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사랑과 야망'의 미자

언젠가 듀게에 가장 가장 공감하는 가상의 캐릭터에 대한 글이 올라온 적 있었는데요

그땐 잠시 고민하다 답을 내지 못했는데 잡념폭발의 새벽(미국입니다)에 떠오르는 인물은

김수현 작 사랑과 야망의 미자(한고은)입니다. 닮았다기보다 내가 이해하는 사람이랄까요.

 

미자는 잘 나가던 영화배우였고 극중 조민기와 결혼한 후 배우로써의 커리어는 중단되고 집에서 매일 술을 퍼 마시고

냉혈한 조민기에게 구박도 당하고 구박도 하며 살아가는데 디테일은 기억이 안 나고 여하간 안 행복해요

행복하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는 남편 조민기만큼 자신은 자기 삶을 충실히 살지 못했다고 여겼기 때문인 것 같은데

남편의 성공과 성취를 자연스레 자신의 것으로 공유할 수 있는 일부의 여자들과 달리 미자는 남편을 질투하고 남편에게

처절한 열등감을 느끼죠. 조민기는 뭐 알아 주는 성취형 인간이고 미자는 결혼하지 않았다고 해도

배우로써건 뭐로건 대성하기엔 영악함과 자기 절제가 부족해 보이긴 했어요.

 

왜 지만 잘나고 난리냐고 버둥버둥 괴로워하는 미자를 전 진심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

저도 골백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성취형 인간은 못 되는 주제에 그렇다고 제 팔자에 만족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제 상황이 미자랑 닮은 건 아니지요. 전 그렇게 화려한 인간도 아니고

그때의 전 미자처럼 결혼으로 인해 어떤 식으로든 커리어에 단절이 있었던 상황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냥 어렸을 때는 일종의 중2병으로 당당하게 안 부러워할 수 있던 성취형 인간에 대한

열등감을, 사회생활을 몇년 해 보면서 뼛속 깊이 절감하고 있던 시기여서일지도 몰라요.

 

여하간 사랑과 야망이란 드라마, 그리고 김수현이란 작가를 달리 보게 했던 것이 바로 미자라는 인물이었는데요

인물 자체의 의식이 꽤 현대적이었던 것 같아요.

평생을 안 행복하다고 퍼덕퍼덕 버둥버둥거리는 한고은에게 친한 언니 이승연이

'넌 어떻게 그렇게 삶이 좁고 아직도 그렇게 너만 중요하냐. 너 자신의 범위를 확장시켜라. 네 남편도 너고 네 아들도

너다.' 뭐 이런 취지로 충고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어요.

 

드라마의 배경이 되었던 당시로선 지금보다 경직된 성역할도 큰 이유였겠지만 그게 아니라도

성취형 인간과 비성취형 인간이 만나면 일종의 삼투압 같은 화학현상처럼

비성취형 인간이 성취형 인간의 서포터로 포지셔닝되기가 쉬운 것 같아요.

그런데 성취형 인간도 아닌 주제에 주인공이 아닌 채로 사는 것도 싫은 못된 자존심이 미자를 힘들게 했을 거라고 전 이해해요.

 

그러고 보면 김수현 드라마엔 미자 같은 여자들이 모양을 달리하며 존재해 왔던 것 같기도 하네요.

플러스, 김수현 드라마엔 미자 그리고 미자와 대척점에 서 있는 여자-사랑과 야망에선 과수원댁...같은 흑백대조도 꽤 많았던 것 같아요

내 남자의 여자에서 칠첩반상 차려주던 배종옥이랑 처음엔 평생 밥 안 할 것 같아서 좋다가 나중엔 밥 안 해준다고 원망 받던 김희애도 그랬구요

이런 흑백 대조가 촌스러운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자 같은 캐릭터는 리메이크판이 방영되던 당시에도 꽤 신선하게 느껴졌어요

 

한고은 연기는 늘 논란이 있지만 전 한고은의 미자는 참 좋았어요

화려하지만 심약해 보이고 긴 팔다리로 술병을 끌어안고 허우적대는 모습이 제대로 우울했어요

퇴폐적인 화려함도 있었구요

비록 발음은 샜어도,

미자의 어리석고 괴로운 마음은 잘 전달이 된 것 같아요.

 

한고은의 미자를 기억하시는 분이 계신가요?? 

 

 

 

 

 

    • 한고은의 미자만 기억하는데요. 불안불안해 보이는 캐릭터였죠.
      매력 있었어요.
    • 그쵸 차분하게 긴 시간을 커버하는 드라마 지루하다고 느끼다가도
      미자만 나오면 불협화음 같은 긴장감이 돌아서 좋았어요
    • 전 미자라고 해서 80년대 작품인줄알았어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지 ^^
    • 옛날 미자는 차화연이었나요
      저도 어렸을 때 스쳐지나가며 본 것만 같은;
    • 전 그 드라마 몇 번 본 게 다지만 거기에서 미자의 모습은 묘했어요. 한고은의 그 화려한 얼굴에다.. 싯붉은; 루즈까지 칠하고 하늘하늘한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채 긴 다리로 펄럭거리며 마냥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움직이던 모습이 뭔가 사람을 잡아끄는 느낌이 있었달까요.
    • 제 어렴풋한 기억이 맞다면 예쁜 백을 많이 들고 나왔..'ㅅ';;
      배우 한고은씨로서의 큰 핸디캡인 불안한 발성도 그 역할에 딱 맞아떨어졌던 느낌이었어요. 다만 공감은.. 저는 드라마 조금 보면서도 아놔, 뭐 저런.. 하고 막 짜증만 났던 기억이 나욧.
    • 실크나 새틴으로 된 나이트가운 같은 것도 아주 잘 어울렸죠 내적인 결핍감이 좀 전달이 되는 듯해서 한고은이 연기를 잘하는 배우였나 고민했어요 전 참고 참고 또 참는 과수원댁이 더 짜증났어요 미자도 어디다 내놔도 빠지지 않는 민폐형 캐릭터긴 한데 전 그냥 불쌍했어요 어흑
    • 래빗님은 아침 일찍 일어나는 근면토끼 ㅎㅎㅎ
      한고은 예쁜 백 예쁜 옷 원없이 걸치고 나왔던 듯합니다. 배우가 극중 여배우로 나오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죠. 좋았어요.
    • 마지막회 장면이 황망하게 끝나죠. 미자가 끝까지 부성애와 우울증을 극복 못하고 우는 장면에서 딱 끝나니까요. 오리지널판만큼이나 쇼킹했어요. 사랑과 야망에서의 미자 캐릭터랑 엇비슷한 김수현 드라마의 여주인공이라면 내 남자의 여자의 김희애가 연기한 이화영이 있습니다. 상당히 흡사합니다.
    • 저는 차화연의 미자에게 더 애착이 갑니다.
      거기서 차화연과 남성훈은 애정을 무기로 싸우는 지긋지긋한 라이벌이었어요.
      박진감 넘치는 커플이었죠.
    • 얼마전에 어떤 케이블에서 80년대 사랑과 야망 요약(?)해주는 것 봤는데 차화연도 나름 포스 있더군요.
    • 미자 캐릭터를 비롯 사랑과 야망의 캐릭터들은 김수현의 내공을 제대로 보여주는 참 다양하고 리얼한 것들이었어요.
      내적인 결핍감 때문에 아무리 부와 허영을 채워도 우울하기만한 그녀의 모습이 이제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요.
      한고은의 연기도 좋았어요. 한고은 더 잘됐으면 좋겠어요.
    • 저도 글 읽으면서 길고 하얀 팔다리로 술병을 끌어안으며 휘적휘적하는 걸 상상했는데
      본문 끝에 그 표현이 나오는군요
    • 평소에도 한고은 좋아했지만 그 캐릭터 너무 잘 어울렸어요. 긴 팔다리에 긴 홈드레스 입고 술병안고 헤롱헤롱...
      이해도 되고 안타깝기도 했지만 저는 어떤 면으로는 미자가 부럽기도 했는데,
      비성취형에 대충 만족(=체념)까지 하고 사는 사람은 가끔 그 결핍을 느끼는 사람을 보면 그것조차도 부럽더라고요.
      소위 "내가 가지고 싶은 건 바로 '원하는 마음'" 이란거죠^^;;
    • 저는 그 장면이 기억에 남아요.
      후반부쯤이었는데 미자도 디자이너 선생님도 꽤 늙었죠.
      아들도 남편도 다 있지만 다 늙어서까지 끝끝내 힘들어하는 미자와 선생님이 교외에 차를 타고 나갔던가 그랬는데,
      거기서 미자가 정말 텅빈 얼굴로 선생님 저 좀 안아주세요
      하는 그 장면이 말할 수 없이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가슴이 아팠지요.
    • 그러고 보면 미자가 유독 새롭게 느껴졌던 것은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가시적인 원인 없이도 생겨 먹은 게 그모양 그꼴인
      우울하고 결핍된 인간을 제대로 조명하는 게 참 드물어서였던 것 같아요
      평생 자기가 자기를 다스리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요
    • 본문도 동감하지만 원글님의 마지막 댓글 특히 동감이요. 뭐든간에, 특히 드라마나 소설 등에서 인과관계, 타당한 설정 꼭 하라고 하잖아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이런 말 하면서. 그런데 현실에는 정말 그런 게 있잖아요. 이유 없이 그냥 이상한 거, 그냥 고독한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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