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크래프트, 과거의 천재들의 고점
1.나는 늘 과거 위인들의 고점은 어디었을까를 상상해 보곤 해요.
왜냐면 전에 썼듯이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고점은 지금이니까 가능한 거거든요. 작가로서의 나는, AI에게 끝없이 딥러닝을 시킨 끝에 간신히 AI로서 구색을 갖추게 된 것과 비슷하게 만들어졌어요. 수많은 드라마와 만화와 소설을 보고 나서야 프로가 됐는데, 나는 드라마 1시즌 정도는 하루면 다 봤거든요. 1시즌당 22화짜리 드라마 5시즌을 일주일이면 다 보고 볼 게 없어지면 B급 드라마나 영화까지 꾸역꾸역 봤으니...말 그대로 당대에 존재하는 모든 드라마를 다 본거죠. AI에 비유하면 작가가 될 때까지 딥러닝을 한 거예요.
2.하지만 이건 컨텐츠가 넘쳐나고, 넘쳐나는 컨텐츠를 실시간으로 계속 전달받는 환경이 아니면 불가능해요. 그리고 그게 가능했던 환경은 요 20년뿐이죠. 나보다 일찍 태어난 작가라는 놈들은 무언가를 많이 읽고 볼 기회가 없었단 말이예요. 좋은 작가가 되려면 다독이 필수인데 말이죠.
러브크래프트는 부모를 잃고 5년동안 틀어박혀 책만 읽었다고 하는데...글쎄요. 차라리 21세기에 히키코모리 짓을 하면 작가로서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봐요. 그런데 러브크래프트가 살았던 시기에 그렇게 읽을 만한 책이 많았을 리도 없고, 동시대에 읽을 만한 도서들을 러브크래프트가 몽땅 섭렵 가능했을 것 같지도 않거든요.
나는 러브크래프트가 5년동안 히키코모리 짓을 하면서 전력으로 책을 탐독했을 거라고 보진 않아요. 대부분의 날들은 우울감에 취해서 그냥 누워있거나 울거나 하면서 보내지 않았을까 싶거든요.
3.어쨌든 러브크래프트는 어느날 한 잡지의 독자 기고란에서 다른 독자들과 시비가 붙어 설전을 벌이기 시작해요. 요즘으로 말하자면 키보드 배틀이죠. 그런데 당시의 키보드 배틀이란 건 월 단위로 이루어지는 키보드 배틀이었겠죠.
누군가가 디스글을 쓰면 씩씩거리며 받아치는 글을 우편으로 잡지사에 보내고, 또 그 글을 본 상대편은 개빡쳐서 기고란에 반박글을 올리면 그건 다음 달 잡지에나 올라오고...하는 일들이 벌어졌을 거란 말이죠. 지금처럼 분단위로 리플을 달고 즉시 반박하고 재반박이 오가고 하는 일은 없었을 거란 말이예요.
러브크래프트나 오스카 와일드에게 트위터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들은 아마 원래 남겼던 명언이나 소설보다 10배는 많은 명언과 글귀를 남겼을 거예요. 누군가가 그들을 발끈하게 만들면 즉시 스마트폰을 켜서 마구 글을 써댔을 거니까요.
4.휴.
5.과거에는 이토록 모든 일의 밀도가 적게, 그리고 너무나도 느리게 진행되었는데도 러브크래프트는 엄청난 작가가 됐어요. 도대체 우리가 아는 러브크래프트는 원래의 고점 대비 몇%를 달성한 러브크래프트일까?
만약 지금처럼 원하는 컨텐츠를 즉시, 몇 초만에 섭렵할 수 있고 원하는 상대와 즉시 소통할 수 있는 시대에 살았다면 러브크래프트의 고점은 어디까지였을까...라는 상상을 해보곤 해요.
사실 이렇게 말해도, 러브크래프트 역시 유복한 집안의 자식이었고 작가가 되기에 좋은 환경에 속해있긴 했죠. 당시 기준으로는요.
6.러브크래프트가 헤밍웨이처럼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었으니 작가들과의 소통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편지 덕후였다고 해요. 직접 대면해서 얘기하는 건 힘들어해도 사람들과의 소통, 연결을 갈망했다는 거겠죠.
지금이었다면 메신저로 작가들과 소통하면서 브레인스토밍도 하고, 여자 작가들과 썸도 더 많이 타면서 우울증도 완화된 삶을 살지 않았을까 싶어요. 러브크래프트도 꽤나 쑥맥이었는지..얘기하자고 찾아온 여자 작가에게 묘지에서 대화하자던가 하는 기행을 벌여서 사이가 멀어졌다고 하더군요.
7.그러고 보면 현대에는 이성을 상대로 뚝딱거릴 기회도 많이 있어요. 어떤 여자를 만나서 뚝딱거리고 tmi를 지껄이다가 비호감으로 찍혀서 잘 안되면? 적절한 피드백을 받고 다음 주, 다음 달에 다시 여자를 만나러 갈 수가 있단 말이죠.
하지만 과거의 평범남들은 어쩌다 한번 여자와 데이트를 하면 실수하고, 그걸 가지고 몇 년이나 꿍해 있거나 우울해하는 일도 많았겠죠. 연애에 관한 피드백을 얻을 곳이 많지도 않고, 여자와 데이트 기회 자체가 많지 않았을 거니까요.
8.뭐 그래요. 요즘 매일 생각하는 건데 21세기는 각 개인들의 최고점을 뽑아내기에 너무 좋은 세상이 아닌가 싶어요. 옛날에 태어났으면 엄두도 못 내봤을 고점을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