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나리뷰랄라랄라] 요술

[요술]이라는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관객들은 무대가 되는 예술학교의 사실성을 따지는 것은 무익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현실세계에서 이런 학교는 존재할 수 없거든요. 나이 든 교장을 제외하면 교사들은 아예 없는 것이 분명하고, 학생들은 오로지 뉴에이지 음악에만 몰두하는 곳이지요. 시대나 공간적 배경을 밝히는 것도 마찬가지로 무익합니다. 여러분은 그냥 이 세계가 자기만의 논리와 법칙으로 움직이는 평행우주에 속해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셋입니다. 첼리스트 정우는 자기가 제2의 요요마쯤 된다고 생각하는 학교짱인데, 이런 이야기의 학교 짱들이 대부분 그런 것처럼 한 없이 불쾌한 아이입니다. 지독한 자기도취에 빠져있고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걸 모르죠. 정우에게는 친구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그가 하인처럼 부리고 모욕하는 버릇이 든 소심한 안경잡이 첼리스트 명진이고, 다른 하나는 둘 사이에서 어장관리를 하고 있는 지은이라는 피아니스트입니다. 전 이들이 영화 내내 불행한 건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우야 원래 그런 놈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명진이나 지은은 탈출구가 있었지요. 정우랑 안 놀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여전히 정우 곁을 돌면서 그가 그들의 등을 지려밟고 가게 허락합니다. 하긴 매저키스트도 자기가 선택해서 되는 건 아니긴 합니다. 


영화 이야기의 기본틀은 불치병 삼각관계입니다. 정우는 손의 상피세포가 떨어져나가고 가끔 피를 토하는 불치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습니다. 명진은 지은에게 감정을 품으면서 친구를 배신하고 있다고 느끼고, 지은 역시 비슷한 죄책감에 괴로워합니다. 성장통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영화에서 이들의 죄책감은 자기파괴 이상의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가 너무 지나치기 때문에, 이야기만을 떼어놓고 보면 좀 어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까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요술]의 세계에는 자기만의 논리가 있습니다. 이 세계는 이런 감정과 그에 기반하는 감수성이 목숨보다 더 중요한 곳이에요. 그냥 그렇다고 받아들여야 해요. 여러분이 [트와일라잇] 세계의 모든 수컷 괴물들이 벨라 스완에게 매료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대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요술]의 심리묘사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이건 그냥 장르 소통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야기는 단순하고 러닝타임도 짧지만, 영화의 구조는 약간 복잡하고 혼란스럽습니다. 이야기가 정리되려면 시간이 걸리죠. 하긴 이 이야기를 단순하게 그리는 건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면 빈약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만 남으니까요. 그 이야기를 재료로 여벌의 의미를 창출해야 합니다. 이건 소위 '하이 아트'의 논리이기도 하지만 순정만화의 논리이기도 하죠. 전 이 영화를 보면서 70년대 순정만화들이 떠오르더군요. 목표나 접근방식이 비슷합니다. 


영화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공간적 배경은 예상 외로 설득력이 있습니다. 일종의 판타지적인 현실성이죠. 영화가 추구하는 아날로그 풍 복고는 우리의 과거와 직접 연결되어 있지 않은 허구의 것이지만, 그래도 그 세계 안에서는 묘한 무게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종종 예쁘기도 하고 중간중간에 삽입되는 초현실주의와도 어울립니다. 오로지 뉴에이지 스타일로 도배된 음악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원래 그런 세계려니 하고 들으세요. 배우들의 연기는 비교적 잘 통제되어 있으며, 대사들은 (노골적으로 관객들의 닭살을 돋게 하는 종류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발목을 잡지 않습니다. 


[요술]은 제가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즐겁게 감상할 수 있는 영화가 아닙니다. 그러기엔 둘 사이의 갭이 너무 크죠. 전에 말하지 않았나요. 전 십대 때도 십대 문화를 온전히 이해했던 적이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세상엔 저보다 이 영화를 더 잘 소비할 수 있는 관객들이 있을 겁니다. 그들이 얼마나 되고, 그들이 이 이야기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기타등등

감독 카메오가 있습니다. 몰랐는데, 감독과 주연여자배우의 실루엣이 은근히 닮았더군요.


**








    • 구감독이 시나리오도 썼나요? 만약 그렇다면 듀나님 리뷰는 꽤 호평처럼 보이네요.
    • 이게 시나리오에 대한 호평처럼 읽히나요? :-/
    • 아하. 그런건 아니고 "배우들의 연기는 비교적 잘 통제되어 있으며, 대사들은 (노골적으로 관객들의 닭살을 돋게 하는 종류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발목을 잡지 않습니다." 이 부분만 보자면 할만큼은 했다는 뜻으로 보여요.
    • 구감독 너무 첫장편에 하고싶은 말이 많았나보군요.
      적당히 가벼운, 본인의 드라마 출연작들 같은 작품을 만들었어도 좋았을것 같은데..
    • 전 대사는 별로인데 배우들이 선방했다는 말로 읽었습니다.
    • 듀나님이 보기에 구혜선이 향후2년이내에 다음작품을 내놓을 수 있을까요? 미술이나 음악으로 걸치는게 아니라 온전한 감독으로 말이에요.
    • 배우들이 선방했을 수도 있지만 입에 전혀 맞지 않는 어색한 대사는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내용이 어색하더라도 배우의 입을 통하는 동안 혀가 꼬이게 하는 그런 어색함은 없었단 말이죠.
    • 그러고보니 게시판 살아나고 처음 올라오는 리뷰인가요.
      그동안 써놓으신 리뷰들도 오늘 올라올지 궁금하네요. :-)
    • 요술은 저예산 영화이고, 한 10만 정도만 들면 손익분기점을 넘긴다고 합니다. 손해를 본다고 해도 구혜선이 CF 하나 찍으면 커버할 수 있는 돈일 거고요. 다음 영화를 못 만들 이유가... 와, 정말 부럽네!
    • 리뷰 읽고는 왠지 궁금해져서 예고편을 찾아봤는데 비지엠으로 웬 아리랑이 신나게 흐르네요. 더 궁금해지긴 했지만 아무래도 참고 보긴 힘들 듯.
    • 구양이 처음부터 괜찮은 영화를 만든거 같군요.
    • 전에도 말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오골오골합니다.
    • 계속 영화를 만든다면 한 10년후쯤 대표작 하나 만들지도 모르죠. 그때도 아직 30대인 구감독 ㅋ
    • 계속 본인의 구미/취향에 맞는 저예산영화를 만들겠다면야 못만들 이유가 없죠. 정말 부럽네222

      제가 말한 후속작은 장편에 유명배우도 나오고 흥행에 신경써야하는 상업영화를 뜻하는 거였어요.
      물론 이번 영화가 성공을 하거나 특이한 개성이나 감수성을 보여준다면 가능한 일이겠지만요.
    • 바이바이/ 그런 상업영화를 만들려면 대형 영화사에서 써줘야 하는데. 지금 영화판을 잡고있는 30-40대의 어느정도 흥행 검증된 감독들이 너무 많지 않나요??
    • 그래도 영화내내 나름의 일관성은 있나보네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
    • 구혜선이 하는 거엔 약간씩의 실력은 분명히 보여요.
      그런데 어디선가 본거에
      예전에 옥주현이 구혜선 노래 가르치다가 헛바람이 너무 들었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했다는데
      지금 다른걸 여러가지 도전하는것도 노래와 비슷한 듯.
      누군가 구혜선양을 정신차리게 만들면 우리나라에 예쁘고 재능있는 사람이 하나 생길텐데 말이죠
    • 구혜선이 만든 것 중엔 저번에 나온 뉴에이지 앨범이 가장 실속있는 거 같습니다. 이 영화에도 조금 나옵니다만. 사실 리뷰 쓰면서 그걸 듣고 있었지요.
    • 구혜선은 적어도 자신이 부족하다는걸 공공연히 말하고 다녀요. 그런데 전체적인 행보로 보자면 그것도 연기인가 싶은...
    • 루크스/ 신인감독들도 첫작품에 실패했어도 시나리오를 잘썼다거나 특이한 감성이 보인다거나 하면 몇년안에 투자받아 새작품을 가지고 나오더라구요.
      영화에 뜻이 있다면 흥행을 염두한 상업영화가 목표일것 같은데 구혜선한테 그런 상업영화를 감독할 수 있는 뭔가를 느꼈냐는 거였습니다.
    • 구혜선이 상업영화라....
      구혜선은 지금 '예술'이라는 거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일종의 예술병이 약간 들린거같이 보여서
      상업영화를 천시하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을 듯
    • 평범한 상업영화처럼 실력이 쉽게 드러나는 영화도 없죠. 오히려 예술영화를 만들기가 더 쉽습니다.
    • 지난 아시아나단편영화제때 그런 얘기를 했어요. 이 분야, 저 분야를 계속해서 도전해보는 건 결국 영화를 하기 위함이었다고.
      적어도 구혜선이 자기가 가장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실험을 통해 영화세계를 구축한다면 상업영화 안할 이유도 없을 것 같아요.
      다만, 지금으로선 함부로 다루기에는 치기어려보이는 소재들을 많이 사용하는 것 같더라고요. 과정일수도 있겠다 싶어요.
      적어도 유지태처럼 되지 않기를.
    • 항상 이상한게 왜 외모가 받쳐주면 실력이 조금씩 딸리는건지
      거울이 없고 외모에 대한 칭찬이 불법인 세상에 살면 그사람들이 제실력을 발휘할지 너무 궁금
    • 아, 유지태 최근작 정말 안 좋았습니다!
    • redeemer/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하하하
      DJUNA/ 만들기 쉽다는 예술영화에서도 실력을 들킨것 같네요. 하하하
    • 구혜선이 피와 살이 튀는 슬래셔 무비를 만들어서 부천 영화제 금지구역 같은곳에 나와도 재밌을듯.
    • 예술영화도 만들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죠. 들통나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울 뿐이지.

      외모와 실력을 다 갖춘 사람들도 많죠. 저번 게시판에 장황한 리스트가 며칠 동안 올라온 적 있었죠.
    • 루크스 / 그러고보니 정말 호러 각본도 썼다고 하던데요?
    • 와 얼마만에 글인지요 전 아직도 시 리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언젠간 올리실거라 굳게 믿고 있습니다 ^^
    • 아침 무가지 신문에 기사가 난 걸 봤는 데 구혜선이라서 오히려 투자자를 찾기 힘들었고 결국 영화에 투자하는 댓가로 YG 엔터테인먼트와 종신 계약을 맺었다는 얘기를 하더군요. 사실 영화에 올인하는 게 아닌 바 에야 CF 몇편 찍고 그걸로 영화 제작비를 대고 이런 구도가 쉽게 될리는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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