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니의 정치성(ooyoo님의 글을 읽고)
언급하신 “감독이 나미 아버지의 입을 빌어 당시 노동운동가를 비판한다고 해석“한 사람이 저인 것 같아서...^^
써니는 80년대에 대해 정치적으로 접근하려는 의도를 가진 영화는 아니지만 당연히 정치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른 모든 것들도 그러하죠)
저 아래 듀나님 글에도 댓글로 달았지만 저는 전직 노동운동가가 직원 돈 떼먹고 달아난다는 설정도 불만없고 시위장면을 환타지스럽게 처리한 Touch by touch 장면도 거슬리지 않았습니다. 당시 여고생들이 인식하는 시위라는게 저런 식의 이미지일 수 있다고 봐요. 물론 현장에 있었다면 최루탄 연기때문에 코막고 도망가기 바빴을 거고, 그 이전에 진압봉과 쇠파이프와 투석이 주는 공포에 압도당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겠지만.
역시 반복하자면 제가 가장 거슬렸던 것은 밥상 앞에서 운동권 아들에게 내뱉는 아버지의 꼰대 잔소리였습니다. 80년대에 학교에서든 주위에서든 어른들로부터 많이 듣던 소리입니다만... 감독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집어넣은 것 같아서 좋게 보이지 않더군요. 심지어 극중 나미 아버지는 호남출신인데..?
문제의 밥상머리 설교 장면을 봅시다. 일단 운동권 대학생으로 나오는 나미의 오빠가 상당히 경박스런 외모와 말투를 소유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수많은 등장인물들에게 개성을 부여하기 위해 배우들의 외모와 옷차림, 말투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영화입니다. 적어도 이 영화 속에서는 외모와 이미지가 곧 성격이고 퍼스낼리티인 겁니다.
나미의 오빠가 최소한 준수한 외모에 진지한 말투를 지니고 있었다면 그 장면이 저에게 그리 거슬리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진지했던 인물이 나중에 직원 돈 떼먹는 파렴치한 인물로 변했다면 극적 효과도 훨씬 배가되었겠지만, 이 영화 속 유일한 운동권 대학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찌질함 그자체로만 존재합니다.
저는 이것만으로도 감독이 80년대의 운동권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을 거라 추측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뭐가 문제냐구요? 물론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누구나 80년대의 운동권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할 자유는 있어요. 하지만 그것이 일정부분 개인의 정치적 성향을 말해준다는 것도 사실이죠.)
나미의 아버지는 전남 보성에서 서울로 올라온 공무원입니다. (영화본지 꽤 되어서 광주 출신이라고 착각했었는데... 나미네 가족이 벌교읍에서 올라왔다는 이야기가 나오죠. 여담입니다만 ‘황산벌’에서도 그렇고 호남 사투리가 강조되는 영화에서 군 소재지도 아닌 벌교라는 지명이 나오는 것은 소설 ‘태백산맥’의 영향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벌교에서 유독 보성군의 다른 읍면이나 옆동네 고흥 화순 등에 비해 더 억센 사투리를 쓰는 것도 아닐테고 말이죠)
광주가 아닌 보성 출신이라고 해도, 공무원이라는 특이성을 감안한다고 해도 저는 나미 아버지의 꼰대 드립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런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런 사람은 있어도 아주 소수였을 테니까 말이죠. (이 영화 배경의 1년 후인 87년 대선때의 광주/전남 득표율을 떠올려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90년대에 광주에 여러번 가보았지만 광주 시내 버스에서건 술집에서건 군사정부를 옹호하는 뉘앙스의 말을 공개적으로 내뱉는 것은 참으로 있을 법 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나미의 오빠가 현재 시점에도 언급됨에 비해서 나미 아버지의 현재 모습은 등장하지 않는데... 저는 나미 아버지가 현재 ‘어버이 연합’ 같은데 가입해서 시대착오적 집회에 참석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줬으면 영화 속 균형이 좀 맞지 않을까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텍스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개인의 자유입니다. 듀나님 말마따나 가끔 산으로 보내는 것도 또다른 재미죠. 하지만 일반적으로 ‘척하면 착’하는 보편적 시각이 있다는 것은 많은 이들이 동의하지 않겠습니까.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서 동이가 왼손잡이라는 힌트는 그가 허생원의 아들임을 암시한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듯이 말입니다.
“써니”에서 나미의 오빠에 관한 이야기가 ‘가짜 노동운동가들이 90년대를 거치면서 대거 보수 진영에 투항하는, 이른바 ‘변절’에 대한 신랄한 풍자‘이며 ’감독이 나미 아버지의 입을 빌어 당시 노동운동가를 비판한다고 해석하는 건 많이 부당해보인다‘고 주장한다면 글쎄요... 저는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는 게 좀 놀랍고 생뚱맞게 느껴졌습니다. 마치 메밀꽃 필 무렵에서 동이가 허생원의 아들이라는 해석이 많이 부당해 보인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보는 듯 했다고나 할까...
마음에 안드는 부분이 몇 군데 있긴 했지만 (위에 언급한 부분 위에도 특히 결말 부분의 생뚱맞음이라든가) 저는 사실 영화를 재미있게 봤어요. 유쾌하게 웃기도 했고..(제일 크게 웃었던 부분은 음악감상실에서 헤드폰을 끼워주는 장면이었음. 거기서 그게 인용될 줄이야!) 몇몇 장면에선 눈물을 흘리기도 했죠. 딱히 슬퍼서라기보다는 그 세대(보다는 약간 어리지만 80년대를 통과했던)로서 잃어버린 뭔가를 건드려주는 솜씨 때문에요.
사실 저는 이런 식의 추억담에 약합니다. 흔히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꿈" 같은 진부한 표현으로 요약될 수 있는 거 말이죠. 작년에 토이 스토리2 볼때도 그랬는데...
특히 마지막에 소년이 우디를 동네 어린아이에게 넘겨주는 장면, 차마 주지 못해 머뭇거리는 손길.. 이때 정말 눈물이 철철철 흐르더군요. 아이는 어른이 되지만 아이가 사라지고 어른이 생뚱맞게 생겨나는 건 아니죠. 여섯살, 열두살, 열일곱살, 스무살....이었던 아이들은 모두 당신 속에 숨어 있기 마련.
써니는 노골적으로 당신 속에 숨어 있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어 '달래주겠다' 고 이야기합니다. 효과적인 전략이죠. 일단 비슷한 추억을 공유한 사람들은 쉽게 무장해제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 영화가 흥행해서 집안에서 사회에서 현실에 치이고 있는 그 또래 누님들이 많이 관람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지금 10대 20대가 봐도 재미있겠지만 교복없이 학창시절을 보냈던 이들끼리만 통하는 게 있기도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