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상대주의-산체님 및 김리벌님과의 논쟁과 관련하여
이 글은, 산체님과 저의 몇 차례에 걸친 토론과 그에 댓글로 참여한
김리벌님과의 논쟁과 관련됩니다.
(관련 글들을 따로 링크해두지는 않겠습니다. 저나 산체님의 최근 글들을
검색해보시면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본래 결론 없이 논쟁을 유야무야 끝내는 걸 싫어하는 편인데다,
또 시간이 더 지나면 재론하는 것도 새삼스럽겠다 싶어, 단지 논점들만이라도
제 입장에서 정리해두고자 씁니다.
우선 산체님과의 토론의 핵심 쟁점은 과학에 대한 상대주의적, 관점주의적
입장과 과학의 진보, 보다 정확히는 '과학적 패러다임의 변화의 합리성'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입니다.
제가 이해하는, 산체님이 "주류 논쟁과 학문에서의 참"이란 글에서 개진한 입장은
이렇습니다.
ㄱ) '이론 적재성' 또는 '관찰의 이론 의존성' 테제에 따라, 패러다임에 상관없이,
어떤 이론적 틀에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참이라 할 수 있는 지식은 없다.
(좀 더 완곡한 산체님의 표현을 가져오자면,
"어떤 이론이 옳은지 그른지 결정되는 것이 그 이론이 이루어지게 된 체계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
ㄴ) 패러다임 전환은 과학자들의 대다수 동의를 통해 일어나며, 이는 합리적이다.
이에 대해 저는 ㄱ)과 ㄴ)이 상호모순된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일차적인 문제는 ㄴ)에서의 "합리적"을 어떻게 이해하는가가 될 것입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산체님의 글들은 저 말을,
과학의 패러다임 전환은 과학 외적인 정치적, 사회적 압력, 권력 관계에 의한
것이 아님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하고 이습니다.
즉, 과학의 패러다임 전환은 과학 외부의 힘에 의존한 과정이 아니며,
과학 내부의 어떤 동의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 정작 문제는 건드리지도 않는 셈입니다.
문제는 그 과학 내적 동의 절차를 규제하는 규범, 기준은 정확히 무엇인가이기
때문입니다. 즉, 제가 보기에 산체님은 합리성의 핵심을 건드리지는 않고,
'패러다임 전환이 과학 외적 권력 관계에 의해 일어난다'는 주장(A)을
'패러다임 전환은 비합리적'이란 주장(B)으로 등치시키고,
B를 부정함으로써 그로부터 '패러다임 전환은 합리적이다'(C)를 끌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A와 B는 외연이 같지 않습니다. 과학 외적 권력 관계에 의해
패러다임 전환이 결정되지 않는다 해서, 패러다임 전환이 어떤 다른
비합리성에 의해 결정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령 "급진적으로 해석된" 관찰의 이론 의존성 테제를 따를 때,
과학은 내적으로 일관된, 하지만 양립 불가능한 다수의 이론 체계들 사이에서
"자의적으로" 하나를 선택하게 됩니다. 과학이 어떤 이론 체계를 선택하느냐는
객관적인 증거에 의해 완전히 지지되지 못합니다. 그런 점에서 과학은
자신이 선택한 이론 체계들을 정당화할 수 없고, 그 점에서 이는 어떤
과학 외적 권력 관계망에 대한 참조 없이도 비합리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ㄱ)과 ㄴ)이 모순적이라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과학이 어떤 이론 체계, 또는 보다 넓게 패러다임을 채택하는 이유가
과학자들의 다수 동의에 의해서 일어나고, 이 동의는 "합리적"이라고 말하려면,
어떤 방식으로든 한 패러다임이 다른 패러다임에 비해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패러다임의 선택은 결국
자의적일 수밖에 없고 이는 비합리성에 결국 자리를 내주는 셈이 되니까요.
문제가 생긴 것은, 사실 ㄱ)에, 즉 산체님이 쿤이나 이론 적재성의 개념을
지나치게 상대주의적으로 해석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론 적재성의 개념은, 객관적 관찰과 검증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관찰은 물론 특정 이론 틀에 의존적일 수 있습니다만, 그 의존의 정도는
경우에 따라 상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감각 지각에 의한
일차적 관찰은 고도의 이론적 작업들을 전제하는 관찰 도구들, 실험 설계 등을
통한 관찰보다 객관적이며, 사실 거의 이론 의존적이지 않다고 얘기합니다.
또, 캉길렘 같은 이의 경우, 이론과 개념을 구분함으로써 이런 난점을 해소합니다.
생물학에서 반사 개념이나, 세포 개념에 대한 그의 역사적 연구가 잘 보여주듯이,
개념은 상반된 이론들이 공시적, 통시적으로 공유하는 실재적 기반이며,
그런 점에서, 이론들은 변화하더라도, 개념은 상대적으로 불변하기에
이론들의 진리값을 비교할 수 있는 객관적 지반이 보장됩니다.
(사실 쿤의 작업조차 이런 관점에 따라 이해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산체님이 거론하신 것처럼, 천동설은 완전히 틀린 이론이고,
그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비과학적이라고 얘기하지 않고 그 나름대로의
과학성을 가진다고 말합니다. 이는, 모든 과학적 주장들이 패러다임에
의해 완전히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통패러다임적인 객관성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천동설이나 플로지스톤설은 거부된 패러다임이지만,
그런 거부와 어느 정도 독립적으로, 이런 이론들 안에는 다른 패러다임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합리성, 과학성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관찰의 이론 의존성 명제는, '어떤 주장이 객관적으로 옳다'라는 주장이
불가능함을 필연적으로 함축하지 않습니다. 객관적 진리는 과학적 활동이
존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이상적 규범입니다. 모든 과학적 활동은
자신의 연구가 사실이고 진리라는 주장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과학자들의 동의는 객관적 진리에 의해 이루어지고,
이는 합리성의 핵심이며, 그런 동의 절차의 정확한 방식에 대한 이해가
과학철학의 핵심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물론, 과학자들이 행하는 모든 동의가 그러함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들도 분명 많으며, 사실 과학의 역사에 어떤
합리성, 진보성이 있다면 그것은 객관적 진리에 의한 동의가 점차로
확대된다는 점에 있을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또 다시, 이 확대, 이 진보는
결코 선형적이지 않습니다.)
A와 B의 등치, 즉 거칠게 요약해서 "과학은 과학 외적 권력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는 입장과
"과학의 변화는 비합리적이다"는 입장의 등치는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된 걸까요? 사실 잘 살펴보면 제가 제시한 입장 자체에 모순이 있지 않은지
의심해볼 수 있습니다. 산체님과 반대로, 저는 한편에서는 이론의 객관적 참을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적 활동에는 외적 권력 관계망이 개입한다고
적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여기에 모순은 없습니다.
제 주장은, 정확히 말하자면, 과학이 세계의 객관적 모습을 참되게 인식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런 결과가 나오는 과정에는 항상 외적 권력 관계망이 개입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과학의 인식은 자동적으로 진리를 생산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진리의 생산을 방해하는 "인식론적 장애" 또는 "과학적 이데올로기"를
극복해내는 또는 전유하는 변증법적 과정입니다. 과학은 참된 인식을 획득하지만,
그런 인식은 오직 결과로서만 주어지며 그런 한에서 그 결과는 결코 선험적으로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로부터, 과학의 진보는 사회 전체의 합리성의 진보와
궤를 같이 하며, 과학의 진보를 가로막는 장애들을 명확히 인식하고 그를 극복하기 위한
이성적 공동체를 확립하고 확장해나가야 한다는, 일종의 합리성의 윤리가 도출됩니다.
하지만 훨씬 더 많은 논의들을 함축하는 이 이야기에 대해서 더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단지, 이 이야기는 과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순진한 과학자들의 관념과 달리
과학사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며(쿤의 업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논리경험주의자들에
반대하여 과학을 그 이상적 규범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 실제 모습에 따라 연구함으로써
과학사의 독립적 가치를 보여주었다는 점 말이죠), 게다가 과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모종의 윤리적 차원이 요청됨을 보여준다는 사실만 덧붙이겠습니다.
이 정도만으로도, 다시 앞으로 돌아가 A와 B가 같은 주장이 아님을 보이기에는
충분합니다. 그리고 역으로, 이런 논의가 없다면, A와 B가 같은 주장으로
보일 수 있을 여지 또한 충분합니다. 따라서, A와 B의 등치는 아마도 제 입장에 대한
산체님의 독해에서 비롯된 오해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찌됐든, 저는 과학이 단순히
상대주의적, 관점의존적이란 주장은 비판하면서도, 여전히 과학에는 외적 권력 관계망
(이는 제가 예전 댓글에서 지적한 대로 이익집단 간의 단순한 정치 관계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사회 전체의 다양한 변화들을 포함하는 매우 폭넓은 개념입니다)이 개입한다고,
그러면서도 과학은 합리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1. 과학의 합리성을 말하려면 그것을 객관적 진리와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지어 규정해야
하며, 따라서 ㄱ)은 폐기 내지 많은 부분 수정되어야 한다.
2. 반대로, "과학에는 외적 권력 관계망이 개입한다"는 주장과 "과학을 통해 객관적 진리를
획득할 수 있다"는 주장은 모순적이지 않고 양립 가능하다. 과학의 합리성은 외적 권력 관계망
의 개입을 통제하고 극복함으로써 객관적 진리를 획득하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어쩌면, 산체님이 ㄱ)과 ㄴ)의 모순적 명제들을 통해 주장하려 했던 바가
사실 제가 말하는 바와 비슷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말해, 이미 제 입장 자체가
ㄱ)과 ㄴ)에 들어있는 상식적인 직관을 모순 없이 조화하려는, 다른 방식의 시도이기도 합니다.
이제 이로부터 김리벌님에 대한 논점으로 넘어가보겠습니다.
사실 김리벌님의 입장은 산체님과는 정반대로, 제가 보기에는 순진한 과학주의자의 입장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가장 먼저, 위의 요약 2의 내용부터 이 맥락에 맞추어 보다 정확하게
제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학의 합리성은 '외적 권력 관계망의 개입을 극복하여 객관적
진리를 획득하는 과정'이란 이해는 얼핏 보면 과학적 탐구의 순수성을 옹호하는 입장으로
읽힐 우려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결코 순수성에 대한 주장이 아닙니다.
과학적 활동에는 항상 외적 관계망이 개입하기 때문에, 이는 항구적인 과학 비판이
과학에 필수적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과학에 대한 반성, 성찰로서 과학사와 과학 윤리가
요청됩니다. 이는 과학을 전문가들의 전유물로 만들지 않고, 과학을 사회와 연결시켜
이성적 토론의 장으로 구성된 합리적 사회의 구성에 참여하게 만드는,
"공동의 성찰 작업"입니다.
이런 성찰적 작업 없이 과학을 맹목적으로 추종할 경우, 이는 곧바로
과학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과학이 산출하는 인식들은
분야에 따라 정도 차이가 있지만, 항상 "이미" 외적 관계망이 개입하여 그 가치와 의미를
결정합니다. 순수 자연과학 연구조차 그 효용성에 따라 우선 순위가 달라지며 그 차이는
곧바로 사회, 경제적 관계망에 연결되어 사회의 변화에 영향을 끼칩니다. 경제학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따라서, 마치 현재의 학자 공동체가 현실화된 이상적 규범적 공동체
이기라도 한 양, 주류 경제학을 전범시할 것이 아니라, 각자의 주장들을
그 자체로 검토해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김리벌님은 이 교과서적인 입장을 잘 알고 있음에도
그를 실천하지 않습니다. 장하준을 비판하려면, 그 주장의 타당성을 검토해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주류 경제학의 규범 운운에 대한 온갖 잡다한 이야기들은 다 갖다 버려도
무방한 것들입니다. 제가 애초 개입한 것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과학의 비판자(칸트적 의미에서)는 과학을 내재적으로 비판하는 동시에 그렇게 비판되어
한계 규정된 과학적 합리성을 통해 이성적 사회를 구성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는 반면,
과학의 이데올로그는 저러한 비판 과정 없이 현행의 과학이 마치 자율적으로 온전히
이성의 힘만으로 진화하고 있는 양 전제하고 이러한 현행의 과학에 맞추어 사회를
조직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는 이미 제가 여러 차례 밝혔던 입장이고, 사실 김리벌님은 제가 왜 계속
이런 뻔한 주장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실 겁니다(물론 제가 보기에 그 몰이해의
원인은 김리벌님 본인에게 있습니다. 본인이 하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모르고
논점이 어딘지 모른 채 주류 경제학을 모른다고만 얘기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방금의 이야기는 산체님과 관련하여 제가 개진한 입장이 김리벌님 같은
분의 입장에서 오해될 여지를 막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김리벌님께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보다 사소한 것들입니다.
1. 이론 적재성의 문제
김리벌님이 산체님의 글에 달은 댓글에서
이론 적재성이란 말을 사용한 용례들을 보겠습니다.
"비평자들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주류 경제학에 적재되어 있는 이론에 대해 모르고..."
"...비주류가 충분히 잘 갈고 닦여 있다면 주류가 무너지는 상황이 올 수 있다고 봅니다.
여기서 충분히 잘 갈고 닦여 있다는 얘기는
산체님의 표현을 빌자면,
비주류가 주류를 대체할 만한 "이론적재성(theory-laden)"을 축적했다는 의미입니다."
"주류경제학이 이론을 적재해 온 과정은 그 비판들을 포함한 다른 여러 비판, 오해들을
차곡차곡 제압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이 세 대목에서, 김리벌님은 '이론 적재성'이란 말을 '이론의 축적', '누적'(또는 심지어 누적적 진보)
이란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이 분이 '이론 적재성'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만약 아니라면, 어떻게 '이론 적재성'이란 말을 저런 맥락에서 사용하고 있는지
해명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뿐만이 아니라, 산체님과 저 사이의 논쟁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그리고 이론 적재성이 그 논쟁에서 갖는 의미를 잘 알고 있다면,
"예측력" 따위로 과학 패러다임의 변화를 설명하려는 어설픈 시도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참고 삼아 말하자면, 실제로 예측력은 과학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실제로 쿤을 비판한 라카토스의 연구 프로그램 개념은 예측력을 중요한 요소로 포함합니다.
그러니까 사실 쿤과 라카토스 간의 논쟁, 대립은 예측력이 과학적 변화를 설명해주는
요소가 될 수 있느냐 여부가 하나의 쟁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전칭명제 부정의 문제
- 김리벌:
"'A가 B에 필수적이다'는 전칭 명제고, 전칭 명제에 대한 부정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 무슨 근거에서 전명 명제 부정은 별로 의미가 없다고 딱 잘라 말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얘기하시려는 바는 사실 '부분 부정은 별로 의미가 없다'란 얘기인 것 같은데,
전칭 명제 부정(또는 전칭 부정 명제)과 부분 부정은 다른 겁니다.
게다가, 과학에서 귀납적 반증 자체가 부분 부정에 따라 이루어지는데,
왜 그게 의미가 없습니까. 다 맥락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얘기입니다.
앞의 댓글에서도 이미 얘기했지만, 저는 "과학의 패러다임 변화에는 외적 권력 관계망이
개입한다"고 말했고, 산체님은 이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반박한 것입니다.
단지 '그게 다가 아니다'는 부분 부정 식의 두루뭉술한 얘기를 한 게 아닙니다.
명제 논리를 그렇게 어설프게 가져와서 다른 이의 주장을 재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마 님이 다른 이의 글에 갖다댄, '맥락을 자의적으로 절취한' 형식 기준들을 제가 사용했다면,
아래와 같은 문장을 쓴 것은 경제학도로서 부끄러운 일이라고 얘기했을 겁니다.
"어떤 이론이 자유무역을 정당화하면 실증적 근거를 요구합니다.
실증적 근거를 제시하면, 현재 데이터로는 달성 불가능한 수준의 엄밀함을 기준으로 그 근거를 공격합니다.
그러나 동일한 기준으로 보호무역 정당화 실증적 연구(그런 연구 결과도 거의 없거니와) 를 검토하면
단 한 문장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김리벌님은 언젠가 저에게 '제가 한 말들을 나중에 어떻게 주워담으려 하는지
모르겠다'고 한 바 있습니다. 예전 hubris님의 글에 대한 논의를 비롯해서,
김리벌님이 저와의 토론에서 제 지적에 대해 본인의 말들을 주워담은 적은
아직까지 한 번도 없는데, 앞으로 얼마나 잘 주워담으실지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