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웨폰] 보고 왔습니다

- 제일 흥미로웠던 건 이 영화의 스토리 진행 방식이었습니다. 아예 한 인물을 챕터처럼 지정해놓고 그 인물의 이야기가 끝나면 다른 인물로 넘어가는 게 재미있었습니다. 한 인물의 시점에서는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던 일을 다른 인물의 시점에서야 비로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깨알 재미가 있더군요. 마치 넷플릭스의 25분짜리 드라마 에피소드들을 연달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이게 OTT 시대에 저항하는 영화의 새로운 전술일지도 모릅니다. 하나의 두시간짜리 이야기에 집중하게 하는 대신, 각 인물 별로 25분씩만 집중하면서 따라가면 되니까요. 앞으로 극장 영화는 이렇게 구조적인 숏폼 형식으로 분할된 이야기들을 묶어놓는 방식으로 관객을 더 쉽게 집중시키려할지도 모릅니다.
- 다만 그 긴장감이 경찰관과 약쟁이 편에서는 살짝 흩어지긴 했습니다. 이들은 아이들 실종 사건에 직접 관련되어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사건이 벌어진 현장에 우연히 맞닥트린 사람들이라서요. 결정적으로 이들에게는 이 집단실종사건에서 어떤 공포도 느끼지 않습니다. 특히 경찰관 편이 더 그러한데 그의 에피소드(?)에서는 이 사람의 개인적인 부담과 신경질적 압박이 주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비밀이 파헤쳐질 곳까지 연결고리로서 기능적 역할을 하는 게 좀 티가 난달까요. 이 경찰관 역시도 집단 실종 사건에서 뭔가 싸한 걸 느끼고 오컬트적 분위기에 합류했으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을 수 밖에 없겠죠.
- 약쟁이 편은 조금 웃겼습니다. 약과 가난에 너무 찌들려서 음산한 기운이고 뭐고 다 쌩까는 그 태연함이 웃기더군요. 봉준호스러움이랄까. 특히나 그 마녀의 집에 들어가서 마비된 부부를 보고서도 잠깐 놀랐다가 이내 도둑질을 계속 하는 게 인상깊었습니다. 역시 생활고(마약중독)이 저주보다 더 무서운 것일까요. 지하실의 아이들을 목격하고 탈출하려고 할 때는 많이 무서웠습니다. 이 캐릭터가 계속 살아서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됐으면 좋았을텐데, 주인공들을 적당히 괴롭히는 밸런스가 맞아야되니까 결국 경비원 4로 간택되고 말았던 것 같아요.
- 이 영화에 조쉬 브롤린이 나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학부형 모임을 할 때 누가 벌떡 일어나 쩌렁쩌렁하게 교사에게 항의를 하는데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였습니다. 얼굴을 보니까 조쉬 브롤린 맞더군요. 나중에 마녀의 집에서 좀비들과 사정없이 싸우는데 그 특유의 마초적 힘으로 몇번씩이나 때려눕히는 걸 보면서 감탄했습니다. 다만 영화에서 구체적으로 기술되지는 않았지만, 그가 꿈 속에서 자신의 아들을 붙잡고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이 있다고 하는 부분에서는 조금 미심쩍었습니다. 이게 단순히 상실감이나 원초적인 부성애라기보다는, 자신이 아들에게 어떤 폭력적 잘못을 저지른데 대한 죄책감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들은 거진 다 도덕적 결함이 있는데 아서만 그게 크게 부각되지 않죠. 그의 아들이 알렉스를 괴롭히는 장면이 나온 것도 아버지의 폭력을 학습한 결과처럼도 보입니다.
- 이 영화를 보면서 집이라는 공간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일단 house로 놓고 봤을 때, 아파트라는 공동주거단지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의 눈에는 유달리 공포스럽게 다가오는 지점들이 있었습니다. 기본적인 프레임이 나무와 유리로 이루어져있는데다가 빈 방도 여러개인 집 하나의 house는 한국의 주거건물과 비교해봤을 때 너무 침입이 쉬워보여서 불안했습니다. 아마 총이라는 극단적 수단으로 보호를 개개인이 알아서 하니 안전이 지켜지는 부분이 있겠지만... '외부인이 등장했다'고 할 때 이 건물 자체가 보안을 지켜주는데 정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느낌이었습니다. 한국이라고 해서 아파트나 철제 건물에 침입이 안되는 건 아니겠지만... 건축물 자체의 위태로움이 좀 더 부각되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 또 하나는 home이라는 개념입니다. 저스틴, 아서, 폴, 약쟁이(이름 까먹음) 등 이들은 전부 기본적으로 home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들은 선량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고 그저 성실하게 하루를 보내는 소시민이 아닙니다. 이미 내부적으로 어떤 결핍을 겪고 있거나 매우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아주 같지는 않으나 유사한 오컬트 장르의 [롱레그스]에서도 이같은 설정이 관측되는데 이게 단순한 우연 같지는 않습니다. 호러는 사회문제의 가장 외설적 고백이라는 격언을 생각해본다면 (저는 이 말을 미이케 다카시의 [오디션] gv 에서 들었습니다) 미국에서는 가정이 붕괴되는 어떤 강력한 외력이 작동하기에 이것을 장르적으로 풀어내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부분을 이야기해야하는 건, 이 영화의 줄거리가 "회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생겼다가, 그 문제를 해결하고 원상복구가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문제는 발생해있고 균열은 계속 일어나는데 다른 방향으로 아주 큰 균열이 생겨서 그걸 또 막아야하는 이야기입니다.
- 이 지점에서 마녀가 교장 마커스의 집에 방문하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이들은 미국 중산층 백인 주류의 지역에서 아시안이자 게이로 이뤄진 가정입니다. 비주류의 속성을 갖추고 있는 집에 들어와서 마녀가 아예 home을 박살내버립니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마녀 입장에서 그렇게 현명한 짓은 아닙니다만 다만 그 사회적 여파에서 금새 무관심에 묻힐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영화적 개연성을 넘어서서 사회적 배경을 생각해본다면 마녀가 직접 나서도 부담이 적기 때문일 것입니다.
- 그런 지점에서 알렉스의 시점이 재편집하는 부분은 의미심장합니다. 이것은 아이들이 실종된 이야기가 아니라, 한 아이의 가정이 완전히 파괴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좀 차갑게 말하면 이 아이에게는 친구들의 안위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화는 알렉스가 동급생 친구들과 잘 지내는지 그의 다른 인간관계를 보여주지도 않습니다. 아동 집단 실종 사건은 알렉스에게는 가정파괴의 연속선상에 있는 여파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부모의 자리에 부모가 있지 않은 것, 그리고 부모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아있는 것이 알렉스에게 최대의 화두입니다. 얼핏 보면 마녀가 가족을 점령한다는 이 허술한 이야기는 '아동학대'의 논리를 가져왔기에 굉장히 설득력이 있어보입니다. 내가 부모이지만 너가 나의 말을 듣지 않으면 나는 더 이상 너의 부모의 역할을 하지 않겠다 - 너를 괴롭히는 폭군의 위치에 가겠다 이게 아동학대의 원리 아닙니까? 이 영화가 주장하지는 않지만 영화의 내적논리로 차용되는 이 아동학대의 실상이 생각보다 무서웠습니다. 이 아이의 상황보다도, 이 아이가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그 학대의 고리가 견고하단 점에서요.
- 조금 다른 가정을 해봅니다. 경찰인 폴이 약쟁이의 말을 듣고 집에 들어가봅니다. 그런데 그는 즉시 하수인이 됩니다. 그리고 약쟁이가 억지로 그 집에 끌려들어갑니다. 이대로 시간이 더 흘렀다면 경찰들이 수상한 점을 느끼고 이 집에 쳐들어가 조사를 했겠죠. (마녀는 서둘러 짐을 싸긴 합니다만) 경찰이라는 공권력이 이 집에 발을 들인 이상 이 사건은 어차피 경찰에 의해 해결될 가능성이 높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그렇게 놔두지 않습니다. 저스틴과 아서가 이 집에 들어가 난리를 치고 결국 문제를 해결합니다. 이 영화에서 공권력은 실패합니다. 경찰은 가정의 파괴를 되돌릴만큼 신뢰할 존재가 아닙니다. 심지어 선생님도, 아버지도 해결을 못합니다. (약쟁이가 사건의 진상에 제일 가까이 접근했다는 게 좀 고약한 블랙조크죠)

- 엔딩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어른들이 아닙니다. 학대를 당하던 알렉스가 마녀의 저주를 그대로 마녀에게 써서 해결됩니다. 이 부분은 서양의 고전 동화 같은 지점도 있고, 아동을 해결의 주체로 세운다는 지점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의미심장한 건 알렉스가 이미 한 번 걸린 주문을 흐트러트리거나 마법을 완전히 통제하는 게 아닙니다. 마녀의 폭력을 마녀에게 그대로 행하면서 이 폭력의 주체를 찢어 없애버린다는 것입니다. 알렉스의 부모는 마녀가 죽었어도 그 세뇌가 풀리지 않습니다. 아이들도 바로 세뇌가 풀리지 않습니다. 몇개월이 걸리고 나서야 아이들은 정신을 찾습니다. 이 영화에는 비가역성의 무서운 진실이 있습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으로 쉽사리 돌아가지 않습니다. 한번 깨지거나 금이 간 것은 오랜 시간이 걸려야 회복됩니다.
- 이 영화의 엔딩에서 눈에 들어오는 건 아서와 아들의 조우입니다. 마녀를 찢어죽여버리고 아이들은 어느 마당에 서있습니다. 아서는 자기 아들을 찾아내서 안고 그 자리를 떠납니다. 이 장면은 서늘합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장면을 찍는다면 초점을 흐린 채로라도 다른 아이들을 프레임 안에 두고 아서가 아들을 안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서는 자기 아들을 안은 채로 현장을 떠납니다. (그가 지하실에서 자기 아들만 찾는 건 너무 절박해서 그럴 수도 있다 치지만요) 그는 다른 아이들은 신경쓰지 않습니다. 이것은 한 가정의 문제 해결일 수는 있어도 공동체의 해결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공동체가 공동체로 기능했습니까? 안했습니다. 그러니까 부친 개인이 발품을 팔면서 정보를 찾아낸 겁니다.
- 이런 점에서 이 영화의 서사 구조는 이 영화가 전제하는 공동체의 분열을 형상화해놓은 것 같습니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각 인물들이 고군분투하며 그렇게 큰 줄기로 모아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개체들이 공동체 안에서 서로 연결된다는, 공동체적 움직임이기 때문입니다. 각 인물들은 파편으로 나뉘어져있고 이들을 엮는 것은 순전히 우연입니다. 저스틴이라는 사람이 있다, 아서라는 사람이 있다, 하고 사람 별로 이야기가 건너 뛰는 것은 공동체의 실패라는 전제에서 당연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 외재적 관점에서 이 영화의 제목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아이들은 '웨폰'으로 기능한 게 딱 한번 뿐입니다. 오히려 아이들은 마녀의 생기를 채워주기 위한 용도로 러닝타임 내내 그냥 지하실에 갇혀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병기라는 뜻의 제목일까요. 아이들은 일제히 집을 떠나버리고 부모들은 아이를 되찾아 올 수 없으며 아이들은 누군가를 공격하고 이걸 어른들은 이해하지도 해결할 수도 없다...(경찰조차도!) 온라인의 공격성에 아이들이, 혹은 어른들마저 중독된다는 사회적 은유로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영화에서 보이는 송전탑의 이미지는 맥거핀이라기엔 너무 공교롭지 않습니까? 송전탑은 '전파'를 흐르게 하는 기구입니다.
* 저는 호러를 잘 못봐서 무서운 장면이 나오려고 할 때마다 바로 귀를 막았고, 제 옆자리 여성관객분은 핸드백 뚜껑으로 시야를 막더군요ㅋ 무서움을 느끼지 않으려고 하는데 사람마다 시각과 청각을 차단하는 게 달라서 웃겼습니다.
노숙하던 약물중독자 이름은 제임스였습니다. 도둑질해서 약물을 구하는 바닥까지 간 사람인데, 보수적이고 고전적인 이름을 붙여서 역설적 느낌이 나게 한 것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아 그렇군요 확실히 잘 안어울리는 이름이네요
미국식 오컬트 마녀 요소를 집어넣은 재미있는 코믹/호러물로 봤는데 또 더욱 즐길거리를 늘려주는 리뷰글 잘 읽었습니다. 그냥 단순히 글래디스에게 지배당하는 희생자들이 '무기'로 쓰인다는 은유 정도로만 제목을 봤는데 '217'이라는 숫자와 꿈에서 나오던 지붕 위의 기관총이라던가 이건 현지 관객들도 재밌는 해석들이 많더군요. 영화 자체가 총기난사의 비유라는 해서은 좀 납득이 안되기도 하고... 다만 엔딩은 비극을 겪은 후의 생존자들의 트라우마를 나타낸다고 봤어요.
조쉬 브롤린 얘기를 하셔서 추가로 덧붙이자면 원래 그 역할에 페드로 파스칼이 캐스팅 됐었고 베네딕트 웡의 교장 역할에는 브라이언 타이리 헨리라는 흑인배우였다가 배우조합파업으로 촬영이 연기되면서 교체됐다고 합니다. 저 둘이 어떻게 했을지도 궁금하긴 한데 지금 배우들도 워낙 잘했죠. 아 그리고 감독님 전작은 '바바리안' 입니다. ㅎㅎ
헉 잘못 알고 있었네요 해당 내용은 수정해야겠습니다 ㅋㅋ
미국인들의 로컬한 해석들도 궁금하네요
저는 이 영화가 총기난사의 비유라는 해석에 어느 정도 공감하게 되네요. 말씀하신 그 기관총이 되게 뜬금없다고 느꼈는데, 오로지 그렇게만 해석될 수 있는 것 같아요. 아이들이 집단적으로 사라져버린 사건이 미국에서는 총기난사일 수 있겠네요. 역시 한국인의 시선으로 해석하는 게 쉽지 않네요
볼 때마다 저딴 문은 나도 맨몸으로 부수겠다 ㅋㅋ 이런 생각하거든요 뒷문이 있는 구조도 그렇고... 저는 철제 보조문 같은 거 좀 해놓을 거 같아요 저런 데 살면...
작년부터 호러에 대한 관심이 좀 생겼어요 [롱레그스] 볼 때부터 그랬던 것 같아요 ㅋㅋ 쫄보끼리 열심히 호러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