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과 가창력은 대립 개념이 아니다
1. "가창력"이라는 개념 자체가 폐기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다른 문화권에서도 "가창력"에 상응하는 개념을 널리 사용하는 사례가 존재하는지 잘 모르겠으나(엄밀하게는 영미뿐 아니라 유라시아와 중남미, 오세아니아를 포함한 전세계를 다 조사해 보아야겠지만, 제 능력을 벗어나는 작업이 될 뿐 아니라 그리 중요해 보이지도 않네요) 이 개념은 한국 청중들이 대중음악을 바라보는 어떤 집단적 경향을 반영한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한국의 청중을 기반으로 하는 한국의 대중음악을 논의하는데 "가창력" 개념이 유용한 경우도 있을 겁니다. "가창력 우선주의"를 비판하는 입장에서도 그 개념 자체는 비판의 준거로서 필요하겠구요(저도 이에 속합니다).
2. 그러면 "가창력"이 뭐냐? 대충 말해서 "노래의 기본기"라고 보면 되겠죠. 어떤 곡이 주어졌을 때 적절한 감정을 잡아서 음정 박자의 안정성과 풍부한 성량으로 무리 없는 고음 처리를 보여 주면서 잘 소화해 내는 능력, 한마디로 "기본기". 이 정도면 당장의 논의를 진행할 용도로는 큰 무리가 없을 겁니다(개념을 엄밀하게 다듬는 건 전문가들에게 맡깁니다).
3. 저는 아이돌 시스템이 "가창력"을 배가시키는데는 오히려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돌 시스템은 엔터테인먼트 회사가 재능 있는 다수의 연습생을 어린 나이에 선발하여 전문적이고 강도 높은 훈련과 경쟁을 시킴으로써 "노래하는 댄서들(또는 춤추는 싱어들)"을 키워내는 방식입니다. 바둑 분야에서 연구생 시스템(어린 나이에 시작, 반복되는 강한 훈련과 경쟁)이 "계산 머쉰"들을 만드는데 효율적이었듯이, 제작자가 가창력에 주안점만 둔다면 이런 시스템 하에서 "가창력" 있는 가수는 더 잘 양성할 수 있다고 봅니다. 다만, 제작자들이 "가창력" 아닌 다른 요소들에 많은 노력을 들이고 있기 때문에 "가창력형 아이돌"이 많이 안 나오고 있을 뿐이죠(이는 시장에서 결정됩니다). 실은 현재의 아이돌 그룹 중에서도 노래를 담당하는 일부 멤버들은 - 대중들의 선입견과는 달리 - 음악적으로도 잘 훈련되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실제로도 "가창력"이 있는 거죠.
4. 근래에 "가창력"이 강조되는 현상은, 아이돌 그룹의 멤버들 중 일부가 최소한의 가창력도 갖추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실정에 대한 반발 심리도 어느 정도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그런 멤버들이 가수(singer)라기보다는 "노래도 하는" 댄서 내지 엔터테이너로서 길러진 것이라면 가창력의 잣대로 그들을 평가하는 것이 "공정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5. 저는 "가창력"이 더 뛰어난 가수가 더 좋은 가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정 수준의 가창력은 반드시 필요하나 이는 "기본기"일 뿐으로서 음악적 표현을 하는데 필요한 정도면 족하고, 그 최소한도의 수준을 갖춘 이상 누가 더 "가창력"이 있는지 여부는 음악적 감동에 있어서 일차적인 요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비틀즈의 멤버들에게 대단한 "가창력"이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그것이 비틀즈를 저평가하게 되는 요인이 되는 경우는 드뭅니다.
6. 저는 아이돌 시스템의 장점을 인정하지만, 아이돌 시스템을 벗어난 지점에서도 스타들이 탄생하기를 바랍니다. 그 이유는 아이돌에게 "가창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오히려 많은 아이돌 멤버들은 "가창력"을 갖고 있다고 봅니다), "제작자의 음악"이 아닌 "독립 아티스트의 음악"도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고 주류가 될 수 있는 상태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아이돌 시스템에 의한 "제작자의 음악"은 전문가들에 의한 집단적 노력의 결과물이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가창력"을 포함한) 완성도가 오히려 더 높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아티스트 개인이 독창성을 발휘할 여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고, 독립된 아티스트들도 대중성을 확보하고 TV에 등장할 수 있어야 음악적 다양성이 더 풍부해진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