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였던 기억이 떠오른 밤
1 저도 남 얘기하기를 좋아해요. 신기한 일, 재미있는 일, 희한한 관계, 우연, 아이러니 이런 것들요. 잔잔한 삶을 살아가는 나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는 일들을 겪는 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어요.
사람들은 나와 하등의 관계도 없는 남에 대해 얘기하기를 좋아하지요. 저 또한 그러니까요. 지루하고 루틴한 일상과 현실에 대한 도피일 수 있겠죠.
12시반이면 김치찌개나 고등어조림이나 때로 짜장면이라든가 암튼 점심을 먹겠지. 오후 네 시쯤 되면 이 일을 계속 해야 하나 내가 재능은 있나 왜 항상 짜증나는 클레임이 생길까 답답해 하다 여섯시가 되면 야근을 할까 말까 고민하고 저녁을 시킬까 말까 고민하고 밤이 되면 맥주캔을 딸까 말까 고민하고 치킨을 시킬까 말까 갈등하고 다운받은 드라마를 보다보면 12시가 넘고 황망하게 잠을 청하고. 그렇게 살죠.
포털 게시판의 댓글러들은 몇만년 전이라면 종일 뛰어다니며 사냥을 했을까요 오로라를 바라보았을까요 나무의 영혼과 이야기를 했을까요 바람과 별빛이 그들에게 충분한 자극이 돼 주었겠죠 아니면 그 때도 다른 사람의 뒷 이야기를 재미 삼아 했을까요
2 문화기획 일을 하는 지인과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회사에 다닐 때 제일 싫었던 건 뒷다마를 까는 사람들이었어요. 한 명이 귀가 인사를 하고 나가자 마자, 하낫 둘 셋을 세고 회전의자를 휘리릭 돌려 가운데로 모여든 사람들이 그 사람의 뒷다마를 하던 일들이요. 이 얘기 저 얘기 들은 얘기 본 얘기 그리고 사실일지도 모르지만 아니면 뭐 어때 식의 이야기들이요. 반복되는 업무에 만성 피로에 실수 하나가 엄청난 결과를 낳는 일들에 파김치가 된 사람들에게, 주말도 휴일도 없던 사람들에게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건 얄팍한 귀와 입술 뿐이었겠죠. 바쁜 그들에게 스트레스를 다른 취미생활로 풀고, 남얘기로 풀지는 마,라고 말할 수도 없어요. 나름 안쓰러운 사람들이니까. 그래도 혐오스러웠어요. 개개인이 아니라 그 덩어리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역사에 집중할 수 있는, 스스로의 삶이 다이내믹하고, 다이내믹하지는 않더라도 순간의 아름다움들이 있어서 그것들을 지켜보고 즐기고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충만하다면 루머의 재생산은 사라질까요, 뭐 그런 의미였어요. 거대담론은 아니었고, 그러니까 사랑을 하고 악기를 다루고 책을 읽자라는 원론적이고 이상적인 결론을 낼 수 밖에 없었지만. 뭐 그것도 해결책이지만.
맥주를 마시고 큰 소리로 길에서 그런 얘기를 한 우리가, 금세 부끄러워졌어요. 부자인 부모를 둔 히피가 된 기분이랄까.
3 국민학교 때, 반마다 퀸이 있었죠. 가십걸의 블레어랄까. 같은 학교에서 아버지가 교사로 근무하던, 삼단 스커트 자락 아래에 발목이 가늘고 예쁘던 그 여자애는 반에서 한 명을 찝어 공공의 적으로 만드는 것으로 권력을 잡곤 했어요. 물론 스스로 퀸이 될 베이스도 충분했지만요. 김하늘 어릴 적을 좀 닮고 쌍커풀이 진하고 어린애답지 않게 코가 오똑하던 그 애는 그렇게 반짝거리게 빛났으면서, 공부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아빠라는 빽도 있고 인기도 많았는데 왜 제일 만만해 보이는 애를 찾으러 그 예쁜 눈동자를 굴려댔을까요.
그애가 찍었던 건, 반에서 젤 더럽거나 질투나게 예쁘거나 공부를 최고로 잘하는 애는 아니었어요. 그 애에게는 묘한 촉이 있었는데, 겉으로는 무난해 보이면서 자세히 보면 어두운 면이 있는 애. 자책이 심한 애. 생각이 많은 애. 뭔가 비밀스러운 애. 약간 이쁘장한 애. 그런 애였어요. 그런 애는 희한하게도 아이들의 감정을 휘몰아치게 했어요. 미워하게 했죠.
'쟤 뭔가 있을 거야. 뭔가 이상할 거야' 아이들은 가난하고 더럽고 공부 못하는 애를 왕따로 만드는 것보다 뭔가 약간 가지고는 있는데 완벽하지는 않은 그런 여자애를 바닥에 패대기치는 데에 훨씬 더 큰 쾌감을 느꼈어요. 게다가 그런 애들은 자존감이 강해서 따돌리는 아이들에게 '나한테 왜 그래'라며 악을 쓴다거나 화를 내는 일이 좀처럼 없었으니까요. 그냥 그 때 생각이 나요.
맞다, 그 여자애는 잠깐 제 절친이기도 했어요. 전 제가 그 학년도 2학기 두달 정도의 왕따 자리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거의 졸업할 때서야 알았어요. 가장 친한 친구는 제 곁을 떠나지 않아 주었고 애들이 왜 전보다 나를 5프로 정도 덜 좋아하는 것 같은가 잠깐 고민해 보고 전 집안 고민에 몰두했죠. 집에도 절 괴롭힐 충분한 문제들이 있었으니까. 소외시키면 좀 괴로워하는 리액션이 있어줘야 하는데 이래 둔해놓으니 애들이 좀 재미가 없었는지, 퀸이 서서히 몰락하고 있을 때여서 애들 사이에서 '퀸이 아무래도 A(저요)에 대해 구라를 친 것 같아'라는 공론이 확산되어서일지 다시 정상상태로 돌아갔죠.
그런데 말이죠. 그 때 이후로 제 안의 어린이 조각들 가운데 작지만 분명한 한 조각이 사라졌어요. 죽었어요. 아무리 둔해도 상처는 상처죠. 세상이 날 따돌릴 수도 있다, 나는 사랑받는 존재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 하나만으로도, 그 기억만으로도 가끔, 아주 가끔이지만 극심한 외로움과 허기가 느껴져요.
소문 때문에, 세상 사람들 때문에 삶을 저버린 사람들을 봐요. 나라면 어땠을까. 살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죽는 게 무서우니까요. 나는 죽기엔 너무 둔해요. 그들처럼 예민하지 않아요.
아니,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너무 외로워서요. 외로움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요.
어떤 종류의 복수심과 고독, 복수심마저 무력하게 만드는 무기력 그런 것들이 혼재돼서 뭐라고 이름붙일 수도 없는 무서운 감정. 그리고 어느 순간, 픽. 자기 안에서 뭔가가 꺼져 버리는 거죠. 한두줄 쓰다 지우려 했는데 괜히 길어진 게 민망하네요. 왠지 답답한 밤인데, 이런 날들이 자주 반복돼다 보니 대수롭지도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