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블랙 스완 봤어요.(스포일러 많아요)

다른 후보작 하나 본 게 없지만, 나탈리 포트만이 아카데미상을 탈 거라는 것에 제 통장잔고 모두를 걸 수 있습니다. 그냥 그러지 않을 수가 없어요.


영화의 이야기에는 새로울 게 하나 없습니다. 상투적이고 도식적이고... 그냥 그런 상황에서 그런 사람이 할 법한 그런 일들을 보여주는 것 말고는 더 하는 게 없잖아요? 영화를 자극적으로 받아들이려 노력해봤습니다만, 자꾸 어디서 한두 번 쯤 들어본 얘기 같단 생각을 했습니다. 일인칭 미치광이 플롯이 조금 튀긴 하는데, 이 또한 비슷한 플롯을 대라고 하면 굳이 40년전으로 돌아가 로만폴란스키 영화들을 억지로 기억해내어 갖다 붙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어디서 본 듯합니다. 저야 로만 폴란스키의 테넌트를 인상적으로도 봤고 좋아도 하기 때문에 굳이 다른 영화를 예로 들고 싶지 않습니다만 - 딱히 떠오르지도 않네요; 아무튼, "사실 도입부의 꿈 장면만으로도 이 영화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지는 모두 알고 계셨잖아요? 혹시 저만 그런 건가요?"


영화를 보면서 로만 폴란스키 영화들과 비교할 영화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굳이 플롯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그 영화들을 꺼내 비교해야 하는 거죠. 오히려 저는 이 영화가 아바타 같은 영화들과 비교할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순전히 영화적 체험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라고 생각하거든요.


일종의 프로파간다 영화라고 생각해요. 치밀한 논리로 주제의 본질을 탐구해서 관객이 이해하게끔 하려는 영화가 아니라 단순히 끔찍한 주제의 현상을 플롯과 이미지를 사용해서 관객이 선동되게끔 하려는 영화라는 거죠.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데뷔작인 레퀴엠에서도 같은 인상을 받았는데 그 영화를 봤을 땐 사실 '감동했어,'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시간이 지나니까 그 영화를 왜 감동하며 봤는지 모르겠더군요. 단 하나, 보는 내내 끔찍했다는 기억 밖엔 없어요 - 그러고보면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호러물 감독... 아마 블랙 스완도 비슷한 처지가 될 것 같습니다. "좋게 봤는데, 어디가 어떻게 좋았는지는 기억나지 않고 그냥 끔찍했어!"


프로파간다 영화라니... 좋지 않은 평가인 거 맞아요. 태생적으로 아무리 잘해도 뛰어넘을 순 없는 선이, 한계가 있다는 얘기니까요. 그런데 사실 꼭 그렇게 주제의 본질을 탐구해서 어떤 성취를 이루어 내는 것만이 예술적 성취인 건 아니잖아요. 때로는 그런 것 없이도, 오히려 그런 것이 없어야, 할 수 있는 성취도 있습니다. 재미있는 생각이 하나 듭니다. 블랙 스완은 '완벽'에 도달하기 위해 테크닉 하나 하나에 집착하는 발레리나에 대한 얘기입니다. 단장은 발레리나에게 말하죠. 완벽은 테크닉을 말하는 게 아니라고요. 그리고 요구합니다. Lose yourself. 발레리나가 그랬듯이 이 프로파간다 영화는 그 가르침을 그대로 따라갔습니다. 오로지 감각에 몸을 싣는 거죠.


그렇게 해서 탄생된 영화의 감각적 체험은 대단합니다. 특히 30분은 되는 듯한 후반부의 클라이막스는 카메라가 무대 위를 날라다니며 정신을 쏙 빼놓게 영상을 잡아놓은데다가 차이코프스키의 고전과 나탈리 포트만이 뿜어내는 존재감으로 숨이 막힙니다. 저는 감상하는 자체가 황송하다는 생각에 등이 꼿꼿해졌어요... 이 비문투성이 두서없는 낙서는 사실 12시간 전에 쓰려고 했던 거였어요. 그런데 블랙 스완을 보고 나니까 심신적으로 지쳐서 쓸 여유가 없더라고요... 이 정도입니다, 블랙 스완의 영화적 체험의 힘이. 이런 체험을 했으니 블랙 스완을 아바타 같은 순수 영화적 체험 영화들과 비교하고 싶어지는 건 당연하지요.


나탈리 포트만이 오스카를 받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은 이 영화적 체험이라는 게 극적으로 기능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배우들, 특히 포트만의 연기와 이미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나마 있었던 마지막 개연성 마저 우걱우걱 씹어먹어버리는 장면인데... 이 장면은 오로지 주인공에게 비극적인 결말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장면이죠. 아무튼, 포트만이 오스카를 받지 않는다면 제 통장 잔고로 나탈리 포트만을 트리뷰트하도록 하겠습니다, 흠흠.


    • 전형적이기도 하지만 상당히 리얼한 뭔가들이 잔뜩 들어있어서 놀라웠어요. 그런데 그게 말이 되게 꽉 짜여있지 않고 마구잡이로 우겨넣어진 듯한 느낌을 받았죠. 예술적인 체험 보다는 병적인 상태의 체험 쪽이 더욱 인상깊었는데, 레퀴엠을 안 봤지만 궁금해지는 이유예요. 블랙 스완에서, 말씀하신 프로파간다는 그냥 쉴드가 아닐까 싶었거든요.
    • 그러고보니 이 영화 각본 꽤 괜찮아요. 이야기는 작위적이지만 캐릭터나 그들의 동기는 진짜 같아보여요.
      레퀴엠은 이 영화보다는 덜 재미있어요. 일인칭 미치광이 플롯이 적어서 이미지의 공격이 그만큼 덜해요.

      제가 프로파간다라는 단어를 사용한 건 그 선동적인 이미지 때문이죠. 프로파간다 영화를 선동 영화로 바꿔 읽는 게 문맥상 더 맞아요.
    • 같은 선상에 놓였던 미키루크가 자신의 처지가 더 처절하게 투영된 캐릭터를 연기하고도 아카데미에서 상을 못받았지요.

      그리고 로만스키영화들 보다는 아바타같은 체험을 위한 영화..같지는 않습니다.; 주인공의 개인적인 감정상태가 그대로 드러나는 연출이긴 하지만,주인공 자체에게 이입하기엔 정황들이 대놓고 이질적이고 비상식적이며 오락가락하죠..
    • 제 경우엔 [아바타]에 비한다면 [블랙 스완]이야말로 훨씬 더 '순수 영화적 체험'에 가깝다고 생각이 드네요. 3d 안경 없이도 오감을 저릿저릿하게 만들기 때문에..
      • 더 가까울 수도 있죠.
    • 레슬러는 안 봐서 모르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이번엔 더 수상할 가능성이 높겠어요.
      모든 분들의 감상이 저의 감상과 같지는 않겠죠. 제게도 재감상을 통해 변할 수 있는 감상이고요.
    • 아..확률상 더 높아질수는 있겠네요.진짜.
      근데 통장잔고까지 거시지는 말라는 의미에서;
    • 통장 잔고가... 얼마 안 돼요... 그래서 걸 수 있는 거죠... 엉엉...
    • 근데 레슬러 당시의 미키루크의 상 받을 분위기보다,

      이번에 포트만의 상 받을거 같은 분위기 형성이 좀 더 그럴듯해서... 전 받을거 같아요.
    • 새벽에 비몽사몽 답글을 다느라 제가 의도하신바를 정확히 이해를 못했던 것 같아요. 다시 읽고 이해했고 대부분 공감합니다.
    • 아니에요, 제 단어 선정에 문제가 있던 건데요. 귀찮아서 써놓고 안 고친 것이니 제 문제.
    • 동감합니다. 근데 한 가지...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데뷔작은 레퀴엠이 아니라 파이죠.
    • 아, 파이가 장편 영화군요... 전 그 영화 단편인 줄로만 알았어요.
    • 아직 블랙스완을 보지 않았지만 공감합니다. 저는 레퀴엠이 아닌 데뷔작인 파이가 기억에 남아요. 플롯은 마찬가지로 간단한데, 미친 수학자 이야기이지요. 영화관에서 봤는데 영화적 체험을 단단히 했지요. 방법은 다르지만 라스 폰 트리에에게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지요. 특히 어둠 속의 댄서가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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