릭스에서 7월 26일까지 볼 수 있습니다. 굉장히 빨리 내려가는 느낌입니다.

서두르세요.

    • 아 혹시 내려가는 건가!!!하면서 읽었는데 역시였네요ㅎㅎ 토요일까지니 한번 더 봐야겠어요(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시원한(추운) 겨울 배경 영화가 보고 싶던 차였습니다.
      • 감사합니다.

        저는 왠지 모르게 이 영화를 넷플릭스 작품이라 생각해서 여유를 갖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내려간다는 소식에 급하게 봤네요.

        놓쳤으면 큰일 날 뻔 했어요.
    • 저도 보고서 듀게에 글까지 적었던 영화인데 영화처럼님 글을 읽으니 왜 같은 걸 보고 적는데도 이리 표현의 수준이 다른지... ㅋㅋㅋ


      보면서 참 이렇게 뻔하고 노골적인 교훈담으로 흘러갈 수 있는 이야길 어쩜 이런 식으로 잘 풀어냈을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게 이야기꾼의 재능이란 거겠죠. 세 주연 배우들도 누구 하나 빠지지 않게 다 너무 잘 했구요. 보고 나서 내년 크리스마스 때 다시 봐야지! 했는데 한여름에 내려가 버리네요. 흑.

      • 말씀하셨던 대로 영화보는 내내 '이게 뭐라고 이렇게 뭉클하지?'라고 생각하게 되는 영화였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찝찝함 없이 깔끔하게 '좋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참 오랜만인 듯 합니다. 

    • 작년에 정말 재밌게 본 영화예요. 어떻게 보면 뻔한 소재인데 감상에 빠지지 않고 재밌게 만들어서 감탄했던 기억이 나네요.

      배우들 한 명 한 명 어찌 그리 연기를 잘하던지.. 시나리오, 연출, 촬영, 연기 등등 뭐 하나 훌륭하지 않은 부분이 없어요. ^^
      • 2023년 연말 많은 분들의 올해의 추천 영화 리스트에 빠지지 않는 작품이었죠.

        데이바인 조이 랜돌프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축하합니다.
    • 인물들도 좋았지만 개인적으로 70년대 배경의 영화를 좋아하는데다가 눈내린 캠퍼스도 멋져서 즐겁게 잘 봤던 영화입니다.  

      • [하버드대학의 공부벌레들] 같은 영화와 비슷한 질감이 나죠.

        눈내린 배경은 [노스바스의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 와. 제가 오늘 딱 이 영화, '노스바스의 추억' 생각을 한참 했었는데요. 저는 브루스 윌리스 건강 기사를 보고 떠올렸던 거지만요. ㅋㅋ 다시 한 번 보고 싶네요. 여기에서 윌리스 아저씨 연기도 참 좋았던 걸로 기억해요.

          • 폴 뉴먼도, 제시카 텐디도, 필립 시모어 호프먼도 세상에 없네요...

            브루스 윌리스, 멜라니 그리피스 부디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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