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어를 처음 배웠을 때

고등학생이 되면서 처음 제2 외국어란 과목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2 외국어라고 하면 암묵적으로 남고는 독일어 여고는 불어였습니다.
그렇게 오랜동안 배움이 쌓였으면 지금쯤 대한민국에 독어와 불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넘쳐야 할텐데 왜 그렇지 않으냐고 한다면... 1,2년 지나고 나면 다들 제2 외국어를 포기하고 다른 과목으로 바꿨으니까요ㅎㅎ

어쨌든... 첫 독일어 수업시간에 게슈타포라는 별명을 갖고있던 독일어 선생님(어지간한 학교 독어교사는 별명이 다 게슈타포였을 겁니다ㅎㅎ)이 카세트를 들고 교실에 들어왔습니다.
독일어 기초 알파벳 발음을 카세트테이프로 들려주기 위해서였죠.

게슈타포 선생님이 카세트 버튼을 누르자 반아이들이 모두 놀라 가벼운 비명을 냈습니다.

"에이 비 씨 디 이 에프 지"....

카세트에서는 그런 소리가 나왔거든요.
아이들이 선생님에게 질문을 쏟아냈습니다. 혹시 테이프 잘못 가져온 거 아니냐고 이거 독일어 맞냐고.

독일어를 처음 배우는 애들이지만 독일어 알파벳이 '아베체데'로 시작한다는 것 정도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상식선에서 알고있었어요. 하지만 카세트에선 전혀 다른 소리가 나왔으니... 거기다 하필이면 또 너무나도 친숙한 발음이었으니까요.

선생님의 대답을 듣고는 아이들은 더욱 혼란에 빠졌습니다.

"독일어 맞잖아. 아베체데"

아이들이 "에이비씨디라고 하는데요?"
라고 되묻자 선생님은

"너희는 이게 에이비씨디로 들리냐? 난 아베체데로 들린다"

아이들은 납득을 못했지만 어쩔수 없죠. 당시는 학생이 선생님 말에 반대했다간 디지게 쳐맞을 각오를 해야하는 시절이었고, 그 선생님은 단지 독일어 교사라는 이유만으로 게슈타포라는 별명을 갖게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의문점과 불합리함을 속으로 삭이고는 계속 수업을 했죠.


그날 저녁에 중학교 때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형식적인 안부를 마치고는 그넘이 곧장
"혹시 너 독일어 시간에 카세트 들어봤나?"라고 하는 겁니다.
그넘도 '에이비씨디이에프지'로 들렸다면서 저한테 확인해보는 거였습니다.
아마 걔도 저랑 비슷한 경험을 한 것 같습니다. 만약에 걔내 학교 선생님이 납득할만한 대답을 해줬다면 굳이 저한테 전화해서 그걸 물어보진 않았겠죠.
어쨌든 저만, 혹은 우리반 애들만 그렇게 듣진 않았더란 겁니다.

독일어 알파벳은 너무 기초적인 거라 수업 첫날에만 하고 그뒤로 다시는 안했기 때문에 그 카세트를 다시 들을 일도 없었고 선생님도 애들도 더이상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분명히 애들은 '에이비씨디'라고 들었는데, 왜 독일어 선생님은 '아베체데'라고 한 건지.
도대체 왜 교사라는 사람이 아이들한테 거짓말을 한걸까?
꽤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습니다.

지금은 어쩌면 진짜로 당시 그 선생님 귀에는 아베체데로 들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저와 아이들이 당시 들었던게 실제로는 '에이비씨디이에프지'가 아니었을지도...
사람이 소리를 있는 그대로 듣는게 아니라 선입견에 따라 왜곡되게 들린다는 걸 알게되어서요.
    • 재밌고 흥미로운 에피소드네요. 정말로 그때 울려 퍼졌던 소리가 무엇인지 매우 몹시 궁금해지만 확인할 길은 없겠고...




      근데 저희 학교는 프랑스어였어요. ㅋㅋ 이거랑 중국어 중 하날 고르는 거였는데 전 '그래도 알파벳은 나오니까' 라며 프랑스어를 골랐고 곧 생지옥에 빠졌지만 그래도 중국어 배우는 친구들을 보며 위안 삼았었죠. 한문이라니... 성조라니...

    • 어찌어찌 해서 고등학교 3년을 배우고 대학에 가서도 학점 때문에 2학기나 들었는데도 불어는 하나도 못합니다. 파리 갔을 때 몇 마디라도 써 보려고 했는데 제 발음을 들은 프랑스 사람들이 무시하더군요. 하지만 배운 가락이 있어서 번역기 돌려서 대충 의미는 이해할 수 있었는데, 뭐뭐한 이유 때문에 독어권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너무 힘들었습니다. 어느게 명사고 어디까지가 문장인지도 모르겠고, 단어를 전혀 모르니까 번역기 돌리는데도 한계가 있더라고요. 불어는 영어랑 비슷한 단어도 많은데 독어는 정말 뭐가 뭔지 몰라서 고생했어요 ㅠㅠ

    • der des dem den/die der den die/ das des dem das/die der den die ..... 고딩때 독일어 선생님이 실력은 남한 최고라고 하시던 분인데.. 정관사 변화를 외우는 날이었습니다.


      그날은 수업 시작하자마자 학생 전원을 일으켜 세우고,   앞의 der des dem des를 소리 내어 외우게 하고.. 다 맞으면 자리에 앉게 하고, 하나라도 틀리면 다음 학생이 하게 하여 시간 내내, 저걸 외우게 하였습니다.  저는 어학에 관심도 좀 있었고 모범생 계열이라서.. ㅋ 바로 통과 했지만 나머지 급우 들은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계속 하였고,....., 통과! 하지 못한  서너명이  끝까지 서서 계속 하는데,  선생님이 


       " 자! 오늘의 돌빡 챔피언은 과연 누가 될 것인가?!" 하면서 애들 놀리고...계속 돌아가다가.... 아이들이 쪽팔려서 얼굴이 일그러져 가는데,  이윽고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리자. 선생님이  "일몰 게임!"을 선언 하시면서 수업을 끝냈습니다.   아이들은 선생님한테 뒤통수에  "아이 ㅆㅂㄹ 새끼"..이러면서 씩씩대고..ㅋㅋ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 학교에서  많이 있었죠. ..

    • 아 재밌는 일이네요. 독일어 선생님들과 학생들 양쪽이 다 제대로 들은 거 같아서 더 재밌습니다.


      저는 독어를 배우고 싶었는데 학교 운영상 어른들의 사정 때문에 홀수반 독어, 짝수반 불어라는 식의 횡포에 불어 배우는 반이 되었어요. 정 다른 걸 선택하고 싶으면 자기 의자 들고 옆 반에 가야 되었고 몇 시간 혼자 이동하다가 때려치우고 씁쓸하게 불어를 듣게 되었죠. 뭐 그때 뭘 배웠든 지금 보면 결과는 똑같이 일생에 흔적을 남기지 않은 걸로 드러났으리라 97프로 쯤 확신하지만요.ㅎ

    • 독어 선생님과 불어 선생님이 있던 시절의 학교를 다녔던 자로써.. 둘 다 살짝 미쳤지만 재미있었던 분들로 기억합니다. 전 독어를 선택했는데 말이죠. 늘 만점에 가깝게 잘 하던 그 과목을 정작 학력고사에서는 말아 먹었다는 아픈 기억이.  

    • 저도 독일어 배운 세대인데, 남자애들은 일어 배워서 그게 싫었어요. 일어 배웠으면 최소한 히라가나는 남았을텐데!!!!
    • 재미있는 에피소드네요. 처음엔 말씀하신 게슈타포 선생님이 이상한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학교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다는 게 신기합니다. 마지막에 추정하신 게 맞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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