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과 나]

보관함에 넣어 뒀던 책이었는데 오가다가 추천하는 이를 또 만나서 이번에 사 읽었습니다.

한국 SF 소설은 오래 전에 복거일 작가의 [비명을 찾아서]를 읽었고 그 다음은 듀나 작가 책, 그 다음이 이번에 배명훈 작가의 [화성과 나]. 이 정도입니다. 이외에는 잡지에서 단편들 몇 편을 읽은 것 같고 지금 떠오르는 작품이 없네요. 하여튼 이 분야에 과문하다는 얘길 되풀이해 봅니다. [비명을 찾아서]는 대체역사소설인데 이것도 sf에 넣어도 되겠죠?

 

[화성과 나]는 화성에 인류가 정착촌을 만드는 초창기 또는 어느 정도 여러 촌락이 만들어진 안정기 즈음을 배경으로 하는 연작 소설들입니다. 

지금부터 얼마 정도의 시간이 흘러야 이 소설들의 시간대인 우주시대가 오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런데 이 작품집의 두드러진 특징은 이 소설들에서 다루는 상황이 아주 가까운 미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느끼게 되는가 생각해 봤어요. 이 소설들은 우주 전쟁이라든가, 외계 생명체의 등장이라든가, 화성 개척 과정의 목숨 건 모험이라든가가 주 내용이 아닙니다. 물론 거주지 바깥은 죽음의 땅이니 인물들은 죽지 않고 다음 날 깨어나는 일을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기적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위에 열거했던 다른 sf에서 많이 다루었던 '모험'과 '액션' 위주로 그 위험을 다루는 이야기가 아니고 일상에서 발생하는 위험 요소에 대비하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또 지구에서 실패한 사회 조직을 되풀이하지 않고 새로운 형태로 시도해 보려는 행정전문가들이 등장해서 자기 분야에서 고민하는 이야기들이 위주가 됩니다. 외계 생물같은 위험 요소는 등장시키지 않고 화성의 물질적인 환경만을 배경으로 해서 구성원과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소설인 것이죠. 실제로 화성에 사람들이 이주해서 산다면? - 거기에 따라오는 다양한 문제거리들을 생각해서 연작을 쓴 것입니다. 문제거리들은 범죄, 식욕, 구성원들 사이의 계급차, 인간이 많아지면 필요해지는 규칙과 조직, 그 모든 것들의 우선순위 등등으로, 다루는 내용이 매우 현실적입니다. 그래서 아주 먼 미래일 것임에도 아주 가까운 장래를 다루는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얼핏 딱딱한 이야기 같은 느낌이 있는데 그렇지 않고요, 매 단편이 재미나게 읽힙니다. 일단은 한 작품 정도를 제외하고 등장인물들이 대단히 우수한 인재들이라 그들의 우수함 자체가 구경(읽을)거리가 됩니다. 화성에 우선적으로 가는 사람들이 갖춘 전문성과 열정과 의지는 바로 짐작할 수 있는데 거기다가 창의적이고 선량하기까지. 찌질한 인물은커녕 평범한 인물도 거의 없어요.(찌질 1명, 평범 1명 정도 있네요) 그래서 이것을 문제제기하는 단편도 하나 있습니다. '행성탈출속도'라는 소설에서 수학에 약한 화성 태생 주인공은 본인이 매우 우수하지 않다는 이유로 학창 시절에 왕따를 당하고 성인이 되자 결국 지구행을 선택합니다. 화성은 평범한 인물이 설 자리가 너무 부족한 행성인 것입니다. 

그리고 웃긴 장면들이 뜻밖에 많았어요. 생각나는 것 하나만 소개하면 '나의 사랑 레드벨트'에는 단어사전 접속오류가 생긴 인공지능컴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문장은 구성하는데 단어들이 지시어로 채워져요. 예를 들면 '거봐, 그거네, 기분이 영 저기한가 보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죠. 단어 업데이트가 안 되는데 복잡한 사고가 가능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웃기긴 웃겼네요. 


배명훈 작가는 외교부 의뢰로 2년 동안 화성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을 했고 그 연구를 마치며 이 연작을 썼다고 합니다. 저는 우리 나라 외교부에서 이런 일도 하긴 했구나 첨 알아서 놀랐습니다. 일회성으로 그친 것 같지만요. 학교 때 전공(외교학)과 현재 직업을 조화시켜서 화성이 국가가 아닌 새로운 행정시스템을 운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에 대해,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것과 아직 예측해서는 안 되는 것을 섞어서' 썼고 그 작업의 소설적 결과물이 이 작품이라고 합니다.  

이 작품을 읽고 중심 인물도 소설도 너무 선량하다는 생각은 했는데 이 생각을 쓰자니 그런 것도 문제가 되냐, 하고 어디선가 뭐라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네요. 선량한 것이 문제가 되진 않습니다만 입체감이나 깊이를 생각하게는 됩니다. 그러는 한편 이 작품이 본격 인간성 탐구하고 그러는 소설들은 아니니까 그런 쪽의 기대는 과하다고 스스로 주의를 줍니다. 재미있게 읽었고 지식도 몇 가지 챙겼으므로 저에게는 좋은 경험이 된 독서였습니다. 소설을 읽는 중에 은근히 지구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여전히)나무가 자라고 숲이 있고 강과 바다가 있는 지구. 아낀다, 지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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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흐흐, SF 입문 중이신 이야기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저는 책 내용보다도, 외교부에서 작가에게 화성에 관한 보고서를 쓰라고 했다는 게 더 놀랍군요. 심지어 2년 동안. 그걸 들으니 책이 아예 벌로 쓰여지진 않았을 거란 믿음이 생기네요. 요상한(?) 내용들이 나오지 않아 좋았다면,  액션감이 가미된 앤디 위어의 [아르테미스] 추천 드리고 싶네요. 요건 달살이고, 개인적으로 이 친구 3부작에서 가장 좋았어서 가끔 추천하고 다니는 책입니다.

      • 이 책 디테일하면서 재미있었어요. 그리고 저도 작가가 밝힌 외교부 일 이야기에 놀랐어요. 2020년 즈음부터 했다고 합니다. 


        저번에도 [아르테미스] 말씀해 주셔서 앤디 위어 3부작 중 안 읽은 한 권을 마저 읽겠다고 했었는데 또 까먹고....이번에는 잊기 전에 바로 사 읽으려고 합니다!

        • 앗 ㅋㅋ 그 추천 대상이.. 뭔가 부끄럽구만요. 엣 근데 나머지 2권은 읽으셨다면 글 초창의 SF 읽은 책 목록에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 앗 '한국' SF라고 썼습니다만? ㅎ 다른 나라 SF는 조금 읽었죠. 

            • 앗 부끄럼 두 배, 맞네요 이런.
    • 선량하기만 한 게 문제는 아니지만 깊이를 생각하게 된다는 말씀에 끄덕끄덕 했어요. 그러면서 한편으론 제가 가끔 보는 만화가 그러한데 그 작품 볼 때는 왜 무장해제 하고 볼까 생각하기도 했고요. sf는 그만의 아름다움이 있어서 좋은데 책으로 접한지 한참 되었네요. 저는 지구를 좋아하지만 지구를 아낀다고 말할 자격이 있나 싶은게 쓰레기를 많이 버려요. 현대인으로서의 제 생존방식이 지구에 매일 쓰레기를 늘리고 있어요, 엉엉엉. 지구님 미안합니다.
      • 쓰레기 많이 내놓는 건 저도 반성해야 됩니다. 배달 세상이 되면서 택배 박스니 포장지도 넘 많이 나오고요. 


        앞으로 기후가 자꾸 변하고 지구는 어떻게 되어갈까요. 이 책 읽으면서 지구가 참 아름다운 곳이라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했습니다. 소설이 가지는 효용이 여러 가지네요. 


        일단은 이 가을 날에 지구에 밀착해서 산책을 많이 해야겠습니다. 이오이오 님께서도 가을 만끽하시길.

    • 정말로 신기하긴 하네요. 한국 외교부가 무엇 때문에 화성에 대한 보고서를 요구했을까요. 어디에 쓰려고? 현실과 진실이란 대체로 별 것 아닐 때가 많으니 이것도 그럴 것 같지만 그냥 신기해... 서 검색을 해 보니 국회 도서관 사이트에 '인류 정착 시기 화성 거버넌스 시스템의 형성에 관한 장기 우주 전략 연구'라는 자료가 나옵니다. 지금 홈페이지가 맛이 가서 (혹시 최근 화재 때문에...?) 접속은 안 되지만 이게 그 작가님의 보고서였나 보네요. 하하.




      저도 그 '선량함과 깊이의 문제'가 어떤 건지 살짝 공감이 가는 기분도 들고 그렇네요. 너무 선량하고 건전하기만 하면 뭔가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들을 일부러 외면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죠. 뭐 이건 화성 개척하는 이야기라니 경우가 좀 다를 수는 있겠지만 거기에 한국의 현실 행정을 비유하는 것 같은 뉘앙스가 들어간다면 역시 좀... ㅋㅋ

      • 놀랐다고 썼지만 이상했달까요. 정말 어디에 쓰려고 그랬는지. 찾으신 저 보고서가 맞습니다.(제가 제목까지 옮겨 놓았으면 수고를 덜어드렸을 텐데요...항상 정성들여 읽고 댓글 쓰셔서 감사합니다)


        아니나다를까 담당 간부님은 대사 발령 받고 가버려서 외교부와 연결된 후속 연구나 활용 같은 건 없었고요, 시간이 조금 흐른 다음에 우주 분야 과학자들의 관심을 받아서 강연도 하고 그랬다는 후기가 있었습니다. 인문학적으로 질문 던지기가 자연과학자들에게 다른 접근법에 대한 자각을 주었다고. 


        사실 이 작품의 인물들이 가진 선량함에는 자기 일에 대한 책임과 도덕심까지 포함하는 것이라 훨씬 훌륭하게 보아야 함에도 제가 꼬인 인물 취향이라 저런 과한 요구를 하는 거 같아요...  

    • 글 잘읽었어요. 감사합니다,


      박찬욱 감독님의 대학 써클! 후배여요. 서로 존재는 알았는데 실재로 만난건 입학한지 일년이 지난 제 생일이었어요.


      [비명을 찾아서](처음에는 한권이였어요.)를 선물로 주셨어요. 안에 '발랄한 감각'을 심오한 통찰력'으로,리고 써주셨어요 :)




      그때는 노래방이 없어서 전골집에서 1, 2, 3차를 겸했거든요. 물론 노래도 하고요.


      제 차례가 되어서 노래를 하는데 계속 감독님이(그때는 형!) '다시' 해서 이렇게 다섯번 만인가, 만에


      합격 받았어요>_< 이 노래로요. '필'을 살려서 부르라는 거였나봐요.


      빗속에서 - 이문세 / (1985) (가사)




      잘 아시겠지만 복거일의 SF는 두개가 더 있어요. [역사 속의 나그네] 저는 3권까지 읽었는데 결국 여섯권으로 완간됐네요,


      [파란 달 아래] "하이텔에서 최초로 연재된 전문작가의 소설로 당시엔 완전히 새로운 시도로 평가받았다... 


       5천원의 가격으로 아직 재고가 남아있다는 말이 있으나 구하기는 쉽지 않다."


         


      복거일에 대한 자료를 찾다보니 이런 구절이 나오네요. 소개시켜주신 소설가가 유명하신가봐요.


      "한국 SF 작가풀은 2000년대 들어 배명훈이나 김보영이 가세해서 약간 더 숨통이 트였고 2010년대 후반에 가서야 양적으로는 제법 늘어났다."


      복거일 - 나무위키

      • 유명 감독과 사적 인연이 있으시군요. 책까지 선물 받으셨다니 잊지 못할 추억이시겠네요.ㅎ


        정말 그 때는 밥집, 술집에서 생으로 노래를 부르고 그랬죠. 빠른 노래는 젓가락 장단이 있었지만요. 저는 분위기에 찬물을 뿌리는 느린 노래를 한 기억이 납니다. 


        복거일 작가의 소설은 [비명을 찾아서]만 읽었습니다. 이후에는 워낙 사회를 보는 눈이 저와는 달라서 손이 안 갔어요.


        덕분에 이문세의 노래 오랜만에 잘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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