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 동안 본 영화들에 대한 잡담... (사진들 다시 올렸고 마지막엔... )

 

 [평양성]

본 영화를 보기 바로 직전에 뒤늦게 전편인 [황산벌]을 봤었는데, 요란하고 가끔씩 닭살 좀 돋는 코미디를 하다가 어느 새 예정된 결말에 들어오면서 생각보다 많은 걸 하는 게 제 마음에 들었습니다. 감독 이준익이 백제에 이어서 고구려 이야기를 다루는 [평양성]도 마찬가지로 웃기는 구석들이 많지만, 본 영화는 전편에 비해 부족한 점들이 많습니다. 역사적으로 비교할 때 고구려 멸망은 백제 멸망보다 덜 심심한 것도 그런데, 캐릭터들 간의 균형은 그리 잘 잡혀 있지 않고, 결말은 의도는 좋긴 하지만 작위적인 티가 나니 거슬립니다. 뭐, 그래도 이문식이 연기한 거시기는 여전히 재미있는 캐릭터이고 영화는 심심하지 않으니 평균 수준에서 일관성 있게 전진하는 이준익이 신라와 당나라 간 다툼 때문에 그를 또 징집해도 전 불평하지 않으렵니다. (**1/2)

 

[송곳니]

올해 아카데미 외국어상 후보에 오른 그리스 영화 [송곳니]는 ‘올해의 막장 홈스쿨링 영화’로 뽑혀도 손색없는 희한한 영화입니다. 영화 속의 가족은 아버지에 의해 엄격히 통제된 고립된 환경에 놓여 있는 가운데서 황당한 방식으로 교육받는데, 여러 단어들을 실제와 전혀 다르게 규정하는 것으로 시작으로 해서 밖의 ‘괴물’에 대해 무릎 꿇고 개처럼 짖게 하는 등의 괴상하고 별나고 잊지 못할 순간들이 그들 일상 속에서 차례차례 이어집니다. 이런 기가 막힌 광경들 뒤의 동기를 대답해주지 않는 가운데 영화는 건조하고 차갑지만 감독 지오르고스 란디모스는 이 요지경을 무덤덤하고 접근 방식 속에서 흥미롭게 보여 주고, 그러다가 이 폐쇄적인 환경에서 조만간 일어나게 될 일이 결국 일어납니다. (***)

 

[소셜리즘]

작년에 아카데미 공로상을 받은 고다르 감독의 신작 [소셜리즘]은 깐느 영화제에서 개봉될 때도 로저 이버트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을 난감하게 했고 저도 그렇습니다. 처음엔 항해 중인 배에서의 이 모습 저 모습 보여주는 걸로 시작해서 보는 사람에게 영화는 많은 영상 조각들을 던져대지만, 결국에 가서는 남는 게 없습니다. 고다르 감독님, 영화에서 ‘Quo Vadis, Europa?"라고 노골적으로 질문을 던지시는데, 저도 감독님께 그 질문 좀 하고 싶습니다. 보나마다 “No Comment"라고 하시겠지만. (**)

 

[이고르와 귀여운 몬스터 이바]

[이고르와 귀여운 몬스터 이바]는 사악한 과학자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주인공의 이야기인데, 본 영화는 국내에 더 늦게 개봉되었지만 [메가마인드]나 [슈퍼 배드]보다 더 오래 전에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팀 버튼 영화들이 연상되는 스타일로 만들어진 배경 속에서 벌어지는 별난 광경들에 비해 이야기가 너무 익숙한 게 탈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쏠쏠한 재미가 있더군요. (**1/2)

 

 

[Welcome to the Rileys]

더그 라일리는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살고 있는 건실한 중년 사업가입니다. 그와 그의 아내 로이스은 부족할 것 없지만 그들의 인생은 딸의 죽음 이후로 황량해졌고 그들의 관계는 소원해진 지 오래입니다. 로이스는 집에 틀어박혀 있고 더그는 동네 식당 여종업원과의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뉴올리언스에 컨벤션 참석 차 간 더그는 우연히 십대 스트리퍼 맬로리와 접하게 되는데, 그는 문제 많은 그녀를 도와주고 싶기 때문에 뉴올리언즈에 잠시 머물러 있기로 결정하고, 그런 갑작스러운 결정에 로이스는 마침내 집 밖으로 나와서 뉴올리언즈로 향합니다. 뻔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감독 제이크 스캇(리들리 스캇의 아들이자 조단 스캇과는 남매 지간입니다)은 그 속에서 작고 따뜻한 순간들을 잡아내고, 주연인 제임스 갠돌피니와 멜리사 리오는 소원해진 보통 남편과 아내로 좋은 가운데. 멜로리를 맡은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그녀가 조속히 트와일라잇에서 벗어나야 함을 다시 한 번 확실하게 보여 줍니다. (***)

 

[생텀]

이야기나 캐릭터도 형편없는 것도 그런데 3D 효과도 나쁘니 정말 불쾌한 경험이었습니다. 3D 효과로 자연의 장대함을 보여주겠다는 목표야 있었겠지만, 3D의 한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으니 화면 내에서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상영 시간 내내 드는 것도 부족해서 갑갑하기 까지 하니 안경 벗고 싶은 충동이 계속 들었습니다. 그래서 간간히 벗어봤는데 영화가 좀 더 나아져 보이더군요. 젠장, 아무리 동굴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어둑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이러니 베르너 헤어초크 감독의 동굴 다큐멘터리가 빨리 보고 싶을 지경입니다. 그 영화에서도 3D를 사용해서 동굴을 보여주었다는데 그 경우엔 효과적이라고 들었거든요. (*1/2)

 

[라푼젤]

작년 초엔 전형적인 90년대 디즈니 애니메이션인 [공주와 개구리]를 보았는데, 또 다른 전형적인 90년대 디즈니 애니메이션 이야기인 가운데 3D 디지털 애니메이션로 그려진 [라푼젤]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전형적이긴 하지만 [공주와 개구리]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야기와 캐릭터들도 좋은 편인 가운데(사악한 새엄마는 여전히 사악해도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한 구석이 있습니다), 앨런 멘켄의 노래들과 스코어는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즐거우니 주위 관객들과 함께 생각보다 많이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3D 효과는 한계야 당연히 있지만 [라푼젤]은 요 근래 본 3D 애니메이션 중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경험을 제공합니다. 요약하자면, 그 풍성하고 곱고 기다란 다기능성 금발 머리카락들 말고도 좋은 볼거리들이 많습니다. (***1/2)

 

[It's Kind of a Funny Story]

우리의 주인공인 십대 소년 크레이그는 자살 충동이 있다는 이유로 충동적으로 정신병동에 자진 입원합니다. 금세 그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닫지만 자진 입원한 이상 그곳에서 어느 정도 지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얼마 간 환자 신세가 되고 그 동안 그곳에 입원한 사람들과 가까워져 갑니다. 네드 비치니의 자전적 소설을 원작으로 한 본 영화는 마치 [처음 만나는 자유]의 남동생 버전 같습니다. 십대 주인공이 정신병동에 입원한 신세에 놓이면서 그곳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는 설정만 들어도 딱 그 영화가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지요. 하지만, [하프 넬슨]과 [슈거]의 감독인 안나 보덴과 라이언 플렉은 진부한 드라마를 할 사람들이 아니고 그들은 소박하면서 진솔할뿐더러 제목대로 웃기는 드라마를 만들었습니다. 키어 길크리스트는 좋은 주연이고 주변에서 과시 없이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는 엠마 로버츠, 바이올라 데이비스, 제레미 데이비스와 같은 조연 배우들도 훌륭한데 특히 재크 갈리피아나키스는 진지한 연기를 할 기회를 전혀 낭비하지 않습니다. (***)

 

 

[만추]

중국계 미국인인 애나는 살인죄로 감옥에서 복역 중인 죄수인데 가족이 낸 보석금 덕분에 잠시 출소하게 되어 시애틀로 향하고 그러다가 우연히 한국인 청년인 훈을 만납니다. 잠시 만의 만남인 것 같지만 그들은 나중에 또 다시 만나고 그리하여 그들은 시애틀 시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닙니다. 현빈 덕분에 좀 더 많은 관객들에 다가갈 수 있게 된(그리고 아마 그만한 관객들을 실망시켰을) 영화인 [만추]는 이것저것 하면서 주연 배우들과 함께 여유롭게 돌아다닙니다. 그들 중엔 좋은 것들도 있고 그리 효과적이지 않은 것들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습니다. 현빈은 역할 설정이 그렇다 해도 좀 어색하지만 탕웨이와 잘 맞는 편이고 탕웨이는 비오거나 구름 낀 날씨 속의 시애틀과 함께 이 분위기 좋은 영화의 최대 장점입니다. (***)

 

 

 

 

[루르드]

치유될 희망을 가진 순례자들이 모여드는 성지인 루르드를 배경으로 영화는 그들의 여정 절차를 매우 차분하게 지켜보고 그러다가 어떤 일이 그 중 한 명에게 생깁니다. 이 일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 영화의 객관적인 태도를 통해 여러 생각들이 자극되기도 하는 가운데, 이 절차를 담담하게 지켜보다 보면 그 속에서 필사적으로 믿거나 아니면 그리 진지하게 믿지 않은 사람들이 섞여 굴러가는 게 보이고 일정이 완료될 때의 모습은 그 차분함에도 불구 왠지 모르게 따뜻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신의 뜻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말은 공허해도, 같이 모이면 영생은 아닐지언정 일시적으로 편안하긴 합니다. (***1/2)

 

 

 

 

[패스터]

[패스터]는 전형적인 복수극 영화입니다.. 꽤 오래 감옥에 있어온 주인공은 나오자마자 즉시 자신의 차를 타고(폐차장에 잘 보관되어 있습니다) 옛날 자신이 당한 일에 책임이 있는 작자들을 하나씩 처단하기 시작합니다. 이러니 경찰은 그를 쫓을뿐더러 누군가에게 의해 고용된 폼 잡는 킬러 한 명이 호적수를 만난 재미에 그를 열성적으로 쫓아다닙니다. 드웨인 존슨은 그 덩치에 걸맞게 위협적인 주인공이고(그런데 왜 이 영화에서 헤어 스타일리스트가 필요했을까요?), 빌리 밥 쏜튼을 비롯한 다른 배우들도 제각기 할 일을 잘 하고, 화면 속 분위기는 말끔하지만, 영화는 장르 공부를 한 정도 이상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1/2)

 

 

 

 

[페어 게임]

폴 그린그래스가 [그린 존]을 만드는 동안 [본 아이덴티티]의 감독 더그 라이만도 부시 행정부를 매섭게 비난하는 드라마를 만들었는데, 요동치는 [그린 존]과 달리 [페어 게임]은 차분한 방식으로 부시 행정부의 추악한 면에 주목합니다. 얼마 전 나온 영화 [Nothing but the Truth]에 약간 영감을 주기도 했던 조 윌슨과 발레리 플레임의 실화에 바탕을 둔 본 영화는 일 잘하는 전문가들인 이 맞벌이 부부의 인생을 어떻게 부시 행정부 인간들이 망쳤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아내만큼이나 이라크에 WMD가 있다는 게 거짓말이란 걸 알고 있었던 윌슨이 부시 행정부의 행태에 열 받아 신문에 자신의 글을 기고하니 곧바로 자신의 아내가 CIA 요원이란 사실이 폭로되었고, 그에 따라 둘은 아주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영화는 이들이 겪는 사적 고통을 정직하게 화면에 담아내었고, 숀 펜과 나오미 왓츠는 그들 인생의 최대 시련 속에서 갈등하고 충돌하는 남편과 아내로써 훌륭합니다. (***)

 

 

[플리즈 기브]

뉴욕 맨하탄에 사는 알렉스와 케이트는 고인 유족들로부터 자신들 가구점에서 비싸게 팔 만한 가구들을 싼 값에 사곤 하는 부부입니다. 자신이 상대할 사람들을 속인다는 죄책감이 드니 케이트는 남들에게 베풀려고 늘 노력하지만 정작 자신의 딸 애비와는 소통이 안되고 딸이 필요한 게 뭔지 이해 못하는 엄마이지요. 이런 그들이 한 날선 성격의 할머니의 이웃이 되고 그녀를 보살피는 손녀들과도 알게 되면서 이런 일 저런 일들이 일상 속에서 일어납니다. 감독 니콜 홀로프세너는 별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가운데 이리저리 굴러가는 동안 서서히 변하는 그들의 모습을 섬세하게 잡아내었고 캐서린 키너, 레베카 홀, 올리버 프랫, 아만다 피트를 비롯한 배우들도 보기 좋습니다. (***)

 

 

 

[Night Catches Us]

감독 타냐 해밀턴의 데뷔작인 이 조그만 캐릭터 드라마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과거가 자신들을 잊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지미 카터가 막 집권하게 된 1970년대에,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자신의 동네에서 한 동안 모습을 감추었던 마커스는 돌아오자마자 별로 곱지 않은 시선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자신이 사랑하는 패트리샤의 남편이자 친구였던 닐의 죽음에 관련 있다는 소문 때문인데, 60년대에 이들 셋은 과격 운동 단체였던 블랙 팬더의 일원들이었고 그러다가 일이 험악하게 돌아가게 되었었지요. 여기저기서 배신자 소리 들어도 마커스 본인은 그걸 굳이 해명하지 않으려고 하고 그런 동안 그는 다시 패트리샤와 가까워지고 항상 자신의 친아버지에 대해 궁금해 왔던 패트리샤의 딸은 그에게 호감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과거는 다시 고개를 쳐들고 갈등이 싹을 틉니다. 간간히 그 험한 시절을 자료 화면으로 조명하는 가운데 해밀턴은 캐릭터들에 잔잔하게 집중하고 안소니 매키와 케리 워싱턴은 주연들로써 훌륭합니다. (***)

 

 

 

 

[The Yellow Handkerchief]

미국 루이지애나를 무대로 한 본 영화는 꽤 뻔한 설정을 갖고 있습니다. 막 교도소에서 출소한 주인공 브렛은 우연히 십대 소년 마틴과 십대 소녀 고디를 접하게 되고 서로에게도 낯설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로드 무비의 주인공들이 됩니다. 브렛에겐 아픈 과거가 있다는 게 암시되니 그걸 마틴과 고디에게 털어놓는 건 시간 문제이지만, 영화는 느긋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윌리엄 허트는 주인공의 아픔과 후회를 과시 없이 그려냅니다. 에디 레드메인은 20대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십대 캐릭터 같고, 크리스틴 스튜어트야 여전히 자신이 트와일라잇 시리즈에게 너무 과분한 여배우임을 보여주고 있지요. (***)

 

 

 

[메커닉]

본 영화가 리메이크작이란 얘기를 듣고 호기심에 찰스 브론슨 주연의 1972년 원작 영화를 봤는데, 일단 리메이크 버전은 원작 줄거리에 비교적 충실한 편입니다. 사람 죽이는 일에 철저한 직업 정신으로 처리해 가는 킬러가 개인적으로 좀 힘든 임무도 착실히 처리한 후 얼마 안 되어서 자신의 친구 겸 스승 아들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를 끌어 들어서 일을 가르치려고 하는 가운데, 자신이 소속된 회사에서 이를 영 안 좋게 보기 시작합니다. 원작은 이야기 등 여러 면들에서 그렇게 맘에 들지 않아도 그럭저럭 볼만한 영화였지만, 리메이크 버전은 줄거리만 따라가고 요란하게 일 벌이느라 바빠서 텅 빈 느낌만 납니다. 적어도 이런 B급 액션 영화에 익숙한 제이슨 스태섬이나 자신들 역할에 꽤 진지하게 몰입하는 상대역 벤 포스터나 조연으로 나오는 도널드 서덜랜드는 괜찮지만 말입니다. (**)

 

 

[혈투]

[혈투]는 참 찌질한 개인적 이유들 덕분에 참 한심한 짓들을 저지르는 캐릭터들의 대립을 갖고 이야기를 펼칩니다. 광해군 11년, 명나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보내진 조선 군대가 청나라 군대에게 아작나고 여기서 세 사람들이 살아남게 되는데 이들은 그 추운 만주 벌판을 이리저리 떠돌다가 겨우 버려진 객잔에 도착합니다. 한데, 군장인 헌명이 옛날에 저지른 일을 부장인 도영에게 고백하는 바람에 둘은 원수지간이 되고 전투 중 도망가서 겨우 살아남은 두수는 이 둘 사이에서 살아남으려고 애씁니다. 헌명과 손잡자니 잘못하면 그에게 죽을 수도 있지만 도영도 그리 좋은 상대는 아닙니다. 그리고 평민이 두수는 양반들인 이 둘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처음엔 플래시백이 좀 거슬렸지만 이 도구를 통해 영화 속 주인공들 간의 갈등은 서서히 가면 갈수록 감독/각본가 박훈정이 각본이 쓴 [부당거래]의 사극 버전 같아집니다.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이 인간들이 아무리 서로 이겨먹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쳐도 승자에게도 미래는 없다는 게 가면 갈수록 확실해지니 말입니다. 나중에 좀 감상적으로 간다 싶지만 다행히 영화는 배경에 걸 맞는 냉혹함을 잃지 않고 이야기를 갈 데까지 만큼 이끌어가고 세 주연배우들도 각자 할 일을 다 합니다. (***)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

언제가 1978년 원작 영화를 봤는데, 왜 로저 이버트와 진 시스켈이 그렇게도 싫어했는지 이해가 갈만했고 저도 무지 싫어했습니다. 전반부는 시골로 휴가 온 도시 출신 여주인공이 악당 4인조에게 잔인하게 농락당한 후 무참히 강간당하는 걸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그런 다음엔 후반부에서 여주인공이 금세 몸을 추스린 후 자신을 능멸한 인간들에게 처참하게 복수한다는 걸 마찬가지로 적나라게 보여주는데 그게 정말 전부입니다. 이야기와 캐릭터 묘사는 포르노 영화 수준으로 허접하고 엉성하기 그지없으니 더 열 받을 수밖에 없었지요. 하여튼 간에, 무슨 생각에서인지 몰라도 이 영화는 최근에 리메이크되었고, 최근에 만들어진 [왼편 마지막 집]처럼 리메이크 작은 매끈하게 다듬어져 나왔습니다. 호기심에 한 번 봤는데, 그 결과는 원작보다 더 역겨움이 확연하게 보일뿐더러 더 못되게 잔인하기까지 합니다. 제 조언: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영화에 시간 낭비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Zero Star)

 

 

 

[듀 데이트]

설정만 봐도 [자동차 대소동]이 금방 떠오르는 본 영화의 문제점은 짜증나는 캐릭터가 영화가 끝나도 가까이 할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맡은 주인공 피터는 곧 출산할 아내 곁에 있기 위해 비행기를 타려다가 그만 운 없게도 지독한 민폐 덩어리인 이든과 엮이게 되고, 이들은 로스앤젤레스를 향해 떠나는 여정 동안 여러 소동들을 겪고 여러 사람들을 만납니다. [행오버]의 감독 토드 필립스가 만든 이 영화엔 여러 웃기는 순간들도 있고 조연들도 재미있지만, 정작 문제는 재크 갈리피아나키스가 연기한 이든은 아무리 영화가 노력해도 여전히 정떨어지는 인간으로 남는다는 것입니다. 이건 배우 잘못이라기보다는 각본 잘못이 크지요. 하여튼 간에 전 [행오버 2]가 이보다 더 재미있기를 빌겠습니다. (**)

 

 

 

 

 [타마라 드류]

젬마 아터튼이 연기하는 타마라가 형식상 주인공이지만, 포시 시몬즈의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한 본 영화는 그녀가 오랜 만에 자신의 고향에 오면서 그 동네 각양각색의 캐릭터들과 함께 펼치는 유쾌하면서도 살짝 별난 구석이 있는 영국산 코미디 영화입니다.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등의 영화들로 꾸준히 실력을 발휘해 온 스티븐 프리어즈 감독에겐 개성있는 배역진들이 있고 보기 좋은 영국 시골 배경과 함께 아터튼은 예쁘게 나옵니다. 시몬즈가 살짝 설정을 빌린 토마스 하디 소설에 대한 언급들이 여기저기서 나오는 것도 재미있고요. (***)

 

 

 

그리고 내일 아카데미 시상식에 대한 제 예상은 여기에 있습니다.

 

 

 

 

    • 여기도 개구리가... -0-;;
    • 냉동 개구리. 더 이상 imgageshack은 이런 식으로 쓰지 말아야 하나 봅니다.
    • 적힌 주소대로 가봤더니 Only Owners, Administrators, Operators, or Moderators may register the domain...라고 되어있네요.
      djuna님이면 가능할지도..
    • 언제부터인가 많은 사이트에서 imageshack의 그림이 안보입니다. 도메인별로 등록해야 하는건지 거참.
    • 저는 링크할 사진 저장할 때 이글루스 써요.
    • 이글루스도 요즘 잘 안 뜹니다. 떴다 안 떴다 불안정
    • 아직 다음 블로그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제 움짤이 다 거기 있어요.
    • 우선 로저 에버트같은 이가 <필름 쇼셜리즘>을 잘 볼 리가 없죠. 깐느에서 고다르의 이 신작을 봤다는 명단을 로저 에버트를 위시해
      '난감하게 했다'는 말로 시작한 건 웃기는 말 입니다. 로저는 비평가 평단에서조차 거의 무시되어지고 있는데 저 문장을 보면
      의문을 가질 목록이 더 많을 거에요.
      더군다나 그 사람은 현대 영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특유의 감성도 있어요. 나이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는 시대의 공기를 감지하지 못하는
      지성이라는 이유가 있겠죠. 그의 글을 읽어보면 고전에서 벗어난 영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걸 이해할 순 있어요.
      (매해 최악의 영화제를 갱신하고 있다는 베를린 영화제의 가장 최근 프로그래머들 조차도
      그를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그의 고전 영화적 지성이 동시대와 현대의 영화와 결코 어울리지 않는 걸 알기 때문이죠.)

      저도 조성용님께 질문하고 싶군요.
      고다르가 지가 베르토프 집단을 거쳐 80년대 이후의 영화들을 통해 집중적으로 사유한 이미지의 정치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관찰이 있은 후에 <필름 쇼셜리즘>을 봤는지 궁금합니다.
      혹은 하워드 혹스의 영화를 예로 든 숏 리버스 숏에 대한 편집의 수사와 클로드 란쯔만의 <쇼아>를 비판적 위치에서
      바라본 역사와 이미지에 대한 영화의 착취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분인지도요.

      어떤 영화는 그 단 하나의 작품으로 평가를 해야하거나 가능한 작품이 있지만,
      고다르의 이 신작은 그의 작업과 영화사 자체를 동시에 바라보며 갱신한 후에 그 끈을 놓지 않고 음미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 가장 마지막에 나온 이 영화를 단독으로 평가해야 하죠. 과정 없이 떡하니 이 작품만 놓고 보면 당연히 이해 못합니다.
      이 말이 고다르의 위치를 괜히 신격화 하는 말이 아니에요.
      고다르의 행보는 이미, 고전 영화 구성의 특성(그리고 장르영화 역시)을 얘기할 수 있을만큼 충분히 쌓인 역사와 재료만큼
      비례하는 많은 양의 수사와 현대영화적 사유를 제시하고 차곡차곡 쌓아놓은 감독입니다.

      말씀하신 많은 영상조각들이 어떻게 운용되는 건지 알고 '남는 게 없다' 라고 하신 건가요?
      (혹은 프랑스어 자막으로 봤나요? 영어라면 단순 프랑스->영어 차원이 아닌 아웃풋을 다르게 도출하는 언어로써 작업했거든요.)
    • /타일러

      일단 저는 타일러님께서 말씀한 자격들에서 죄다 다 떨어지니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그나저나, 전 고다르의 60-70년대 영화들을 본 적이 있고 나중에 그의 최근 영화들을 봤는데, 전자의 경우는 영화학을 배우지 못한 이상 완전히 이해할 지 못할지언정 [경멸]과 같은 영화들에서 그의 시도들을 흥미롭게 그리고 재미있게 지켜봤고 그에 대해서 제 능력상 자세히 다룰 수 없다는 점에 대해 아쉬워했습니다. 반면에 요즘 영화들은.... 실험을 계속하려는 의도는 알겠는데 영화에겐 끌어 당겨야 할 관객이 늘 필요하다는 걸 잊어버린 감독의 작품들 같더군요. 특히 [사랑의 찬가]에서 스필버그를 야비하게 비난한 건 너무했어요.
    • /타일러 설명을 좀 해 주세요."로저 에버트같은 이가 <필름 쇼셜리즘>을 잘 볼 리가 없"는 거,"로저는 비평가 평단에서조차 거의 무시되어지고",정말이지 더군다나 "더군다나 그 사람은 현대 영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특유의 감성"은 도대체 뭡니까? 그리고 "고다르의 이 신작은 그의 작업과 영화사 자체를 동시에 바라보며 갱신한 후에 그 끈을 놓지 않고 음미해"야 겠지만 그건 하나마나한 얘기.모든 영화는 맥락이 없으면 그냥 꽝입니다.
    • 조성용/ 고다르의 궤는 조성용님이 보셨다는 6~70년대의 영화들 이후에 몇 차례의 분기가 있으며

      그 분기에는 미디어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 따릅니다.

      그 성찰과 반성은, 미디어와 역사의 진행의 상관/인과관계가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사고방식 혹

      실증적 행위를 통해 나왔다는 몇몇 역사적 증언들과 함께 이야기되는 것이고요.

      고다르는 '지금'을 성찰한 후에 과학적 매커니즘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증명하고 사유합니다.

      고다르의 그런 일반적 축은, 데뷔작부터 지금까지 기본적으로 같습니다.

      하지만 그 축에 붙는 피와 살들은 계속해서 달라지고 있죠.

      허나 현재 진행중인 영화들은 그 과정의 관찰과 이해없이는 제대로 수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력과 학습이 필요한 것이죠. 영화를 얘기하는 능력이란 것은 초월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지 않습니까?

      감식안이나 동시대 예술에 대한 감각적 수용의 방법론을 펼치는 것은 다른 얘기겠지만요.

      고전 영화의 텍스트와 그것을 수용하는 방식의 태도로 고다르를 얘기하는 것은

      그의 영화를 필두로 하는 현대 영화들에 대해 얘기할 때 이미 철지난 이야기입니다.

      어떤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영화가 컨텍스트를 통해 뽑아져나오는 방식 또한 염두해야 할 겁니다.

      고다르가 영화를 통해 많은 인문학적 텍스트를 논의점에 던져두고 실험을 하려는 의도가 뭔지 아시겠다고 하셨는데

      저야말로 그게 뭔지 궁금하네요. (이 질문에 답변을 주신다면 제가 영화에 대해 생각할 때 도움이 될 수도 있지요.)

      이 사람의 현재 작업은 자신이 쌓아놓은 영화 실험/논평을 토대로 하는 명상의 행위에 놓여져 있습니다.

      고다르가 현재 하고 있는 이미지에 대한 명상과 정치학이 어느 정도 틀이 잡혔다고 저는 단언할 수 없지만

      그 작업의 의의는 최소한 이 사람이 죽기 전에 만든 유작이나 (회의의 고다르로써의) 별 다른 코멘트의 유무를 통해

      사후에 얘기될 수 있겠죠.

      <사랑의 찬가>에서 스필버그를 비난한 것은 맞는데 그게 왜 야비한 지는 모르겠습니다.

      조성용님이 말씀하신 '야비하다'는 뜻이 정확히 어떤 지는 모르겠지만 유독 스필버그만이

      그러한 이미지 착취를 하는 감독은 아니니까 그를 필두로 한 비난이 어리둥절하지만은 않은 이유는 그가 <쉰들러리스트>를

      만들 때 한 연출이 무엇인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는 고다르가 좀 위악적이긴 했어요. 하지만 그게 야비한 것 까지는 모르겠군요.

      그가 유독 민감한 사안을 스필버그가 건드렸다는 건 있으니까요.

      고다르는 영화를 통해 영화를 비평하기도 하죠.

      avanti!/ 로저 에버트의 비평가적 위치를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저는 그 사람이 전통적인 방식으로 뽑아져나온 고전 영화의 만듦새를 토대로 한 주류/상업적 영화에 대해 평가한 것을 두고

      특별히 할 얘기 혹 비판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가 그 나름의 지성과 감식안이 통하는 영화들에 대해서 얘기하는 범위는 고전 영화인데

      로저 에버트의 경력과 그가 그간 써온 글들을 보면 딱히 오류를 범하는 비평적 활동을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동의 여부와 상관 없이요.)

      고전 영화가 끝난 건 이미 오래 전의 일입니다.

      그 시대를 함께 통과한 로저 에버트 같은 사람의 시간과 경력을 보면 그렇다는 거죠.

      더군다나 에버트의 주요 고객층이 대중 관객과 리뷰어인 것을 생각해보세요.

      (혹 고전 영화를 만들고 그것이 그들의 의지인 동시대의 많은 감독들도)

      그가 만약 전투적이고 민감한 영화평론가로서의 활동을 해왔다면 이만큼 잘 팔리는 스타 평론가로 유명해지지 않았겠고,

      비평가들 사이에서 존경의 대상이 될 만한 인물이 됐겠죠.

      하지만 그가 택한 것은 앞으로 끊임없이(?) 갱신 될 영화사 안에서 '고전 영화의 범주'만을 탐색하고 탐구하는 비평/리뷰 활동입니다.

      현재 먹힐 만한 주류적 만듦새만을 이야기하고 그것에 열광하는 이들만을 가리킨 비평적 전선을 지켜왔는데 이변이 없다면 죽을 때까지

      그런 포지션을 취하겠죠.

      이런 맥락에서 그 사람이 고다르의 신작과 함께 (혹 로저 에버트는 '고다르 1기' 이후의 영화들에 대해서는 입을 아꼈거나 거의 말을 한

      적이 없었고 많은 영화 학자들 및 평론가들이 작업했던 현대 영화의 도래에 대한 전선에 동참한 적도 없었어요.

      그가 내놓은 평론집의 목록들을 살펴봐도 그렇죠.) 현대 영화에 대한 평가를 하거나 제대로 내렸던 적은 없었습니다.

      그가 다루기가 힘든 요소의 현대 영화들이기 때문인 것도 있겠고, 그런 영화들에 대한 비평은 그가 염두하는 고객층에겐 관심 밖이기

      때문인 이유도 있을 겁니다.

      P.S. 비평가 평단에서 거의 무시되어지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로저 에버트는 영화에 대해 새로운 성찰이나 반성을 요하는 비평가의 임무를 행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이미 짜여진 고전 영화의 구성 안에서 '이야기'를 토대로 영화라는 매체를 사유하기 때문이죠.

      ===

      고다르의 이 신작은 그의 작업과 영화사 자체를 동시에 바라보며 갱신한 후에 그 끈을 놓지 않고 음미 해야하는 것은 맞겠지만

      그건 하나마나한 얘기라는 것은 모순처럼 느껴져서 왜 하나마나한 얘기인 지 말씀해주시면 좋겠군요.

      모든 영화는 맥락이 없으면 그냥 꽝이라는 말도 굉장히 이상합니다.

      그렇다는 것은 <필름 소셜리즘>이 맥락이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그 영화에 맥락이 없기는 커녕 오히려 너무 많아서 그것을 구분/정리하는 작업이 만만치 않은 걸요. (알랭 바디우)

      만약 '이야기로써의' 맥락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굉장히 편협한 얘기입니다.

      영화는 이미 서사의 맥락이 없어졌고 또한 없어져가는 추세를 따르고 있습니다.

      '모든' 영화가 아니라 '고전' 영화에나 해당하는 말이겠죠.

      하모니 코린의 <트래쉬 험퍼스>는 전후 맥락도 없고 기승전결도 없고 이야기라 할 것도 없는 비디오 시대가 낳은

      현대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꽝인 걸까요?
    • /타일러

      문제는 영화를 자기 노트에 명상 중에 끄적끄적 낙서한 것 그 이상으로 만들지 않고 관객과 소통하려고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경력 초기에 이야기도 있는 가운데 뭔가 신선한 걸 시도했으니 좋았는데, 계속 해체적 실험이나 해대면서 이젠 봉황의 뜻을 저 같은 참새가 어떻게 알겠냐는 식의 자뻑이나 하고 있으니 시큰둥한 반응만 나올 뿐이지요. 관객들과 소통할 자세를 갖추지 않으면 뭐 합니까. 관객이 없으면 영화는 아무리 필름이 있어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스필버그의 경우, 그는 자신이 다루는 소재에 대해 진지했고 그 영화로 상 많이 받은 후에도 진지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그 영화는 [쇼아]처럼 홀로코스트에 대한 영화가 아닙니다. 물론 소재 때문에 그걸 완전히 반박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요.

      그리고 로저 이버트는 타일러님이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인기 따라가는 평론가가 아닙니다. 대중 기호에 인식하는 편이지만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고 그는 다른 사람들이 혹평했던 영화들에도 기꺼이 별 네 개를 주기도 했고 나중에 자신의 예견이 맞았다는 걸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평론들을 단순히 이야기에만 초점을 맞춘 것뿐만 아니라 영화들이 왜 자신에게 먹히는 지에 대한 의견을 명료하게 표현하면서 관객들이 봐야 한다는 생각하는 아트하우스 영화들을 그의 전 동료 진 시스켈과 함께 밀어주기도 했습니다. [유 더 리빙]이나 [바라카]와 같이 내러티브에 신경 쓰지 않은 영화들을 칭찬했고 자신의 영화제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들을 보여주곤 했습니다. 그리고 데이빗 보드웰부터 저와 같은 아마추어 영화광까지 많은 부류의 사람들을 항상 열린 마음으로 똑같이 대했고 늘 뭔가 새로운 걸 경험하길 바래온 영화광이 이버트입니다. 아, 그나저나 언제 이버트가 평론가들에게 무시당했습니까?
    • 조성용/ 고다르가 언제 관객과 소통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고다르는 자신의 작업이 애초에 흥행, 그에 따른 대중적 인지도, 주류적 만듦새와는 거리가 먼 종류의 것, 창작의 의지임을 스스로 자각하고 독단(고다르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상 '독단'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습니다.)적인 길을 걸으며 자신의 영역 안으로
      영화와 매체를 고민/반성하는 자들을 불러모은 후에 (그들에 의지에 의해) 새로운 영화사를 이루는데 일조한 중요한 인물입니다.
      고다르를 들어보지도 못했거나, 소통을 하지 않는 관객들조차 고다르의 영향을 절대 피해갈 수 없게 됐습니다.
      (그건 조성용님도 마찬가지고요.)

      자뻑은 혼자서 합니다만 통용이 된다면 더 이상 비난 받을 자뻑이 아닙니다.
      그리고 '계속' 해체적 실험이나 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건 그냥 고다르에 대해 모른다는 얘기입니다.
      (이 얘기는 물론 조성용님도 앞서 얘기한 바 있으니 길게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그건 위에서도 말했지만 거의 3,40년 전의 고다르의 작업이니까요.
      이런 경우라면 '참새'가 '봉황'의 뜻을 모르는 것이 참새의 문제이지 봉황의 문제가 아닌 거죠.

      관객들과 소통할 자세를 갖추지 않은 게 아니라 헐리우드와 주류적 만듦새에 '길들여진' 대중 관객들과 소통할 자세를
      갖추지 않음이 더 정확한 말이고 (그건 동년배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나 어울리는 자세죠),
      어떤 창작자는 모든 관객을 대상으로 영화를 만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참새'라는 대중 관객들이, 고다르의 영화를 통해 매체든 문법이든 미학이든 새롭게 접근할 수 있는 부분을 염두한
      '봉황' 감독들과 비평가들에게서 절대적/상업적 영향을 받지 않는다해도,
      그 봉황의 어떤 특성으로 인해 '변신한' 고전 영화 문법을 참새들이 되려 적응하고 익숙해지는 현상을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현대 예술로 얘기되어지는 영화라는 매체가 언제까지고 일반적인 모양새의 배급망과 극장 안에서만 머물지는 않겠죠.
      그에 따른 많은 변화들도 감지해야 할 것이고요. 그런 미래의 상황 맨 위에 고다르만이 있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의 영향력에
      좌지우지 된 이들과 영화사가 그냥 핫바지는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치기인 것 같은 '도그마 선언' 역시 동시대 영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 바 있습니다.
      선언을 유도했던 감독 당사자의 최근 행보를 떠올려보면 웃기지만요.)

      관객이 없으면 영화는 존재할 수 없다는 얘기도 어불성설인게, (위의 얘기와의 연장에서) 참새들만이 모든 관객을 대변해 주는 것이 아니지요.
      자기가 잘 모르면 모르는 거지, 그런 그들의 사정이 봉황의 기개까지 자뻑이나 낙서로 변절시키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스필버그의 진지한 자세가 비난을 피해갈 수 있는 덕목이나 방어가 될 수 없어요.
      더군다나 <쇼아>는 조성용님의 말마따나 홀로코스트에 대한 영화가 아닙니다.
      스필버그가 <쉰들러 리스트>를 만들 때 '홀로코스트 영화'라는 자각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과 가공된 픽션(저도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말은 알고 하는 소리랍니다.)이라는
      그 속성 자체가 홀로코스트에 대해 얘기하게 되는 성질을 가지게 합니다.
      이것 역시 고다르는 얘기했고 고다르 뿐 아니라 클루게와 파로키의 영화들을 통한 '이미지를 창출한다는 것에 대한 고민'에 대한
      이해와 반성이 있었다면 단순하게 비난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죠.

      P.S. 지금 이 댓글을 통해 제가 '고다르 예찬자'로 보일까봐 조심스러워서 덧붙이자면,
      제가 고다르의 위대함 혹은 중요성에 대해 인정 및 긍정은 하나 그의 영화를 통해 드러나는 정치관까지
      의심이나 의문없이 무조건 동의하는 바는 아닙니다. (고다르의 미학은 정치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관심을 안 가질 만한
      '영화를 통한 정치'를 사유해야만 하는 이런 경우는 간과할 수 없죠.)
      일례로, 역사의 증인으로서의 그런 고다르도 '알제리 전투'만은 이제까지 언급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저는 그 점이 갸우뚱하면서도 찝찝하거든요.
      ===
      로저 이버트의 그런 시혜 의식 (아트하우스 영화 밀어주기)은 거의 같잖을 정도입니다.
      그의 그런 활동을 통해 대중 관객들이 알 지 못하고 지나갈 만한 영화들의 이름이 기억되게 한 것과, 그들이 그 영화들을 통해
      현대 영화 혹 예술 영화를 볼 때 생각해야 하는 지점에 대한 가이드 혹 비평적 분위기를 조성을 했느냐는 다른 얘기입니다.
      정말 그런 영화들을 살아남게 하려면 그와 어울리는 비평적 태도로 영화를 발굴하고 지지 해야겠죠.
      (이 부분은 조성용님이 고다르에 대해 얘기하는 것만 봐도 그가 거느리는 아마추어 영화광-거의 병적인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자의식을 명사
      화 하는-에게 그런 배움을 터특하게 한 것 같지는 않군요. 그리고 영화를 좋아한다면 자신이 안주할 수 있는 기제들만 있는 범주의
      영화들만 보지는 않을 겁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건지 패티쉬를 좋아하는 건지 자각도 중요합니다.)

      이런 작업들은 오히려 영화제 프로그래머나 '시네마스코프' 혹 '(오히려 자뻑 증세가 있다면 있을) 까이에 뒤 시네마' 가 했습니다.
      혹시 로저 에버트와 그가 소개하는 소위 예술 영화의 배급 과정에 대한 인과관계에 대한 이해는 있으신가요?
      로저 에버트가 '현대 혹 예술' 영화를 소개하는 그런 전선에 동참은 커녕 어쩌다가 가끔 접하는 현대 영화들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소유권을 가진 자의 같잖은 시혜라는 겁니다.
      뭔가 새로운 걸 경험하길 바라온 영화광 이버트치고는 현대 영화들 혹 그러한 아방가르드, 경향에 대해 얘기한 적이 없어요.

      이버트를 지면을 통해 공개적으로 무시한 평론가가 있었다는 건 알지만 제 경험상 직접 몇몇 비평가들과 대화를 해보면
      그냥 언급 자체를 하지 않거나 가벼운 리뷰 수준이라 굳이 비평적 혜안에 대한 공부로써 참고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이버트는 단지 연예인이죠!, 라는 말도 덧붙여서요.)

      이런 에버트에 대한 평가는 국내 뿐 아니라 유럽에서 활동하는 프로그래머들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유럽의 프로그래머들이라고 해서 감식안이 좋은 것만은 아니죠. 대화를 해보면 알텐데, 최소한 이 사람들이 로저 에버트의
      기계적인 낙서보다는 더 훌륭한 것 같군요.)

      제 사정은 아니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버트라는 필터를 통해서 영화를 보고 생각하는 것은 게으르거나 더 발전할 수도 있는
      자신의 혜안을 유보시키는 행위라는 겁니다. 저는 로저 이버트가 고전적/주류 만듦새의 영화에 대해 비평하는 것을
      우습게 보지는 않아요.

      그가 잘 할 수 있는 지점은 분명 있겠고, 그에 따른 대중 관객의 기호와 취향에 변화를 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겠죠. 그러나 그의 영화 선호도와 비평적 능력이 퇴화는 아니어도 발전은 더 이상 없을 겁니다.

      그런 그의 관점이 지금 당장은 시장 논리와 산업으로써의 영화라는 자장 안에서 소위 먹힐 수는 있으나
      한 개인의 어떤 영화광에게까지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 지는 의문이에요.
      (이건 비평가 평단이 그를 좋은 선배나 멘토로 두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로서는 그의 글보다 다른 사람들의 혜안을 신뢰하는 것이 더 이로울 것 같군요.
      예술 영화(?)와 현대 영화가 단지 어쩌다 특출나게 나오는 세계 영화사의 경향이 절대 아닙니다.
      (로저 이버트가 주로 얘기하는 영화들의 목록이 오히려 더 적을 수도 있습니다.)
      정말 영화를 좋아하고 '영화광'임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관객이라면 더 넓은 범주로써의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 집중한 후
      개별 영화를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필수는 아니지만 어떤 매체에 대해 과거만을 요구하는 것은 좋은 영화광의 자세가 아니겠죠.

      조성용님은 혹시 이버트에 의해 소개가 되거나 그의 방법론을 통해서 주로 영화(들)를 접근하시나요?
      가끔 여기 게시판에 올리는 리뷰의 목록을 보면 동시대 영화에 대한 관심이 많으신 것 같은데 그 영화들이 시간적으로
      동시대/현대에 나오긴 했으나 미학적으로 동시대/현대 영화들이 아니란 걸 아실 겁니다.
      물론 그런 영화들을 위주로 보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고 선택이고 취향이겠죠.
      허나 저는 그 목록 사이에 낀 고다르의 영화를 통해 드러난 조성용님의 간단 감상기를 보고
      '저 분이 과연 고다르 영화를 잘 볼 수 있는 관객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고, 로저 이버트에 의한 영화관으로 본 것이라면
      고작 간단 감상기이긴 하나 그 영화를 생각하는 그런 태도는 성립하기 힘든 것 같아 댓글을 달아본 겁니다.

      물론 모든 영화들은 '영화 일반'이라는 차원에서 어떤 관객에 의해 평등하게 선택 돼고 감상되어질 수 있습니다.
      허나 그건 영화라는 매체의 입장과 영화라는 것을 일반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고 바라보고자 하는 관객의 입장이지,
      그 입장들이 영화를 보고 무언가를 기술하는 관객의 감식안까지 대변해주는 역할을 하진 못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조성용님의 게시물을 보고 님의 견해가 불합리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한 것이고요.

      P.S. <유 더 리빙>이나 <바라카>가 내러티브에 신경쓰지 않았다는 말은 굉장히 이상하거나 매혹적인 지적인데요?
      혹시 제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비평적 제안을 하실 생각으로 '내러티브에 신경쓰지 않았다' 라고 하신 거라면 답변 부탁드려요.
      (제가 정말 갸우뚱해서 그러는데 '유 더 리빙'은 로이 안데르손의 영화를 두고 얘기하신 게 맞나요?)
      혹은 '내러티브'라는 것을 오해하실 수도 있지만...저로서는 '오잉?'이라는 반응 밖에 안나와서 질문합니다.
    • /타일러

      예, 전 이버트로부터 많이 영향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도 고다르가 지금 무슨 영화를 만들던 간에 영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건 잘 압니다. 그러니 제발 이 동문서답 좀 그만합시다. 전 지쳤습니다.

      그리고 [유 더 리빙]에 대한 제 표현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조만간 타일러님께서 그렇게도 칭찬하시는 유럽 쪽 사람들의 진가를 배우겠습니다.
    • 조성용/ 제 생각에 조성용님은 이미 이버트로부터 배울 건 다 배웠을 것 같습니다.
      그의 비평적 혜안이 특이성 혹 개성을 가지진 않았으니 더 뽑아내려도 더 이상 없을 겁니다.(개성은 비평 이외에서 왔던 거고요.)
      이제는 다른 비평가들에 관심을 가져보시길 바랍니다. 더 큰 도움이 되거나 배울 수 있는 부분이 많을 거에요.

      이버트가 다른 훌륭한 비평가들의 동시대적 평가에 동의를 했던 최근(은 아니지만 이버트를 다시 보게 만들만한 그의 선택 혹
      안목이 그간 없었거나, 에버트가 아니더라도 기계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한 영화들을 제외하면)의 경우는
      카를로스 레이가다스의 <침묵의 빛> 이외에 없었던 것 같군요.

      여담으로 이버트의 영화를 향한 열정 자체를 폄하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게으르거나 쉽게 편성 된 그의 목록이 시시하다는 거죠 (앞서 말한 시장성과 스타 평론가의 소개의 뒷배경 등 많은 걸 고려한 목록이기도 하지만).
      혹은 그가 짐 자무시의 <리미츠 오브 컨트롤>에 대해 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서 당황한 것에 대해서는 사실 이해가 됩니다.
      그 영화에 대해 비평적 썰을 풀 능력 혹 동시대적 감식안을 갖추진 못했으니까요.

      -----
      이해가 안되는 건, 저는 고다르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적이 별로 없습니다.
      조성용님께서 고다르를 두고 '관객과 소통하려 하지 않는 자세'라고 하신 말씀이 부당하기에 그에 대한 댓글을 단 것이지요.
      댓글의 포인트는 '몰이해를 통한 고다르 영화 보기, 그래서 가지는 이상한 반발심(넘겨짚는 고다르의 자세 등)'을
      향한 지적이었습니다. 그걸 얘기하다보니까 이래저래 같이 설명해야 할 것들이 있었을 뿐이지요.
      그리고 고다르가 영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걸 그냥 아는 것은 사실 아는 게 아니죠.

      ===

      <유 더 리빙>에 대해 저에게 사과하실 필요는 전혀 없죠.

      그리고 대충 읽으신 건지 모르겠는데 저는 유럽 쪽 사람들 칭찬한 적 없습니다.
      이버트의 스타 기질보다는 훌륭하다고 한 것이 곧 그들에 대한 칭찬이 되는 건지 모르겠군요.
      어쩌면 유럽 애들이 로저 에버트 영감보다 더 위선적일 수 있거든요.
      다루는 범위가 그 양반보다 더 넓다는 장점이 있을 뿐이지요.
      (그러다보니 비평의 방향 자체가 그 궤를 달리해서 이버트보다는 글을 더 잘 쓰거나 사유 방식 자체가 다릅니다.)

      그리고 제가 언급하지 않았다고 해서 영어권 비평가 중에 훌륭한 사람이 없다는 건 절대 아닙니다.
      2년 전에 작고한 훌륭한 비평가도 있고 캐나다에도 있습니다. 다만 그들이 시장과 타협하지 않기에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떨어질 뿐인 거고요.

      선택은 조성용님 본인이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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