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 흑] 잡담

어릴 때 축약판으로 접해서 줄거리만 알고 있었던 책입니다.

열린책들 판으로 봤고 해설 제외하니 상하권 합계 800페이지 정도네요.

쥘리앵 소렐의 두 차례 연애를 통해 1830년 즈음의 프랑스 사회를 드러내는 이야기. 오늘도 역시 두서없이 받은 인상만 조금 씁니다.


이야기가 끝날 때 이 주인공의 나이는 23세입니다. 19세부터 시작되고요. '열정'과 '자존심'에 목숨을 거는 것은 당시의 고상한 정신 문화 중에서 '젊은이의 용기'의 가치를 매우 높이 치는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토록 젊은 나이의 인물이 주인공이라는 것은 양가적인 감상을 갖게 합니다. 지금과 1800년대는 수명이 다르고 어른 기준도 다른 사회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현대인 시각으로 보자면 인생에 대해 깊게 알 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쥘리앵의 나이는 이 인물의 물불을 가리지 않는 변덕스런 연애감정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지만 그가 주변 귀족과 성직자들을 평가하고 계층 의식을 갖는 것에 신뢰하기 어려운 마음을 갖게도 합니다. 이 인물의 시각을 과연 믿을 수 있는지. 그런데 저는 이상하게도 이해가 되어야 할 연애 부분은 재미가 없었고 주인공 경험이 부족해서 믿기 어려운 사회나 타락한 계층에 대한 비판의 눈을 보이는 페이지에서는 재미를 느끼곤 했습니다. 원래 연애의 밀당 부분은 재미를 못 느끼는데다가 오래 전 사람들 이야기라 더 그랬던 듯. 


한편 곰곰 생각해 보니 나이 때문에 주인공을 신뢰 못하는 것은 부당하다 싶었습니다. 쥘리앵의 시대는 물론이고 현대라고 해도 이십 대 초반에 가졌던 시각이 미숙하다고만 치부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 부분도 당연히 있지만 전적으로 그렇게 치부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시기에는 왜 그렇게 보는지에 대한 그럴 듯한 근거나 경험을 제시하며 논리를 풀어내기 어려울 뿐, 훼손되지 않은 바른 감각으로 판단하는 특별한 장점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안정과 안주와 타협으로 빛바래기 이전의 예리함에서 나온 생각들은 세월이 가도 끝까지 인정될 것들이 많습니다. 세월의 흐름을 타며 나이든 사람들은 그때의 생각들보다 나은 생각을 하고 사느냐... 각자 돌아볼 일이겠죠. 다만 이 소설의 쥘리앵은 어릴 때 은사와 책 몇 권의 도움으로(작가의 도움으로) 근거도 충분히 동원하고 있습니다. 명민함이라는 큰 무기를 갖고 있기도 하니까요.


후반에 접어들어 쥘리앵은 고용인 라몰 후작의 서기 역할을 하기 위해 집권 귀족과 성직자들의 비밀 회의에 참석합니다. 작가는 정치 얘기가 지루하지만 그래도 건너뛰어 버리면 이야기의 구멍이 되니...라며 회의 내용을 십 페이지 이상 할애해요. 1830년 즈음은 나폴레옹 몰락 후의 반동기였나 봅니다. 프랑스 사회의 기득권들이 당시 위기를 어떤 식으로 지나가려 했는지 구체적으로 의논합니다. 희한하게도 그때나 지금이나 이들의 대처는 크게 달라진 게 없어요. 이들의 주적은 말 많은 소시민입니다. 이들은 단순하고 솔직한 농부들을 자기편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방방곡곡 들어가 있는 교회를 통해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농부들 교화에 노력해야 한다고 하면서 지역별로 귀족 직속 군인들을 키우는 동시에 영국을 위시한 외세의 힘을 빌어 소시민들의 저항을 진압할 방법을 논합니다. 신분 사회가 조금씩 무너지는 과정의 발버둥이었는데, 이백 년 전 비밀 모임 장면을 읽는 과정에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어떤 회의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또 기억나는 것 한 가지는 쥘리앵이 처음 연애를 할 때 자신이 취할 행동이나 적절한 말을 모르는 상태라는 부분입니다. 상대에게 첫눈에 반했다거나 그런 게 아니거든요. 상대가 관심을 보이자 쥘리앵은 자존심 드높은 자신이 (구박만 받던)자기 가족 관계에서는 느끼지 못한, 인간 관계에서의 특별한 존재 가능성이 있을까 생각하여 부인에게 접근하게 됩니다. 어떻게 접근할지는 모르는 채로요. 그래서 뭔가 궁리해야 하고 항상 계산해야 하는데 여기에 큰 도움을 주는 것이 책에서 본 구절들입니다. 책의 내용을 떠올려 연기를 하다가 점점 그 역할에 익숙해지는 식입니다. 역할에 익숙해지고 일정한 관계가 위치 지어지자, 그러다 보니 감정도 무르익어 갑니다. 

책, 그 중에서도 소설이 낭만적 사랑의 전파에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이것은 [적과 흑]의 본문에도 언급 되고 있었으나 저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어릴 때 얘기지만 책을 통해서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거나, 사랑이라면 이래야 한다거나 하는 기준이 세워진 것 같거든요. 그것도 저의 현실과는 아주 거리가 먼, 주로 서양 소설이었는데....듀게 님들, 저만 이랬던 것은 아니겠지요? ㅎ 감정도 모방을 통해 배우게 되고 습관을 통해 정착된다는 깨달음은 아주 늦게 온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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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연히 읽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읽었던 문학전집들. 하긴 번역가 성귀수 선생은 소위 말하는 문학, 명작 전집 부터 다 읽은 후에 문학이든 번역이든 논하자고 하긴 했지만요 ㅎ

      • 가능한 읽고 싶은 작품들은 있는데 다 읽기는 힘들고(불가능하고)....그럴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도 드는 중입니다. [적과 흑]을 읽고 나니 이 시기 이전으로 올라가고 싶지는 않다는 심정이 ㅎ 그래도 [돈키호테]는 볼 것이만.  

    • 열린책들에서 나온 돈키호테 1권 읽고 2권째 들어갔는데 강추입니다. 재밌어요. 당시 기득권에서 좋게 보지 않았겠어요. 웃으면서 디스하는 듯한 느낌? 적과흑은 어린 시절 300여페이지짜리가 완역인줄 알고 읽었는데 열린책들 판으로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 돈키호테 읽을 결심을 붇돋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열린책들에서 따로 나온 이 책, 책 자체가 좋아 보여요.(보고만 있지 말고 시작을...) 


        [적과 흑]은 위에도 썼지만 연애 밀당 부분이 읽기 힘들었는데 나머지 부분은 좋았습니다. 읽은 후에 생각해 보니 짠한 마음도 많이 들고, 생각할수록 더 나아지는 작품이었어요. 

    • 오래 전에 어느 글인가에 댓글로 했던 얘기인데... 제가 이걸 국민학생 때 어른용 본판, 그러니까 thoma님 읽으신 버전과 비슷한 것으로 읽었거든요. 당연히 지금은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고 그냥 '연애 이야기였어'만 남아 있는데요. 이런 걸 보면 어려서 세계 명작이라는 거 너무 집착해도 별 쓸모가 없는 것 같기도 하구요. ㅋㅋ 정말 그 시절에 '세계명작'이라 불리던 소설들 대부분을 어른들용으로 다 읽었는데 결국 기억에 남아 있는 게 거의 없으니까요.




      요즘들어 자식놈들 책읽기를 좀 신경 써줘야 할 것 같다는 고민을 하는 중이라서 독서 후기 올려주시는 thoma님 글을 접할 때마다 다시 생각하고 고민하고 하는 중인데 참 어렵습니다. 일단은 뭐든 재미난 것들 중에서 훌륭하기도 한 작품들을 골라 읽혀볼까 하는데 선정하기도 쉽지 않고 그걸 또 들이대기도... 억지로 읽히는 것도 별로지만 아예 방치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말이죠. 하하...;;

      • 어른들용 세계문학고전들을 애들이 보고 그랬죠. 축약본도 보고. 요즘은 어린이,청소년 대상 책이 많아졌고 언제부터인가 샘들 모임에서 만드는 청소년 권장도서나 책을 소개하는 책도 묶여나오고 그래서 책 고르기는 한결 좋아진 거 같아요. 대부분의 세계문학,고전 이런 책은 고등학교 이후에 보면 좋은데 고등학교 때 문학 종류 독서가 가능한지 모르겠어요. 이건 예전 보다 더 힘들어진 듯하죠.




        책은 내가 읽는 것도 힘들지만 다른 사람이 읽게 하는 건 더욱 힘든 일인 거 같아서, 고민되시는 게 맞습니다. 분야별로 쉽고 재미있는 책들을 도서관에서 여러 권 빌려서 어떤 책이 맞는지 재밌는지 맛보기를 하는 게..일단 가볍고 재밌어야 할 거 같아요. 책 선택은 도서관 사서 샘들의 도움을 얻는 방법도 있을 것 같고요.


        잘 아시겠지만 시간 보낼 도구가 많은 시대라 약간의 의무로 읽게 하지 않으면 독서하기 어렵고 압력 속에서 읽어도 읽는 동안은 자기가 누리니까 어떤 식으로든 남는 게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의무 외에는 읽지 않는 사람이 되어도 나중에 의무로 읽은 소수의 책이 기억에 남겠죠. 로이배티 님 경우처럼 연령에 안 맞는 어려운 책 아니고 적절한 책일 경우에요.ㅎ      

    • 글 잘 읽었어요. 감사합니다. '칼바도스' 만큼, 이 책 주인공 이름이 강렬해서 기억은 나요>_< 


      thoma님처럼 '성인판'(?)으로는 안읽은것 같아요. 




      언젠가부터 책을 못읽는다는 적이 있는데요. 요새 제가 제일 긴! 호흡의 글을 읽는게 thoma님을 포함한 


      몇몇 듀게 분들이어요. 배우는 것도 많고 느끼는 것도 많고 그래요.




      thoma님 항상 고맙습니다!


      These Empty Streets







      • 저도 집중력이 없어지는 듯해서 잊어버리기 전에 써 보는 거예요. 조금이나마 기억에 남을까 해서요. 그래서 역량도 안 되고 정리도 안 된 상태라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막 씁니다. ㅎㅎ 일기장에 쓰는 것과는 또 달라서 개인적인 인상 위주이긴 해도 문장도 좀 다듬게 되고 조심하는 것도 있네요. 읽으시고 댓글 정성스럽게 남겨 주셔서 제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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