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질남 캐릭터 예찬

불과 몇년전만 해도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 내가 뭐가 못나서 연애를 못하고 있는거야. 나도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세월이 지나서 알 수가 있었지요. 마음 먹어도 안되는건 안되는거고요, 객관적으로 연애를 할 수 있을만한 능력 혹은 매력이 없어서, 즉 못나서 이러고 있는 거죠.

 

 

이 지경이 오래 지속되다보니 묘한 자조 및 자학, 자괴가 습관이 되고 결국 이 상황을 즐기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저의 이러한 취향은 책이나 만화 등에서 저와 같은 캐릭터를 만나면 엄청나게 반갑고 신나는 반응을 하게 되는 부작용을 불러 일으켰는데요,

이러한 배경에서 제가 좋아하는, 그리고 사랑하는 찌질남 캐릭터들에 대해 끄적여보겠습니다.

 

 

제가 규정하는 저와 비슷한 찌질남들은 대략적으로 다음의 조건들을 갖추고 있습니다.

 

1) 연애를 안하는게 아니라 못하는 캐릭터들입니다.

연애를 안하는 것과 못하는 것의 차이는 크죠. 듀게에서도 가끔 그런 글을 봅니다. 지금 만나는 사람은 없는데, 연애하는 것도 이젠 귀찮고 딱히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이런 상태는 연애를 안하는 상태입니다. 제가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종류의 상태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연애하는 사람들보다 더 부러워요. 제가 처해있는, 그리고 제가 앞으로 이야기할 캐릭터들이 처해있는 상황은, 여자를 정말로 만나고 싶고 연애를 하고 싶은데, 솔직한 말로 발정이 났는데 능력이 부족해서 그걸 못하는 상황입니다. 이게 잘 따지고 보면 엄청나게 가엽고 불쌍한 상황이지만 이야기 전개 방식에 따라 코믹한 상황들을 여럿 연출할 수 있는 조건이 되기도 합니다.

 

2)비교적 자기 자신에 대해 냉정하게 판단하며, 자신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근자감이라는 말이 있죠. 어떤 자신감을 가질만한 근거가 전혀 없어 보이는데 끝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꾸미는 말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이 근자감을 가지고 있는 실존인물들은 결국에 가서는, 최소한 연애에 있어서는 성공을 하는 경우가 많은거 같아요. 자신감 자체가 엄청난 매력인거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그리고 제가 사랑하는 캐릭터들은, 근거가 없으면 자신감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 두려워 위축되는거죠. 안그래도 어려운데 총체적인 난국입니다.

 

 

하여튼 이러한 캐릭터들이 등장하여 활약하는 작품들이 꽤 많아요. 

 

제가 첫번째로 이야기하고 싶은, 가장 좋아하는 친구들은 , 이제는 개그만화는 때려친 것으로 보이는 후루야 미노루 작품에 나오는 캐릭터들 입니다. 대표적으로 그린힐의 오카(대머리 할리라이더)와 낮비의 안도(청소부 스토커)입니다. 이 친구들은 매우 쉽게 이성에게 매력을 느끼고, 어떻게 해보려고 발악을 하는데 일이 생각처럼 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이들이 이성 관계에 있어서 어설프기 때문이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그냥 이들이 성적 매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천성이 착해서 이들과 친구가 되면 나쁘지 않을거 같아요. 하지만 연인은 다르죠. 매력이 있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후루야 미노루는 이 두 캐릭터 모두에게 꼼수를 씁니다. 작품 막판쯤에 가서 걍 하늘에서 떨어진 예쁜 여자친구를 안겨주는거에요. 후루야 미노루는 '이거봐라. 너네한테도 언젠가 이런 여자가 떨어질 지 누가 알아?'라는 의도에서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니 우리도 살만큼 살았는데 그런건 알잖아요. 만화는 만화고 현실은 현실이죠. 차라리 로또 1등에 당첨되는게 더 실감나는 이야기겠네요.

 

두번째로 이야기하고 싶은건 박민규 작품속에 등장하는 몇몇 남성들 입니다. 제가 볼 때 박민규와 후루야 미노루는 핵심적인 어떤 부분에서 정서적으로 매우 유사한거 같아요. 몇몇 상황들에서, 박민규 소설에 대사들을 등장인물들에 후루야 미노루의 만화 캐릭터가 겹치는 것으로 느껴지는 부분도 많았습니다. 제가 많이 공감했던 캐릭터들은 비교적 최근작인 '아침의 문'과 '근처'에 나온 주인공들 입니다. 이 아저씨들은 위 친구들과는 조금 다른게... 발정이 났다기 보다는, 사랑받고 싶어 합니다. 삶의 대한 애착 자체가 거의 없지만, 누군가 자신을 사랑해 준다면 나도 이 하찮은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거라고 믿는거죠. 이들에 대한 심리묘사가 일인칭으로 이루어지는 몇몇 문장들에서, 저는 제 마음을 읽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경험을 했답니다. 문학적 완성도니 예술성이니 다 떠나서, 그 이유 때문에 박민규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사람입니다.

 

세번째는 백가흠 소설에 등장하는 남성들이에요. 듀게에서는 별로 언급이 안된거 같은데 제가 요새 가장 좋아하고 또 주목하는 젊은 남성 작가입니다. 조대리의 트렁크는 가히 제 인생의 책이라고 할만하고요. 어디까지나 제 경우에 한정된 이야기입니다만, 조대리의 트렁크 단편집에 실린 소설을 읽을 때 저는 그 작품들이 픽션으로 보이지가 않더라고요. 그냥 내 이야기, 혹은 내 주변에 이야기들을 바로 내 시점에서 기록한 소설인 것 같았습니다. 소설 하나하나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 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저와 싱크로율이 높았던건 '루시의 연인'에 나오는 주인공이었습니다. 사실 이 친구는 별 문제가 없었어야 할 남성이죠. 하지만 소설의 설정상, 그는 불의의 사고를 당해 몸도 마음도 비틀린 인생을 살게 됩니다. 사실 저는 몸이야 말짱하지만, 그래도 그 친구가 보이는 행태가 너무 정겨웠어요. 남들이 보면 내가 하는 짓이 저럴지도 모르겠다 싶기도 하고.

 

네번째는 얼마전에 읽은, 브라이언 스테이블포드가 쓴 '어느 성화학자의 생애'의 주인공인 조반니 카사노바 입니다. 이름 자체에서부터 작정하고 이름 관련한 개그를 치겠다는 의도가 보이는데, 그 이름과 어울려서 전개되는 이야기도 참 우습고 재미있어요. 이 주인공의 경우는 위 캐릭터들과는 달리 장점이라고 할만한게 있죠. 머리도 좋고 재능을 이용해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외모나 성격에서 별 볼일 없었던 그는,  그것보다 더 치명적이게도 이성을 대할 때 어설펐던 그는, 연애 문제와 관련해 숱한 좌절을 겪습니다. 문체가 좀 건조하고 주인공과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서술하고 있어서 주인공이 처한 상황은 더 코믹하게 전달이 되는데, 그래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아저씨도 참 불쌍한 삶을 삽니다. 문체로만 봤을 때, 듀나님의 히스 올 댓이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식의 글쓰기가 나름 전통이 있는건가봐요.

 

 

더 생각해보면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저런 캐릭터가 많겠죠. 그래도 실제로 저런 사람을 만나면 나랑 너무 비슷해서 피할것 같습니다. 기분 나쁠거 같아요. 하지만 픽션에서 만날 때는 너무 반갑습니다. 나는 혼자가 아니야. 나만 병신은 아닌걸. 나처럼 사는 사람들도 또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 심정적으로 좀 편해져요. 쉽지는 않은 인생이지만 그들도 그 방면에서 편해졌으면 좋겠습니다. 혼자는 슬프고 외롭고 안타깝지만, 그래서 혼자가 되기 싫지만, 그래도 이렇게 사는 것도 인생이죠.

 

조동진씨가 하나음악 프로젝트 앨범 '바다'에 대해 코멘트 하시는 도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너무 좋아하는 말이라 글을 마치며 옮겨 봅니다.

 

"몇 번을 다시 들어보아도 수영 팬티나 땡땡이 옷을 걸치고 백사장을 달려가는, 그런 바다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래서 우리는 또다시 실패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실패란 성공의 어머니로서가 아닌, 실패 그 자체로 완전하다. 실패한 노래도 노래이며, 실패한 삶도 삶이기에..."

 

 

그럼요. 실패한 삶도 삶인걸요. 헤헤.

 

    • 지난번에도 댓글로 썼는데 롤리타의 험버트요. 범죄에까지 이르는 찌질한 남자 캐릭터죠. 실제로 배심원 앞에서 변명을 합니다만.

      제레미 아이언스님을 덧씌워서 덜 찌질하게 보였는지 몰라도 실은...
    • 제레미 아이언스가 분한 그 캐릭터는 너무 잘생겼잖아요. 성적 매력이 있으면 저희 찌질남 클럽에는 가입할 수 없습니다!!
    • 롤리타 읽다가 말아서 정확하게 기억은 안나지만 험버트가 잘생겼단 얘긴 안나온 것 같아요. 너그럽게 가입 받아주시죠. 'ㅂ'
    • 제가 책을 읽고 정확하게 확인을 해봐야겠지만, 어영부영 영화는 본거 같은데 꼬맹이한테 유혹당하는 캐릭터 아닌가요?
      우리 순결한 찌질남 클럽은 그런 파렴치 한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 후루야 미노루 책은 국내 발매된건 다 본 줄 알았는데, 낮비는 처음 듣네요.(나중에 봐야겠네요.)

      시가테라의 주인공도 찌질남 캐릭터라고 봐요. 하지만 이 친구는 막판도 아닌 초반부터 멋진 여자친구를 던져주더군요.

      그리고 그녀를 통해 점점 성장해가서 막판엔 꽤 괜찮은 어른이 된 듯한 걸로 마무리.(약간의 반전도 있고.)

      후루야 미노루는 찌질이, 루저 등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있는 양반인 듯.
    • 제 기준에서 시가테라의 주인공과 심해어의 주인공은 찌질남 캐릭터는 아닙니다. 1)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는 걸로 간주했어요. 연애나 여성에 대한 간절함이 없어요. 걍 어쩌다가 맺어지는 느낌? 사기 결혼도 당해보고 엠티를 가장한 청혼 여행 정도는 가봐야 찌질남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 우왕 가입조건 너무 까다로운 것 아닙니까.
    • 아, 귀여워요. 순결한 찌질남 클럽 ㅋㅋㅋ
      순결한 찌질남의 대표주자는 영화 '달콤살벌한 연인'에서 박용우씨가 연기했던 역할이 아닐까요?
      아까 낮에 케이블에서 스치며 봤던 '광식이 동생 광태'에서 광식이 역할도 그렇고...
      생활의 찌질남을 너무 잘 표현했어요. 하지만 그 분들은 잘 생겼죠. 네 안 생겨요.
    • loving_rabbit //그러니까 이러고 사는 사람들이 위대하다는 겁니다.(뭐래)
      Dear Blue // 맞아요. 저도 그 영화들 정말 재미있게 봤어요. 하는 짓 하나하나가 진짜 남일 같지 않았죠. 찌질남의 진정성은 디테일에서 드러나거든요.
    • 그러고보니 순결한 찌질남과 안 순결한 찌질남 두 종류가 있는 건가요.
      저는 연애의 목적에서 박해일씨가 연기한 주인공 얘기를 꺼내려고 했는데. *초만 넣어보자-_-;;; 부분에서 동행은 정말 불같이 화를 냈는데 저는 너무 웃기고 귀여웠어요. 그런데 그것도 박해일씨라 그렇게 느꼈을 가능성 99%.
    • 러빙래빗/거기서 박해일은 찌질남보다는 능글남에 가깝죠.능글~능글~

      찌질남 한명 더 추가. '최강전설 쿠로사와'의 쿠로사와씨.
    • 찌질남 한 명 더 떠올랐어요. 일본영화 '사랑의 문' 남주인공.
      전 만화는 본 게 없어서 자꾸 영화캐릭터들만 떠오르네요.
      '사랑의 문' 보면서 '세상에 저렇게 찌질할 수가!!'를 외쳤는데, 문제는 이 남자는 여주인공의 사랑을
      아주 담뿍 받는다는 거. 남자도 덕후, 여자도 덕후였거든요.
      결론은 찌질남은 자신을 많이 사랑해 줄 찌질녀를 찾아보세요^^(응?)
    • 여기서 '남'을 벗어버리면 찌질한 인간 군상이 남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그냥, 문득 책꽂이에 꽂혀 있던 고골의 ≪뻬쩨르부르그 이야기≫가 보이고, 여기에 수록된 단편 <외투>의 아까끼가 생각나서 끄적끄적...
    • 앗 이럴수가 험버트험버트는 적당히 유산도 물려받은데다가 키 크고 깔끔하게 생긴 인텔리 아닌가요. 그래서 아줌마들한테 인기 많았습니다.(첫 결혼 때도 아내가 그렇게 나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험버트 기준에선 일단;;) 본인도 본인의 장점을 알고 있었죠. 게다가 하숙집 아줌마를 꼬셔서 겨롱할 정도면 충분히 능력남입니다. 한 일이 찌질하고 상변태이긴 하지만요.
    • 백가흠 소설 "루시의 연인"에 나오는 그 남자주인공..은 과연 어떻게 변명의 여지도 없는 찌질남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마 제가 그 백가흠 작품이 실린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 읽었던 것 같은데요 세 명의 남자애들이 같이 무전여행하다가 서로 찌질한 이유로 찌질하게 싸우고 찌질하게 헤어지던 내용이 생각나네요.
    • 앗 요시미님 감사. 제가 제레미님 읽어주시는 오디오 북 들으면서 설렁설렁 읽었나봐요.
    • 잘생겨야 한다는 전제도 있긴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거예요.

      객관적으로 떨어져 보면 귀엽지만,
      막상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접근해 온다면 곤란할 거라는.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수많은 남자들은
      짝사랑을 취미이자 특기로 본의 아니게 삼게 되죠.
    • 글을 읽다보니 정말 의아해져요. 이만큼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이라면 굳이 잘생기지 않아도 충분히 매력을 느껴주는(?) 사람이 나타날 법도 한데....
      아니 대체 외모가 어느 정도길래......... 아아....
      아 전 칭찬하려고 글을 썼는데 왜 글이 엄한데로 가죠. ㅡㅜ
    • H A R I/ㅎㅎㅎ
      산체님 글만 보면 굉장히 매력적이신데,
      1. 글과 실제의 인격에 심각한 괴리가 있거나,
      2. 눈이 너무 높거나,
      3. 알고보니 13살이라거나?
      이런 건가요?
    • applegreent/ 아니요 ㅋㅋ 글을 조곤조곤 예쁘게 쓰신단 액면 그대로의 얘기였어요. 뒤에껀 농담 및 사족이죠~
      "그 매력을 알아보는 분이 나타나실거에요."

      알고보니 13살 ㅋㅋㅋ 이거 맘에 드는데요 ㅋㅋ
      • 아 저도 산체님 글 매력있다는 얘기 진심이예요. 얼마전에 쓰신 글은 너무 괜찮아서 일부러 글 쓴이 아이디를 찾아볼 정도였거든요 ; )
    • 험버트 험버트 책에서 직접 자기가 얼마나 잘 매력적으로 생겼는지 얘기해요ㅋㅋㅋ
    • 여기 찌질남 좋아하는 여자 추가요
    • 헉 래빗님 제레미 아이언스가 읽어주는 오디오북!! ㅠㅠㅠㅠ 오오..오오오!! 귀에 달달한 꿀이 들이부어지고 있는데 내용이 무슨 상관이겠어요 ;ㅅ;
    • 그런데 진짜 순결한 찌질남하면 저는 에반게리온의 이카리 신지가 떠올라요. 사실 제가 그 캐릭터 좋아해서 그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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