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8번 출구]를 보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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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게임이 영화로 옮겨진다고 했을 때 걱정 반 호기심 반이었습니다. 인기있는 IP 의 유명함에 기대 영화화를 하고 나면 많은 사람들이 일단 볼거라는 안이한 기획이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게임을 영화로 옮길 시 장르의 본질을 무시하고 서사의 종속물로 만들어 원작 팬과 영화 팬들 모두를 실망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원작에서 연출되는 어떤 장면이나 설정들을 몇몇 쑤셔넣은 두시간짜리 영상 서사로 만든다고 사람들이 다 즐길 리가 없습니다.


게임은 스토리가 주가 되는 매체가 아닙니다. 게임은 플레이를 하는 감각의 장르입니다. 스토리가 중요한 게임도 있겠지만 안그런 게임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저는 스타크래프트를 보는 걸 좋아하지만 스타크래프트의 정확한 스토리를 게임 출시 20년이 넘었는데도 모릅니다. 그래도 게임을 즐기고 이해하는데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감각은 서사 없이도 작동합니다. 어떤 제약을 이해하고 그 제약 안에서 정확한 선택을 하는 것, 패드나 마우스 등의 컨트롤러를 조작해 신속하고 정확한 값을 얻어내는 것 등 플레이어가 직접 액션을 취하는 그 감각이 게임의 본질입니다.  


더군다나 8번 출구에는 최소한의 서사도 없습니다. 그냥 설정만 있습니다. 어떤 남자가 지하철역 8번 출구라는 공간에 갇혀서, 틀린 그림 찾기를 정확히 해내지 않으면 같은 공간을 계속 헤맨다는 규칙만이 있습니다. 이렇게 서사는 없고 감각이 두드러지는 원작 게임에 섣부른 서사를 쑤셔넣으면 원작 게임의 직관적인 흥미가 간간히 튀어나오는 두시간짜리 지루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게임을 어떻게 영화로 만들어야 하는 것일까요.


결론부터 짚자면 이 작품은 게임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중 가장 영리하게 만들어진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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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라벨의 볼레로가 웅장하게 나오면서 시작합니다. 이윽고 이 음악은 영화 바깥에서, 영화 안의 주인공이 이어폰을 꽂고 듣던 음악으로 교차됩니다. 주인공이 옆을 보니 울고 있는 아기를 달래지 못한 엄마와 그 엄마를 윽박지르는 남자가 있습니다. 주인공은 무기력한 표정으로 보기만 하다가 이어폰을 다시 귀에 꽂고 그 상황을 외면합니다. 지하철에서 내린 그는 헤어진 여자친구가 산부인과에 와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어떻게 할 건지 대답을 미루던 그는 8번 출구에서 계속 빙글빙글 돌게 됩니다. 


라벨의 볼레로는 이 영화의 오프닝을 역설적으로 건드립니다. 일단 원작 게임은 플레이어가 닫힌 공간에서 빙빙 돌 뿐입니다. 그런데 라벨의 볼레로는 바탕에 깔리는 스네어 소리가 씩씩하고 활기찬 느낌을 줍니다. 주인공의 울적하고 힘없는 표정을 보면 이 음악은 더욱 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이 음악으로 영화를 소개하는 것처럼 쓰고 있습니다. 이 후 엔딩크레딧에서도 이 음악이 나옵니다.


그것은 아마 라벨의 볼레로가 반복적 패턴을 가진 음악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맨 처음 스네어의 연주로 시작해 딱 두개의 패턴이 각 악기별로 번갈아가며 연주됩니다. 이 음악은 동일한 스네어 리듬이 연주되는 가운데 패턴 1과 패턴 2의 멜로디가 계속 번갈아가며 반복됩니다. 이 특징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패턴이 반복되는 가운데 미세한 차이를 발견해야하는 원작 게임의 특징과 그대로 겹쳐집니다. 


라벨의 볼레로는 이 게임이 가진 반복과 차이의 시각적 이미지를 청각적으로 구현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어떤 악기의 연주에서도 동일하게 연주되는 스네어 소리는 플레이어의 발걸음이고 나머지 악기의 소리들은 게임의 회차마다 살짝 달라진 8번 출구의 광고판이나 문고리, 형광등 같은 이상현상의 차이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이는 후반부에서 주제의식으로도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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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8번 출구]의 미덕은 설명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인공은 누구이고 8번 출구라는 현상은 무엇이며 여기를 빠져나가기 위해서 무슨 과정을 겪어야하는지 구구절절 떠들지 않습니다. 서사적 설정은 초반부에 설명이 거의 다 끝나고 나머지 내용은 게임플레이처럼 8번 출구의 길을 헤매는 걸로 이어집니다. 이 영화는 부차적 서사에 끌려가지 않습니다. 관객은 계속해서 8번 출구를 헤매는 감각을 경험합니다. 이 작품은 감각에 더 집중하며 러닝타임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영리하게 영화화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결과 이 영화는 서사를 거의 배제하고 도덕을 이미지로 구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틀린 선택을 하려고 할 때, 혹은 틀린 줄 알면서도 어떤 행위를 기어코 할 때 신체적으로 이상한 감각들을 느낍니다. 가슴이 무겁고, 몸이 식고, 혹은 갑자기 열이 나고 더워지고, 소화가 안되고, 시선을 마주할 수 없고, 손이 떨리고 등등 내면의 문제가 외부로 표출됩니다. 즉 도덕은 머릿속이나 마음안에서만 끝나지 않고 기어이 외부로 어떤 신호들을 보냅니다. 이 도덕과 신체적 반응의 관계는 영화에서 미로와 이상현상이라는 형태로 구현됩니다. 즉 이 8번 출구라는 설정은 단지 게임의 규칙을 빌려온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한 인간이 올바른 선택을 할 때까지 갇혀있어야 하는 미로의 심상이 됩니다. 주인공은 자기 자신의 도덕에 갇혀있습니다.


원래 게임에서는 이상현상이라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고 해서 커다른 효과가 생기진 않습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아기의 울음소리나 아기 울음소리를 외면하는 자기자신의 모습 등 죄책감과 연결된 이미지들이 계속 나오게 됩니다. 이 영화가 단순히 서사 중심이었다면 신파적으로 혼자 울고 불면서 날 여기서 꺼내줘! 하고 도덕을 감정으로 즉각 표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이 도덕적 실패를 주인공의 불안과 두려움으로 해석합니다. 내가 여기서 옳은 선택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이 선택이 틀린 것 같다는 예상에 초조해지는 '감각'을 영화는 계속 건드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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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가 다른 매체를 영화화할 때 영화는 원작을 뛰어넘을 것을 종종 요구받습니다. 이렇게 스토리가 없는 게임이라면 그것은 당연한 숙제가 됩니다. 이 지점에서 [8번 출구]는 챕터를 나눠서 The Lost Man, The Walking Man, The Boy 의 3막으로 구성해놓았습니다. The Lost Man의 막에서 관객은 익히 알고 있는 게임의 플레이 과정을 실제 사람과 현실세계로 구현된 버전을 보게 됩니다. "나"는 출구를 찾지 못해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미로가 나의 책임에 뒤따르는 심상이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2막인 The Walking Man에서 영화는 더 흥미로워집니다. 1인칭 게임이었던 "나"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로 전환되기 때문입니다. 내 옆을 스쳐지나가는 이 존재가 그냥 NPC가 아니라 나와 같은 처지의 타인이라는 새로운 관점이 영화에 추가됩니다. 그리고 이 2막부터 어떤 아이의 존재가 미로찾기를 함께 합니다.


2막에서부터 8번 출구라는 설정은 내가 나만을 책임지는 공간이 아니라 타인까지 책임져야 하는 공간이 됩니다. 성인으로서 옆에 있는 말 한마디가 없지만 약하고 어린 존재를 그냥 팽개쳐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무표정하게 걷기만 하던 (혹은 이상현상으로 씨익 웃던) 이 '걷는 남자'의 인간적인 부분을 보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입니다. 그는 종종 허둥지둥 서두르고 어리석으면서도 또 작은 책임감도 보입니다. 그리고 그는 끝내 실패합니다. 왜냐하면 아이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서 "아이의 말을 들을 것'이라는 영화 속의 도덕은 두가지 메시지로 자연스레 전환됩니다. 하나는 전여친의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주인공의 책임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 속에서 성인이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하는지에 대한 교훈도 됩니다. (영화 속 주인공에게는 남의 아이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일차적 책임이 있습니다) 


출구가 가짜인 걸 직감한 아이만 홀로 남겨집니다. 그리고 이 아이를 Lost Man인 주인공이 데리고 미로를 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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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게임에서라면 아이는 나타날리가 없는 존재입니다. 영화 속 주인공도 여태 일정한 규칙이 반복되는 세계에서 느닷없이 아이가 나타난 걸 보고 이상현상은 아닌지 묻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이상현상이 아닌 걸 나중에 알게 됩니다. 이건 재미있게도 '아이의 등장이 내 인생에 이상현상이 아니다'라는 주제의식과 연결됩니다. 이런 식으로 영화는 주제를 8번 출구라는 미로의 규칙에 조합시켜 나갑니다. 이 부분에서 원작 게임을 아는 사람들은 또 다른 엔피씨가 생긴 것처럼 상상하는 유희를 동시에 누릴 수도 있습니다.


주인공은 걷는 남자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이의 신호를 정확히 해석하고 이상현상을 발견합니다. 열린 적이 없던 문 틈으로 그는 지하철 안에서 이어폰을 끼고 아이와 아이엄마를 타박하는 폭력적인 남자를 못본 척 했던 본인의 과거를 봅니다. 그 동안 느꼈던 게 아이의 울음소리 같은 시청각적 감각이었다면, 그는 이제 자신의 과거를 직접 마주합니다. 


이 영화는 이 8번 출구 지하도라는 공간에서 시간선을 섞어놓습니다. 남자는 이 아이가, 자신의 미래의 아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자신이 전여자친구의 임신을 책임질 경우 함께할 수도 있는 존재라는 걸 깨닫습니다. 원작인 게임이 플레이를 하는 현재만의 공간이었다면, 이 영화에서는 아이라는 존재가 과거와 미래의 시간선을 섞어놓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가 도덕을 표현하는 방식은 눈여겨볼만합니다. 주인공의 후회나 깨달음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게 아니라, 어떤 선택과 그 선택에 뒤따르는 인과를 도덕의 미로 안의 요소로 배치해놓습니다. 


이 미로를 거의 다 깨나갈 때쯤 갑자기 홍수가 들이닥칩니다. 아이와 함께 이 홍수를 피하기에는 늦었다고 생각한 주인공은 아이를 높은 곳에 올려주고 자신은 휩쓸려갑니다. 폐허 속에서 아이는 출구를 향해 나갑니다. 여기서 영화는 나의 책임이 결국 나 아닌 존재에 대한 책임이라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아이의 존재를 아에 모르는 듯한 주인공이 다시 한번 등장해서 이 미로를 벗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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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엔딩이 재미있는 건 게임처럼 바깥으로 나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은 8번 출구 지하도로 왔던 길을 거의 되돌아갑니다. 그는 전여자친구에게 전화를 하고 자신이 그곳으로 가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지하철을 다시 타고, 거기에서 오프닝과 똑같은 행동을 합니다. 어떤 아이가 계속 울고 있고, 옆에 서 있는 남자는 그 아이엄마를 마구 타박합니다. 주인공은 아직도 미로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일상이 만약 이 미로의 반복과 다르지 않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영화는 이 도덕의 미로를 영화 속 현실로 끌고 옵니다. 우리가 헤매고 계속 같은 지점을 맴도는 것은 단지 특이한 초현실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 빈번하게 일어나는 선택의 연속이라는 것입니다. 


라벨의 볼레로는 영화의 이 주제의식과 다시 한번 맞물립니다. 스네어 소리에 맞춰서 우리는 정지 상태를 떠올리지 않습니다. 어딘가로 반드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반복되는 리듬 안에서 우리가 느껴야 할 차이가 있습니다. 같은 소리 같지만 분명히 다릅니다. 우리가 따라가는 이 리듬과 멜로디의 정형 속에서, 이 차이를 느끼고 그 차이를 실천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주인공은 이어폰을 끼고 계속 볼레로를 들으면서 똑같은 행위를 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영화가 끝나기 전 이어폰을 벗고 아이엄마를 타박하는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립니다. 이 다른 행위는 그의 삶과 행복에 어떤 변주를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 안그래도 흥미로운 영화일 것 같아서 보고 싶습니다. 글은 보고 나서 나중에 읽겠습니다. 아마 글도 재미날 듯.

      • 아이구야 감사합니다. 영화를 보신다면 유튜브에서 8번 출구 게임 플레이 영상을 꼭 보고 가시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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