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에 가까운 가사노동력

    외국에 있을 때 무척 친하게 지냈던 지인이 있어요. 한국에서는 억대 연봉을 받으며 외국계 회사 임원을 지낸 커리어우먼이었죠. 불철주야로 바쁘게 일만 하고 살다가 갑자기 무한(?)의 시간과 공간이 주어진 외국생활에서 그이는 이제 온전히 자신의 몫으로 주어진 가사노동과 육아에 대한 스트레스로 우울증 비슷한 것을 앓을 지경이었더랬죠. 심지어 그이는 집안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결혼을 했고, 남편은 여지껏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너무 덤덤하게 말해서(차라리 뻐기는 말투였거나 그랬으면 짜증이 났을 법도 한데) 놀랄 지경이었거든요. 집안 곳곳에 먼지구덩이가 굴러다니고 설거지감이 쌓이고 세탁물이 넘쳐나도 그이는 손을 대지 않는다고 했어요. 하는 거라곤 그저 세끼 밥과 약간의 요리, 그리고 아이를 돌보는 정도. '가사노동의 원죄' 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고 싶다고 할 정도로 그 부분에 대한 스트레스가 그렇게 심한 사람은 처음 봤지요. 처음엔 그게 잘난 여자가 잘난값 하느라 그런 건가 싶은 삐딱한 생각을 했었는데 막상 가까이 지내보니 더없이 인간적인 사람이고 썩 괜찮은 사람이었는데도 극복 안 되거나 타협 안 되는 일 중 하나가 그것이었던가 봐요.    

 

    ... .... 남말 할 거 뭐 있나요? 가사노동에 대한 재능은 저 역시 백치에 가깝습니다. 전 정말 너무 할 줄 아는 게 거의 없고(사실 하고 싶지도 않아요-_-). 외국생활 할 때, 진짜 주부 9단들 틈에서 살림의 여왕들이 벌이는 사투를 너무 가까운 데서 지켜볼 때마다 저는 혀를 내둘렀거든요. 사실 그 분야가 은근히 또 암투와 경쟁이 살벌한 곳이라 내로라 음식 좀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음식 맛볼 때 맛있단 말 절대 안해주죠. 재테크, 아이를 일류대 보내는 법, 남편 승진 시키는 법, 이런 건 오히려 제게 너무 실감도 안나는 일이었고 되려 기억이 남는 건, 흰빨래를 눈부시도록 희게 빠는 법, 음식물 쓰레기를 냄새 하나도 안나고 완벽하게 처리하는 법, 손에 닿지 않는 창틀의 먼지까지 말끔하게 닦는 법, 욕실을 무균실처럼 청결하게 유지하는 법, 한 가지 재료로도 열 가지 이상의 레시피가 가능한 메뉴를 개발하는 것 기타등등 기타등등.    

 

     김치 하나를 썰어도 싱크대가 벌겋게 물들고, 반찬통 한 귀퉁이는 늘 덜 닫혀서 들떠 있고,  청소를 해도 뒹구는 돌처럼 먼지뭉텅이가 나오죠. 뭔가 늘 쏟고 흘리고 떨어뜨리고 깨고 놓칩니다, 저는. 예전엔 덜렁대는 성격이라 그런가 싶었던 일이 고질적인 게 되니 이게 또 은근 스트레스고요. 냉장고 청소를 cf에 나오는 수준으로 하고 사는 여자들, 집안을 유리알처럼 해놓고 사는 여자들, 베이킹에 능하고 손재주 좋은 여자들, 효재나 마사 스튜어트 뺨치게 살림 잘 하는 여자들 볼 때마다, 이젠 한숨이 나와요. 부럽다기보다는... 많이 복잡힌 심경이 들죠. 제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음식의 간을 기막히게 잘 맞춘다는 것 정도? 어떤 음식이든 한 번 먹어보면 2% 부족해도 흉내는 낸다는 것? 김치를 잘 담는다는 것? 하하. 어디 명함을 내밀 수도 없는 수준이지만요. 어쨌든 저는 요리와 설거지 둘 중 하나만 하라고 하면 단연 요리에요. 몇 십인분 요리라면 밤을 새고서라도 할 용의도 열정도 있는데 설거지 하라고 하면 절망. 이걸 이렇게 말하는 건 심한 비약이지만 제가 문제해결능력이 떨어지는 창의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_-. 아, 빨래는 좋아해요. 광범위하게는 옷마다의 소재와 특성에 맞춰 케어하고 보관하는 일이죠. 신발도 마찬가지. 가방도 그렇고!

 

    

    • 1. 살림은 단순반복과 겨루는 일이거든요.저도 설거지 싫어 죽겠어요.해도해도 내일의 설거지가 저를 ㄱㅖ속기다리죠. 하하하.ㅜㅜ
    • 맞아요. 저는 남들 다 쉽다는 단순노동이 그렇게 어려운 구제불능인가 봐요.
    • 1. '세끼 밥과 약간의 요리, 그리고 아이를 돌보는 정도'라는 구절 앞에서는 절대로 '그저'라는 수식어가 와서는 안 됩니다. 삼시 세 끼는 김경미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콘크리트처럼 닥쳐옵니다. 육아도 -육아영재성 따위를 지닌 소수자가 아닌 한-지독한 강도의 정신+육체 노동이구요. 이미 저 정도 일 하고 계시다면, 청소와 빨래일 정도는 손 놔도 될 것 같아요.
      • 읽으면서 저도 의아했던 부분. 할 거 다 하는데 뭘 안 한다는 거지?
    • 아, 물론이겠죠. 먹고 돌아서면 바로 밥때 된다고. 무척 중요하고 너무 힘든 일. 게다가 육아까지. 일을 하느라 이 부분에서 많이 놓여난 상태였다가 본격적으로 전담하게 되면 일하던 여성분들은 너무 힘들어 하시더라구요. 야근, 특근해도 일하는 게 더 쉽고 편하다는 말도 많이 들었죠.
    • 성공'한'까지도 아니고, 성공을 꿈만 꿨던 여성들이 전업주부가 되고 심각하게 우울해하는 사례도 종종 봤어요. 모두 제 친구들이었습니다. 사회 진출을 포기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진짜 가사노동 때문에 우울해 하더군요.
    • 그게... 정말 가사노동과 그 의미를 폄하해서가 아니라 진짜 너무 어렵고 힘든 일이라 여기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럴 바엔 차라리 체념하고 난 원래 지저분하고 털털하니까 그러면 좋은데 그렇게도 안 돼서 눈에 걸리고, 게으름이든 뭣 때문이든 뜻대로는 안 되고의 악순환이랄까요. 게다가 그건 월급도 없;;;
    • 문제는 못하면 그냥 손 떼고 다른사람 시키면 그만인 일인데..주부가 손을 떼면 따가운 눈총이 날아온다는거.요새는 그래도 많이 나아진거 같은데 여전히 여자가 살림 못한다고 하면 안좋게 보는 시선이 대부분이죠. 그러니 억지로들 하는거고. 스트레스 받고.게다가 이거 한다고 진급을 한다거나 연봉이 많이진다든가 누가 칭찬해 준다든가하는 가시적인 성과가 거의 안보이니까. 박탈감이 심하죠. 그냥 희생하는것 같은 느낌을 지우기가 힘든게 문제에요.
    • 맞아요. 그래서 그분도 비용을 지불해가며 일주일에 두 번씩 사람을 썼어요. 그런 것조차 남들 입에 오르내릴 수 있는 분위기였음에도 눈치 안 보고 사람 알아보고, 또 외국인도우미에게도 인간적이고 친절하게 대하는 걸 보고 사람들도 아무말도 못하더군요. 어쨌든 제대로하려고 마음먹으면 도대체가 끝이 없다는 엄청난 가사노동의 딜레마...
    • 가사노동은 회사일과 비교도 안 되게 힘들더이다(육아포함 가사노동). 저도 빡세게 야근하고 출장 다녀도 봤지만 집안일은 아득하기만 합니다. 특히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 정도. 가끔 아빠한테 옛날에 돈 벌어온다고 엄마한테 큰소리친 거 잘못한거 반성하시라고 엉뚱하게 화풀이합니다.
    • 가사노동도 다른 일들 처럼 프로세서(?)가 내장이 안되어 있으면 불가능한 일이더라고요. 어떤 사람에게 어떤 일은 죽어도 안되는 일인 것 처럼 가사노동 역시 가사노동에 대한 프로세서가 내장이 안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애초에 가사노동이라는거 자체가 때려죽여도 늘지 않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더라고요. 정말 부지런하지 않으면 잘 안되는 것도 있고요.
    • 쿠델카님은 살림 잘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그저 위생이나 꼼꼼함 등의 문제만 있을 뿐.
      단순한 업무는 누굴 시켜도 되는 거잖아요.
      저는 설거지는 좋은데 요리는 정말 못합니다.저같은 사람보다 훨씬 낫죠.
    • 글과 댓글들 읽으며 진짜 큰힘을 얻습니다 T-T
      가사에도 자질이 필요하다는 말 실감하구요, 무엇보다 성과는 없고 숙제만 있는 가사를
      전담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많이 우울했는데,글과 댓글들을 읽으며 이해 받는 기분입니다.
      저도 왜 움직이기만 하면 뭘 흘릴까 늘 궁금했어요. 요리는 레서피 보고 따라하긴 하는데
      청소가 너무 어려워요 하기도 싫고요. 왜 자주 하는 거 같은데도 깨끗한 상태가 유지되지 않는지 신비롭고.
      무엇보다 능률이 안 오르니, 이런 단순반복도 나는 잘해내지 못하는구나 싶기도 하고
      또 기를 쓰고 열심히 해서 잘해낸다고 해도 그 사실에 큰 자긍심을 느끼지 못할 거 같아요.
      생각보다 시간도 많이 잡아먹어서 해 놓은 건 없는데 시간은 훌쩍 가 있구요.
    • 댓글 동감 ㅜㅜ 전 청소 가르쳐주는 학원 있으면 다닐 용의 있음! 그래도 비 들고 걸레 들게 하는 의욕을 심어주는 약은 없겠지...
    • 저는 이날 이때껏 궁금한 것이, 왜 가사노동에 관해서는 여자들이 더 엄격하고 냉정할까 하는 부분요. 다른 사람들은 다들 살림이 힘들지 않나? 그러면 더 이해하고 공감할 것도 같은데 현실에서는 정말 게으르고 개념없는 녀자로 쉽게도 단정해버리죠. 전업주부가 그러면 돈도 안 벌면서 직무유기하는 용서못할 죄인, 직장다니는 경우는 돈도 좋지만 본분은 역시 아녀자라는 걸 상기시키거나 또는 직업 때문에 소홀하기 쉬운 가사노동의 완성도에 대해 험담하기 일쑤. 여기에 아이들 육아문제까지 개입되면-이를테면 직장맘 아이들은 역시 어딘가 산만하고 지저분해-진퇴양난인 것을 일일드라마 연속극보다 더 실감나게 보고 있습니다. 되는대로 설렁설렁 하고는 있지만 청소와 설거지는 정말 없어져버렸으면!!!
    • ㄴ나는 하는데 너는 왜 안해!!라는 심리 또는, 사회분위기에 편승해서 옳은 소리를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거 아닐까요. 정말 가사노동은 성과대로 인정해주지 않는 특이한 노동분야입니다.
      아우, 이런 주제 좋아요. 저는 남편께서 돈을 못 벌어오셔서 살림에 대해 긴장감 많이 내려놓은 케이스.....
    •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인식의 변화는 여전히 이인삼각같이 삐그덕거리는 듯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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