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아예 안 보는 사람과의 대화
지인의 집들이에 초대되어 다른 분과 대화를 나눌 일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속된 표현으로 "리얼충"에 속하는 사람이었는데 일년에 극장을 한 번 가도 많이 가는 거라고 하시더군요. 가장 최근에 본 영화는 아이들을 데리고 간 [사랑의 하츄핑]이었고 그 영화를 보는 내내 잤답니다. 그 분은 저에게 영화를 많이 보신다고 들었다며 물었고, 저는 그렇긴 하다고 했지만 이어갈 말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영화를 아예 안보는 사람을 두고 영화 이야기를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저도 모르게 좀 냉소적인 대답이 흘러나왔습니다.
영화 많이 보긴 하는데, 영화를 많이 보는 게 별 거인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는 것도 자기 삶을 기반으로 보는 거고 자기가 겪어보고 살아온 만큼 영화가 보인다, 영화만 백편 이백편 봐도 아무 쓸모도 없다, 요즘에는 영화 보는 것보다 자기 삶을 사는 게 더 의미있고 즐겁게 느껴진다...
왜 그런 대답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분이 제가 영화를 보는 거에 정말 관심이 있어서 질문했던 것도 아니었고 그냥 의례적인 담소를 위해 말을 한 거니까요. 제가 영화를 보고 뭘 느낀들 아마 그 사람에게는 큰 감흥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 분은 그렇군요, 라고 한 다음에 다음 대화를 이어나갔습니다. 그건 아마 그 분이 자기가 꿈꾸는 대로 충만한 삶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저의 순간적인 질투일 수도 있고, 낯선 사람에게서 저를 일종의 영화광으로 소개받는 것에 대한 부담일수도 있습니다. 그게 아니면 영화에 무관심한 사람과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해 해당 주제를 '현생'으로 얼른 돌리려고 하다보니 답변의 온도가 좀 차가워진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그 때 어떤 질문에 부딪혔던 것 같습니다. 영화 없이 행복하게 사는 사람 앞에서, 영화를 보고 얻는 행복은 설파될 수 있는 것인가? 영화를 본다는 건 결국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닌가? 이것저것 다 해봐야 조금 더 부지런하게 야외로 나가서 두시간짜리 영상을 보며 시간을 때우는 행위 아닌가? 영화에서 행복을 찾는다는 건 영화 없이는 자기 삶에서 행복을 찾지 못한다는 반증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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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에 아마 어떤 분들은 그냥 영화 보고 적당히 시간 때울 수 있고 재미있다 없다의 후기를 적으면 그만 아닌가, 라고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그 제안이 별로 흡족하게 다가오지 않는데, 역으로 그냥 대충 영화보고 대충 끄적일거면 영화를 왜 보냐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럼 그냥 유튜브 보거나 집에서 ott만 보면 그만입니다. 저한테 영화는 뭔가 특수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아마 그 때의 그 대화가 저한테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영화를 보지 않는 사람을 두고 영화를 보는 이유를 제 스스로 찾지 못했던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을 굳이 영화보라고 설득할 이유는 없지만, 제 스스로 만족할만한 항변을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요. 그러지 못했던 건 역시 자기 인생을 있는 자체로 충실하게 즐기는 그 자체가 영화를 재미있게 보는 걸로 대적할 수 없는 것처럼 느꼈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여러 가치관을 배우고 또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배운 입장에서, 이게 단순히 중산층의 문화적 향유로 끝나진 않길 바라고 있습니다. 혹은 중산층의 교양인증을 위해 영화를 수단으로 소모하는 그런 행위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영화를 목적으로 소모해온 삶의 부분을 변호할 수 있을만큼의 의미는 찾아내길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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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 평론가는 지브이 현장에서 영화만 보는 사람들을 꾸준히 경멸해왔습니다. 영화 백편 보고 이백편 보는 게 뭔 소용이냐는 말을 하는데, 종종 그에 동의하게 됩니다. 영화를 봤다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영화에서 뭘 봤고 어떻게 봤냐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믿는 쪽입니다. (그런고로 봤다는 경험의 인증을 목표로 하는 후기 글들은 이제 그렇게 관심이 안갑니다)
영화를 보는 것에서 더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게 저에게 관성이 아닌 주체적 행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영화를 덜 봐야할 것 같기도 합니다.
영화 내용을 이해하는 자체가 어려워서 분석, 해석을 요구하거나 메시지, 서브텍스트 등을 다층적으로 끄집어낼 수 있고 그런 것들이 영화를 감상하는 즐거움을 형성하는 작품들이 있는가하면 그냥 킬링타임, 오락용으로 나오는 작품들도 많고 그렇게 보는 와중에만 즐겁고 시간 잘가면 그만인 영화들 위주로 많이 챙겨보는 관객들도 있죠. 당연히 뭐가 더 낫다는 건 아니고 결국 자기자신이 즐거우면 된다고 최대한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하;;
아예 영화를 거의 안보는 사람과 얘기를 하게되면 관심사가 전혀 안맞으니 이래저래 난감하긴 하겠네요. 당황해서 아무말 대잔치를 했다가 너무 깊은 고찰을 하시게 된 것이 아닐런지 ㅋㅋ
사실 관심사 문제는 종합격투기 이야기하면서 금방 해결했는데, 그러고 난 다음에 문득 저한테 영화 좋아하신다고 물어보니까 제가 좀 복잡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요새 읽고 있는 책도 이런 주제에 좀 관련되어있고...
영화를 좋아하는 저 자신과의 불화를 이렇게 제대로 겪은 게 처음이라 저도 이 마음이 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아무말 대잔치를 한 거라면 좋을텐데요 ㅎㅎ
어쩔땐 '내가 가진 취미를 갖지 않는 사람들 혹은 거기에 관심없는 사람들 다 망해라!' 라의 심리를 내가 갖고 있는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생각이 들면 두렵습니다.
어쨌든 로이님의 잘 정리된 영화 후기를 읽으면서 부러움+질투를 느낄때가 많습니다. 그냥 내가 겪지 못한 세계를 겪어주시고 대신해서 쉽게 구경시켜주니 재미있고 와 감사하다~ 라는 생각까지만 들면 좋을텐데요.
아하 그러시군요 저는 영화에 대한 물음이 타인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저 자신을 위한 것이라 제가 답을 찾지 못하면 저한테 좀 실망스럽기도 하고 부정적 감정이 딸려온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분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걸 아주 좋아했고, 이야기를 하자마자 갑자기 종합격투기 이야기로 거의 30분은 열정적으로 떠든 것 같아요 ㅎㅎ 그러다가 영화 이야기로 넘어가니까 제가 이상하게 그런 반응을 하게 되더라고요 왜 그런 현타를 느꼈는지 저도 의문입니다. 차라리 스타크래프트 이야기를 했다면 그 분이 멋적어하든 말든 제가 혼자 막 떠들었을 것 같거든요.
얼마 전에 본 영화 '프로스펙트'에서 주인공 시이는 가장 좋아하는 소설 작품을 늘 갖고 다니며 반복해 읽었는데 그 책을 잃어버립니다. 우주의 변두리를 다니니 책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기억을 살려 책을 다시 쓰고 있어요. 문장까지는 아니라도 여러 번 읽어서 장면들은 다 기억하니까요. 쓰면서 주인공들과 함께 있는 상상을 하고 소설에 쓰여진 부분과 아닌 부분을 생각하고 새 장면을 추가하기도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 세계에서 시간을 더 보낼수록 더 현실같이 느껴진다고 말합니다. 시이 아빠는 배울 거 많은 현실에 집중 못한다고 책을 잃어버린 것은 차라리 잘 된 거라고 했다는데(지금 쓰다보니 시이 아빠가 의도적으로 우주 어디 내다버린 게 아닌가 의심되네요) 더욱 창의적으로 몰두하는 시이입니다.
이번 글을 읽고 나서 이 영화의 위 대사들이 생각났습니다. 시이의 현실이 행복하지 않은 조건인 것은 맞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 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거 같습니다. 또한 어떤 조건이 행복을 줄 것인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도 당연하고요. 그래서 이런 조건은 뒤로 하고 위의 영화 장면 시이의 말을 생각해 보면 영화나 소설이 현실의 도피라기 보다 현실의 확장이라고 해야 할 거 같습니다.
영화와 소설에서 어떤 장면 그리고 인물의 생각이나 경험은 내 소유로 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오늘 읽은 책에도 그 비슷한 표현이 나옵니다. 어떤 문인(고리키)의 동상 앞에서 인물이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한때 지극히 신선한 글을 씀으로써 젊은 날에 대한 그의 기억이 곧 젊은 날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 되게 한 사람이 여기 있노라'
제가 현실적인 기능이나 기술이 거의 전무한 사람이고, 대화하셨다는 분이 가진 종류의 현실성이 부족한 이라서 이처럼 어떤 작품을 보면 지금 이 순간 나의 현실이 확장됨을 느끼게 되는, 눈에 띄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Sonny 님 글을 보며 초점 맞는 댓글인지 확신은 없지만 써 봅니다.
다정한 위로 감사합니다. 제가 현실을 훨씬 더 만족하면서 살았어도 영화를 좋아했을 팔자일 수도 있겠네요.
현실의 확장... 맞는 말입니다. 아마 저는 영화를 안봤다면 정말 많은 부분에서 무지렁이로 살았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나 세상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으니...
"오락하는 데 이유가 어딨어 그냥 하는 거지!"라는 내용의 원사운드 웹툰이 있었죠. 취미가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냐~부터 이것저것 따질 건 많겠습니다만, 애시당초 딱히 관심 없는 사람에게 굳이 강요할 이유도 없는 거니까요.
물론 그냥 즐기는 것이 취미이고 영화도 그냥 보고 즐기면 되는 것이겠습니다만 ㅎㅎ 이상하게 제가 그 즐김에 대해 만족하고 있는지를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도 영화는 꾸준히 보겠지만요,
그 분과는 다른 이야기를 열심히 했습니다. 뭐랄까, 관심사가 겹치지 않았는데 자기 이야기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면 들어주고 맞장구만 잘 쳐주면 되더군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