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에 만화방을 강타했던 성인만화

80년대 말쯤, 만화방에 소위 성인만화라고 하는게 대거 유통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름은 성인만화였는데 실상은 일본만화였습니다. 뭐 건국 이래 그때까지 대한민국에 일본만화가 지하유통되지 않았던 적은 한번도 없긴 합니다만, 이 시기에 유통되었던 만화들의 특색은 일단은 이름 그대로 성인대상이었다는 것과, 일본만화를 그대로 찍어서 냈다는 것 등을 들 수 있을것 같습니다.

그전까지는 만화라는 매체의 인식상 철저하게 아동물 위주로 유통되었던 것이나, 일본만화를 내더라도 원판을 그대로 낸게 아니라 한국 만화가가 베껴서 그리는 형태로 내는 일이 많았던 것과 나름 차별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읽는 방향이 다르다는 문제로 그림이 반전이 되어있고 눈가리고 아웅식으로라도 심의를 의식해 여기저기 덧칠이 되어있었다는 정도말고는(진짜로 심의를 받은 건지는 의심스럽지만...) 원본 그대로였습니다.
번역은 원어에 충실하게 하기 보다는 적당히 상황에 맞춘 번안쪽이었던 것 같습니다.

내용상의 특징은 역시 성인용이란 이름에 맞게 폭력과 섹스죠. 그전까지는 한국내에서 유통되는 만화에서는 볼수 없었던 것들입니다. 당시 일본 만화계가 지금에 비해서도 훨씬 더 거칠었고 '스플래터'가 유행하던 시절이라 사람의 몸을 다양한 방법으로 해체재조립하는 묘사가 쏟아져나오던 시절이긴 하죠. 거기다 섹스쪽은 그 이전부터도 한국 기준으로는 포르노급이었으니까... 그런 걸 생전 처음 보게되니 컬쳐쇼크를 받고 빠져들지 않을수 없었겠죠.

셀수도 없이 많은 만화들이 유통되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양대히트작이 '대룡'과 '도시의 욕망'이었습니다. 둘 다 구호라는 사람이 그린 거였는데, 눈이 있는 사람이면 둘이 같은 사람이 그린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구호는 그밖에도 수많은 작품을 내놓았는데 스타일이 다 달랐죠.

'대룡'은 '크라잉 프리맨'이고 '도시의 욕망'은 '시터헌터'. 당시 일본에서도 대히트했던 만화들입니다. 두 만화 다 국내 독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선사합니다. 일단 그전까지 볼 수 없었던 수려한 작화로 사람들의 눈길을 확 잡아끌었고, '크라잉 프리맨'만큼 대놓고 포르노같고 무자비한 폭력을 날것처럼 그려낸 만화는 건국이래 처음 보는 거였고, '시티헌터'만큼 쉴새없는 섹드립이 쏟아지는 코미디 역시 이전에 본적이 없는 거였습니다. 독자뿐 아니라 만화창작자들에게도 절대적인 영향을 끼쳐서 이후 한국만화의 방향성까지도 바꾸었다고 할 수 있을겁니다. (근데 사실은 시티헌터는 당시 일본에선 성인물이 아니었죠.)

뭐 어쨌든, 저 둘 말고도 정말 셀수도 없이 나왔어요. 시티헌터 말고도 일본에선 성인물이 아니었던 것도 꽤 되었죠. 전 제 취향에 맞는 몇개 말고는 대부분 기억하지 못하지만... 

제가 좋아라했던 건 '역왕', '공작왕', '도시의 천사(대타자 토고)'뭐 이런 것들인데... 당시에 아주 대단한 히트작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성인만화들 틈새에 '북두의 권'이란 만화도 끼어 있었는데( 주인공 이름을 자룡으로 번역했었던...), 그당시엔 진짜 인기 없었습니다. 몇권 나오다 말았어요.
'자연의 랑(아들을 동반한 무사)'도 그닥 인기 없어 몇권 나오다 말았던 것 같네요.

한 2,3년 성인만화가 맹렬한 인기를 끌어 사람들이 그것만 찾아 보게 되어 당시 국내 만화가들 밥줄까지 위협했다고 하는 것 같은데, 그러고 있는 동안 걍 쉬쉬하고 넘기고 있던 경찰이 어느날 갑자기 일제단속에 들어간 뒤로는 바로 사라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직후에 일본만화가 공식 상륙하게 되죠.
공식 상륙 후에도 과거 성인만화라고 출간되었던 일부가 제목을 바꿔가며 야금야금 나왔던 것 같은데 전 그쪽에 관심 없어서 잘은 모르겠네요. 요즘 80,90년대에 국내에 유행한 일본만화에 대한 추억담들을 보면 대부분이 제가 알고있는 제목과 다르더군요. 다들 500원짜리 만화책 이야기를 하던데 전 그건 한번도 본적이 없어서...

공식적으로는 드래곤볼이 국내 상륙 일본만화 1호인 걸로 되어있지만, 한국 만화독자들의 입맛을 완전히 일본만화 일변도로 바꿔버린 건 그보다 몇년 앞서 쏟아져나왔던 성인만화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백푸로 해적판이었기 때문에 만화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당당히 언급하긴 좀 껄끄러울 것 같기도...





...개인적으로 '시티헌터'의 공식 캐릭터 번안명인 우수한 사우리보다 '도시의 욕망'에 나왔던 방의표 엄화란이 좀 더 나았다고 생각합니다ㅎㅎ

    • 밑에 컴퓨터 이야기와 함께 글 참 잘 읽었습니다! 만화방에서 볼 수 있는 책들 중에도 아동용이라고 보기에 애매한 극화들이 많았지요. 그런데 반공/권선징악/정의사회 구현이 국시이던 시절이라 그런가, 배경이 뭐 전쟁이나, 2차 대전, 서부극, 역사극 이러면 좀 거친 묘사도 허용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도색만화는 어떻게 유통이 되었는지 모르겠는데...비디오랑 마찬가지로 만화방 주인장하고 친하면 저 깊숙한 곳에서 슬며시 꺼내 주었던가...




      여하튼 시티헌터 방의표는 정말 잊을 수가 없네요. 그 전에 한국에서 비슷한 걸 굳이 찾자면 이우정 선생의 스피드 텐이나 뭐 그런거 였을텐데, 이건 뭐 그 세련된 그림체에 스토리라니...워크맨이나 마크로스 극장판, 여러 음악, 코카콜라 광고 등과 함께 꽤 오랫동안 일본은 무조건 선진국이야, 일본은 무조건 세련되었어, 무조건 멋있어, 한국은 절대 따라갈 수 없어...뭐 이런 생각이 들게 만든 주요 원인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입니다.




      얼마 뒤 학교 앞 문방구에 쏟아져 나온 500원짜리를 보니 이름이 우수한으로 바뀌고 대사도 많이 순해졌더군요. 선정적 묘사도 빠지고요  

      • 그시절엔 성적인건 몰라도 폭력적 컨텐트가 아동에 미치는 영향같은 거에 관심이 없었으니까요. 특히 '반공' 딱지를 붙이면 특히 더 허용기준이 낮아졌었네요. 영화도 그랬고. 지금도 어렸을때 본 것중에 제일 섬뜩하다고 기억하는게 아동용 반공소설이었습니다. 사람이 피 흘리다 죽을때까지 묘사를 참 자세히 했었어요.




        시티헌터는 나중에 비교해봤더니 방의표 버전이 대사같은 게 원본보다 좀 더 웃기더군요. 성실한 번역은 아니지만 좀 더 한국사람한테 잘 먹히도록 현지화한 거 같았습니다.

    • 형님이 만화방에서 본 위의 작품들을 밤에 몰래 전래동화 들려주듯 얘기해주던게 기억납니다. 워낙 재미있게 들었던지라 나중에 작품 찾아보고 좀 실망하기도 하고 재밌는 부분만 뒤죽박죽 파편적으로 들려줘서 끝내 원본을 못찾은 이야기도 있구요. 기억을 더듬으면 해골장식의 삼절곤?을 무기로 한 주인공의 사이드킥 캐릭터에게, 주인공에게 내상을 입은 악당이 내상을 치료하려고 그 부분에 의도적으로 공격을 허용해서 오히려 몸을 회복한다는 내용의 작품 아시나요?

      • 어렸을 때 친구나 형들이 자기가 본 영화나 만화같은 걸 자랑스레 이야기하는 걸 보고 부러워했었는데 나중에 실제로 보면 들었던 것과
        다른게 꽤 있더군요. 기억의 문제도 있지만 처음부터 보지도 않고 날조해서 이야기하는 넘들도 있었어요ㅎㅎ.


        말씀하신 작품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 중요한 건 아니지만 시티 헌터 500원짜리 해적판도 종류가 있었는데요. '파울볼'인가 하는 제목으로 나온 해적판에서 주인공 이름이 방의표, 엄화란이었습니다. 어쩌면 '도시의 연가'라는 제목으로 나온 버전이 그랬을 수도 있지만 아마 '파울볼'이 맞을 거에요... ㅋㅋ 말씀대로 그때 한국 청소년들은 당연히 시티 헌터가 성인용 만화일 거라 생각했었죠. 뭐 지금 생각해 보면 공중파 예능에서 여성 상체 노출이 흔하게 나오던 나라에서 이 정도면 청소년 버전이 맞긴 하지만요(...)

      • 청소년 버전도 아니고 초딩들(도) 보는 만화였죠 드래곤볼이랑 같이 연재되었으니까...



    • '도시의 욕망'은 흔한 좌우 반전이 아니라 아예 그림 컷을 재배분해서 만든 독자적 편집판이라 나름 공들어간 버전이었죠. 1500원짜리 그림터 해적판 시티헌터보다 그 점에선 차별화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500원짜리 포켓 사이즈 시티헌터 해적판 중에서 '파울볼' 초반이 '도시의 욕망' 버전에서 조금 더 삭제가 들어간 버전이었습니다. 그리고 '파울볼'도 원작 10권인가 분량 이후론 '도시의 욕망' 재활용 버전이 아니라 독자적 편집과 번역으로 넘어가는데, 방의표 엄화란 같은 이름은 계속 유지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좀더 90년대 대해적 시대의 흔한 번역이 되어버려서 아쉬웠다 생각합니다. 주인공 료와 비슷하게 정글에서 실종된 손자가 있었던 노인네가 나오는 부분에선 "너는 방의표가 아니라 이방자~여" 하는 식이었거든요. 시리어스 에피소드의 게스트 캐릭터 소니아 필드와 게니 필드 부녀를 소피 마렵소와 쪼까 마렵소 같은 식으로 바꿔놨고요. 이 정도면 꽤 어긋난 번역이었죠.


      그리고, 이후에도 시티헌터 해적판은 전통적인 원서 짜깁기 버전 이외에도, 90년대에 배껴 그린 버전이 두 가지 정도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천하만화라고 중국만화 해적질 하는 잡지에서 잠깐 나오다 사라졌습니다. 이현세 아류 작가 중에 까치 포지션 캐릭터가 청솔이란 이름을 들고 나오는 사람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 배껴그림 해적판에서 청솔이란 이름을 사용한 로컬라이징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현세 아류작가 그 사람이 배껴 그린거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었고요.


      크라잉 프리맨이 분명 해적판 만화책이나 불법 비디오 쪽에서 압도적이긴 했는데 루안살성이나 홍콩 영화들 보던 애들 사이에서는 어느쪽이 먼저인지 헷갈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기억하고요. 


      리키오 해적판은 생각보다 흔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나름 지명도가 있어서 OVA 리키오 발매 후에도 꽤 주목을 받았던 기억입니다. 도쿄 맘모스는 황재가 배꼈다는 말이 있고요.


      개인적으로 가장 뜻밖이었던 건 일본 성인 만화 중에서 성인용 에로비디오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화로 만든 "모험해도 좋을 때" 같은 게 대해적시대 이전에 꽤 일찍 해적판이 나왔던 것이네요. 이거 해적판은 단 한번 밖에 본적이 없고 아는 사람도 적어서 이야기해도 뭔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습니다만… 이런 대해적 시대 이전의 클래식 해적판(?)들의 역사를 연구하는 게 이젠 지나치게 힘들어져서 그냥 잊혀져야 하는 이야기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기억을 공유할 사람이 줄어드는 자체가 서글퍼지는 것도 현실인지라 말이죠. :DAIN_



      • 리키오는 지금은 영화가 만화를 먹어버린 것 같네요.


        모험해도 좋을때(러브 호텔)도 당시에 인기있었던 만화였네요. 전 1권만 보고 취향이 아닌 것 같아 접었었는데 나중에 아니메로 나오는 걸 보고 일본에서도 잘나가는 만화였나보다 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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