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는 항상 상훈이형이 있다]를 읽고

* 평어체로 씁니다. 양해 바랍니다


ddffg.jpg


얼마 전 집에서 다소 거리가 있는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갔다. 출발 시간이 이미 늦었었고 영화를 온전히 즐기기에는 이미 15분정도가 지나있었다. 이렇게 영화를 봐도 전혀 만족스럽지 않겠구나 싶어서 지하철역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거의 1시간 30분이 소모되었다. 그때서야 새삼 느꼈다. 영화를 보러 간다는 것은 의외로 긴 시간과 발품이 드는 일이라는 것을. 놀랍고도 허탈했다. 내가 이 정도로 무언가를 위해 어딘가를 오가며 돈과 시간을 쓰고 있나.


단순하게 계산해보았다. 나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영화를 보러 오가는데에만 쓰고 있는 것일까. 이 행위를 일주일에 다섯번 한다면, 한달에는 이십번 한다면 그 동안 극장을 오가는 그 시간은 얼마나 들었던 것일까. 영화를 보고 행복해진다면 괜찮다. 그러나 나는 최근 육체적 피로와 묘한 소외감 - 모두가 극찬하는 영화를 나 혼자서만 얼떨떨해하는 감정 - 에 극장에서 영화보기라는 행위를 조금 회의하고 있었다. 그 숙고의 시간 때문인지 이번주에는 평일에 영화를 보지 않았다. 집에서 보내는 저녁시간이 놀랄 정도로 편안해서 나는 극장에 영화보러가기의 고됨과 그걸 이겨내고 얻는 성취감을 다시 재봐야했다. 이 영화를 어느 극장에 가서 보는 게 그 정도로 행복한 일인가.


최근 친구와 식사 약속을 하면서 평일 저녁, 그리고 주말의 어떤 시간은 전부 다 안된다고 거절했다. 그 때 극장에서 영화를 봐야했기 때문에. 어떤 달에는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짜증이 나기도 했다. 그 때 어떤 영화를 어느 극장에서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에.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건 그만큼 타인과의 접촉을 제한하는 계기가 된다. 그래서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건 시간과 돈과 체력이라는 개인적 요소외에도 다른 이와 어울리는 기회 자체를 포기해야하는 사회적 기회비용이 어마어마한 행위였다.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어둠 속에서의 정신적 고립. 그러니까 영화를 보면 볼 수록 많은 것을 써야하는데 그 결과 잃는 것은 기초적인 사회성이다. 영화를 열심히 볼 수록 외로워지는 것이다.


이 부작용을 망라해본다면 "씨네필"이란 단어는 성취의 단계가 아니라 하나의 증상에 더 가까울 것이다. (온라인에서 영화에 대한 박식함을 '씨네필'이란 칭호로 인정받으려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씨네필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는 각각 다르겠지만 내가 볼 때 그 단어는 (극장에서) 영화보기를 멈출 수 없는, 중독 상태가 진단된 사람을 가리킬 때 써야하는 단어 같다. 씨네필이란 영화를 그냥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그 기회비용을 치르는데 허덕이는 그런 사람들이다. 오죽하면 이동진조차도 정성일 평론가를 평론가로서 존경하지만 저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고 했겠는가. (아마 저렇게까지 살 수는 없다는 뉘앙스였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내가 "씨네필"에 가진 인상을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영화를 좋아하면 그에 대한 슬픔이 반드시 뒤따라온다. 어떤 영화들은 너무 아름다고 우리의 현실은 초라하기 때문에. 혹은 영화를 아무리 사랑해도 그것은 나의 일방적인 감정이기 때문에. 영화를 스노비즘의 도구로 쓰려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본전치기이겠지만 영화를 진실되게 좋아하려는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과 현실의 거리감을 반드시 확인하고 만다. 왜 나는 저 아름다움에 속해있을 수 없는가. 혹은 영화라는 아름다움에 내가 기여할 수 없는가. 씨네필의 영화사랑이란 이미 취미의 영역을 초과해있기 때문에 그 흥분과 도취는 늘 외로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아름다움이 개인의 상처를 건드리기도 한다는 지점에서 더 그렇다.


이 책의 구성은 조금 묘하게 되어있다. 아주 치밀해보이지는 않으나 중간을 감싼 도입부와 결말부는 영화가 상기시키는 작가 본인의 가족 이야기다. 이 책은 가족으로 시작하고 영화를 관통해 가족으로 끝나는 인상이 있다. 단지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는 어머니 혹은 부모님과 함께 영화를 봤고 감동했던 경험이 주를 이룬다. 어떤 영화에 얽힌 어머니와의 추억, 아버지와의 아픈 기억, 그리고 할머니와의 기억... 작가는 자신의 가족을  영화 속 캐릭터들과 겹쳐서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는 작가가 영화 속에서 가족을 무의식적으로 수색한 결과인 것처럼도 느껴진다. 이런 부분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파벨만스]를 떠올렸다. 그 영화는 영화의 기회비용은 가족일 수 있다는, 무서운 진실을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작가가 영화와 떠올리는 가족과의 기억이 행복하지만은 않지만, 동시에 내가 가진 영화와 가족의 추억을 따라갈 수도 있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파벨만스]의 주인공처럼 온 가족이 함께 본 영화로 가족과 영화의 관계는 불가분의 그것이지 않을까.


그렇게 마음 편하게 페이지가 넘어가지는 않았다. 영화를 사랑하느라 상실한 것들의 기억은 고통스러웠고 유명한 영화인들과의 기억들은 사사로웠다. 그럼에도 내가 흥미롭게 느꼈던 건 그 속에서 계속 발견되는 영화만들기의 철학이었다. 이것은 정성일 평론가도 지브이 때마다 꾸준하게 강조했던 지점이다. 영화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하나요? 일단 찍어라. 그런 점에서 이 책에 나온 홍상수 감독과의 짤막한 대화도 그렇고 우연히 찍은 노을이 단편영화로 발전되는 과정도 그렇다. 일단 찍고 보니 무언가 되는 이 과정의 서술에서 영화의 즉흥적이고 유물론적인 지점을 느낄 수 있었다. 종종 상념에 젖어버리는 이 책의 전반적인 구성에서 뭔가를 찍고 만들어 그걸 출품하는 과정은 생기가 도는 것 같아 읽기 즐거웠다. 작가가 직접 밝히듯이 영화를 사랑하는 것을 업으로 삼은 만큼 이 활기찬 과정이 다음 책이나 기록에서 더 많이 등장하길 바라게 되었다. 


사랑하는 영화를 소개하는 부분에서는 안타깝게도 나루세 미키오나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을 보지 않아서 그 부분은 건너뛰어야했다. 다만 [안녕, 용문객잔] 같은 경우 최근에 그 영화를 보기도 했고 그 영화 자체가 담고 있는 유령의 쓸쓸함이나 영화보기의 운명적 종결이라는 지점에서는 크게 공감했다. 종종 관객의 위치는 유령과도 같다고 생각해보기도 해서 그 불확실한 존재감은 관객으로서 어느 정도 통용되는 것이라고 확인할 수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여러 질문이 뒤따랐다. 이 책에 나온 영화들은 영화보기의 환상성을 일관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오히려 그 환상성을 부수는 영화는 달리 없을까. 오히려 영화가 현실에 복무하고 현실을 소환하면서 그 환상성을 스스로 깨트릴 때의 감흥은 관객의 또 다른 의무를 건드리지 않는가 등등. 예를 들어 나는 켄 로치의 영화를 상찬하면서도 사회에 일절 관심이 없는 그런 관객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런 것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적잖이 우려가 되었다. 영화로부터 받은 행복은 부모와 함께 영화를 봤던 오래전 기억들에 있고 현재와 현실 속에서는 영화를 보면서 얻은 불행과 균열이 반복되고 있었다. 어머니를 병으로 잃고 아버지와도 불화를 겪는 글쓴이에게 어떤 돌파구가 있을 것인가. 영화로부터 다시 구원을 받았다는 글쓴이의 고백에 씨네필의 팔자같은 것을 느끼기도 했다. 영화로부터 아주 자유로워질 수 없다면 그 질문과 답은 결국 영화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도 [벌새]를 보면서 이상한 감격에 휩쌓였었기에 그 감흥을 훨씬 더 크고 진하게 받았으리라는 상상력을 동원해보았다. 너무 큰 상처와 살아남아버린 사람들의 재회 속에서, 작가가 삶의 아픔을 치유받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영화를 짝사랑한다고 하지만 영화를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만이 되돌려받을 수 있는 것이 이런 것은 아닐까? 간절하고 목마른 자만이 감각할 수 있는 구원이 또 있을 것이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의 영화보기를 반추해보았다. 영화를 받고 감동받는 것이 때로 저주처럼 작동하는 이 현실에서 나의 영화보기는 무엇일까. 경건한 수도승처럼 영화를 추종하는 그 열렬함은 내가 영화를 대하는 마음가짐과는 너무 달랐다. 최근의 나는 갈 수록 영화를 현실에서 정교하게 빚어진 악몽의 탐구이자 때로는 신발끈을 묶게하는 고발의 증거로 더 자주 받아들이는 듯 하다. 그럼에도 내가 바라는 건, 그가 영화로부터 얻은 행복이 현실에서 순환되는 것이다. 그가 느낀 영화의 아름다움이 현실의 행복이 되길. 영화로만 채울 수 있던 그의 결핍이 어떤 식으로든 채워지길 바랄 뿐이다.

    • 영화 보는 행위가 특별한 의미를 갖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글이네요. 


      아마도 정성일 평론가는 영화를 만드는 창작자나 예술가와 같은 경지로써 평론에 임하는가 봅니다. 보통 평론은 한 다리 건너에 있다고 하지만 어떤 평론가는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그 아름다움과 현실의 거리감을 반드시 확인하고 만다. 왜 나는 저 아름다움에 속해있을 수 없는가. 혹은 영화라는 아름다움에 내가 기여할 수 없는가. 씨네필의 영화사랑이란 이미 취미의 영역을 초과해있기 때문에 그 흥분과 도취는 늘 외로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아름다움이 개인의 상처를 건드리기도 한다는 지점에서 더 그렇다.'


      좀 다른 얘길지 모르지만, 본문에서 이 부분을 보니 떠오르는데 가끔 어떤 영화를 보고 나서 주인공들을 향해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너네들의 불행과 외로움은 관객인 우리가 봐 주잖아. 현실의 나는 아무도 봐 주지 않는데...' 라고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인지 몰라도 영화의 아름다움이 영화가 끝난 다음 관객을 더욱 안정이 안 되게 할 때가 있어요. 그리고 그런 마음 때문에 많은 이들이 영화를 본 후에 글을 쓰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글 잘 읽었어요. 많이 쓰시길 바랍니다.













      • 앗 이제야 댓글을 확인했네요.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영화를 보면서 종종 제 자신의 초라하고 평범한 삶은 관객조차 없다는 사실을 몇번 느껴봐서 동감합니다.

게시판 2012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462,400 01-31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147,937 12-31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122,148 04-01
130354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10 183 12-31
130353 아바타 3를 보고 유스포 2 188 12-31
130352 [핵바낭] 올해 잉여질 결산 잡담 14 327 12-31
130351 아바타: 불 과 재 보고 왔어요 짤막 소감 6 225 12-31
130350 [영화강추] '척의 일생' 8 245 12-31
130349 흑백요리사 2 8~10회, 싱어게인 4 탑 4 결정 6 280 12-31
130348 Lacombe Lucien(1974) 7 124 12-31
130347 [관리] 25년도 보고 및 신고 관련 정보. 15 319 12-31
130346 Isiah Whitlock Jr. 1954 - 2025 R.I.P. 2 132 12-31
130345 [왓챠바낭] 우편배달부 말고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잡담입니다 12 261 12-31
130344 [넷플] 말 많고 탈 많은 '대홍수' 드디어 봤습니다 14 449 12-30
130343 [반말주의] 다들 올해 고생 많았어!! 새해 모두 건강하고 복 터지길 바래!! 12 180 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