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조건 GV를 보고..(나카다이 다츠야 사인 재중)

본문 들어가기 전에... GV는 뭐의 약자인가요?

 

 

사실 저는 중학교때 "인간의 조건"의 마지막 장면 스포일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상당히 지적이면서 열정이 있었던 중학교때 체육선생님이 교실 수업때 이 영화 이야기를 해 주었거든요. 그런데 그 선생님도 영화를 보고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고 아마 어떤 책에서 읽었거나 다른 사람한테 들은 이야기를 한 것 같아요. (당시는 일본영화를 볼 수 있는 경로가 아예 없다시피 했던 시절이니까요. )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때 선생님이 해준 이야기는 실제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는 약간(혹은 상당히) 달랐다는 겁니다.

선생님의 이야기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러닝타임 9시간이 넘는, 기네스북에 오른 대작 일본영화가 있다. 줄거리는 2차대전때 전쟁에 끌려간 일본 군인이 생사를 뛰어넘는 갖가지 고생을 하는 내용인데 전쟁이 끝난후 만신창이가 된 주인공은 고향에 돌아오게 된다. 군인의 아내는 오랜 세월동안 역시나 갖은 고생을 하며 전쟁에 나간 남편을 기다린다. 그러나 주인공은 집 앞까지 도착해서 만신창이의 몸으로 지쳐 쓰러지게 되고 하염없이 내리는 눈 속에서 죽어간다. 아내는 멀리 창밖으로 어떤 부랑자가 쓰러져 죽어가는 것을 지켜본다. 그러나 그가 남편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알지 못한채 그저 힘없이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끝에 "오직 집에 돌아가리라는 일념 하나로 버텨오다 결국 도달하지 못하고 집 앞에서 죽고마는...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와 같은 말을 덧붙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 20대였던 체육선생님의 치기가 엿보이기도 하는 대목입니다만...  영화라는 매체를 그리 많이 접해보지 않았던 시골 중학생에게는 상당히 강렬한 인상이 남는 비장한 이야기였습니다.

 

이후 오랜 시간이 흘러 드디어 그 전설의 영화를 보게되었고,  영화를 보면서 계속 마지막 장면에 대한 기대를 품고 있었습니다만...  다르더군요ㅠ.ㅠ... 저는 아마도 일본에서의 모습부터 나오고 남방 전선으로 가서 싸우는 장면이 나오다가 나중에는 본토로 돌아오는 배를 타는 주인공을 멋대로 상상했습니다만 일단 영화의 배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만주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초에 만들어진 영화인데... 이때는 전쟁이 끝난 후 불과 14,5년이 흐른 시점입니다. 말하자면 1997년쯤 원폭 투하와 함께 항복 선언이 이루어졌고 현재 시점으로 영화를 보고 있는 셈인데 그 동시성의 감각은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GV에서도 당시 개봉당시 반발은 없었는가? 문제가 될 소지는 없었는가? 하는 질문이 나왔습니다만 나카다이씨는 그럴 일은 전혀 없었다고 하네요. 전후 일본은 군부가 완전히 해체되었고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전쟁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사실 이런 질문은 80년대까지도 군부의 지배를 받았던 한국인의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질문들인 거죠.

너무나 적은 인원수만 처벌을 받았지만 그래도 전범 재판이라는 게 있었고,  '군대'라는 존재 자체가 사라졌으며 (나중에 자위대란 이름으로 부활하기는 했죠), 덴노가 인간신에서 보통인간의 지위로 내려온 다음이니까요. 당시라면 군국주의와 전쟁을 찬양하는 사람이 오히려 탄압받는 시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오히려 나카다이씨는 영화속에서, 당시로서는 힘들었던 스탈린에 대한 비판을 한 것이 의미있는 시도였다고 언급하는데... 해방이후 60여년을 한결같이 반공 분위기에서 살아왔던 한국인으로서는 이 말이야말로 신기하게 들렸습니다. )

 

미시마 유키오가 군국주의 부활을 외치는 시위 후 할복자살한 것이 1970년인데... 이런 사회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이전에도 이후에도 일본의 과거를 긍정하고자 하는 우익의 목소리는 꾸준히 있어왔고 특히 일본이 경제발전으로 국제사회에서 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우익적인 분위기는 점점 확대되는 듯한 분위기입니다만....

 

나카다이씨는 이 영화가 전쟁에 대한 일본 내부의 반성과 주변국들에 대한 사죄의 의미가 들어 있는 영화다..라고 GV서두에 소개했습니다만, 일본인 입장에서라면 몰라도 가장 큰 피해자인 한국인 입장에서는, 그런 의미라면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쟁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고 있으며 전쟁에 희생되는 하급 병사들과 서민들의 아픔을 처절하게 그리고 있기는 하죠. 그러나 침략의 희생자인 중국인과 한국인에 대한 묘사는 그냥 양념으로 들어간 느낌입니다. 만주에서 중국 노동자들과 죄수들을 가혹하게 학대하는 일본군조차도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 어쩔수 없이 행동한 다같은 희생자에 불과할 뿐이다..라는 시각은 일말의 사실을 담고 있을 수는 있으나.. 실제 악귀같은 일본군과 일본인들을 겪었던 우리 입장에서는 실소가 나오는 것도 어쩔 수 없겠죠.

 

특히나 조선인은 9시간 30분 내내 딱 두번 등장하는데 한번은 중국인과 일본군 사이에서 이득을 취하는 악당으로 나오고요.  또 한번은 일본 패망 후 만주에서 조선으로 돌아가는 유민으로 나오는데 잠깐 지나가는 역할이지만 흥미로운 것이... 희생자 중국인과 가해자 일본인의 중간자적인 역할로 보고 있지 않나 하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중국인은 몰라도 조선인은 절반쯤은 일본인으로 대우해줬으니 일본에 대한 반감은 별로 없을 것이다..라는 시각을 가지고 보는 듯한 느낌?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겠지만 어쨌든 아쉽더군요.

 

배우 나카다이 다츠야씨는 작년의 요짐보 GV때도 뵈었습니다만, 당시는 가게무샤의 주인공이었다는  외에는 잘 알지 못하는 배우였기 때문에 별 감흥이 없었는데 이후 다른 영화들을 보게 되고, 이번에 특히 인간의 조건 6부작을 다 본 이후라서 그런지 존재 자체로도 감동이 느껴지더군요. 꽃미남이었던 젊은 시절부터 '가게무샤'와 '란'에서의 중년 카리스마, 그리고 80을 바라보는 현재 인자한 할아버지같은 느낌까지. 위대한 배우의 과거와 현재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어서 즐겁고 의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생전 처음으로 연예인에게 사인도 받았군요. ^^ 관록의 배우라서 사인도 아주 멋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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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仲代達矢 오른쪽은 제이름과 さんに(~씨에게)인듯
    • 일본제국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는 한국민족은 아닙니다. 물론 '우리' 는 교과서에서 줄곶 그렇게 배워왔죠.
    • 저는 이 영화가 상당히 객관적인 시선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좋았어요. 그러니까 어느나라 사람은 나쁘고 어느나라 사람은 좋고 식으로 묘사한게 아니라 여러 종류의 '개인'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그려냈거든요. 예를 들어 소비에트가 부정적으로 그려지지만 제일 윗대가리인거 같은 젊은 장교는 나름 상식적인 인물로 보여지잖아요. 그리고 조선인 같은 경우는 거의 비중이 없다고 봐야겠죠. 아무래도 무대가 만주다 보니까...
    • 저도 예전부터 인간의 조건에 등장하는 조선인 묘사가 거슬릴 거라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는데,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한 덕분인지 걱정만큼 불편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캐릭터의 전사가 궁금해지면서,
      살아남기 위해서 저렇게 추악해질 수 밖에 없었을만큼 힘들었다는 걸까...라고
      "억지로 좋은 쪽으로" 생각해주게 되더라구요.
      적어도 '크래쉬'같은 영화의 삼류 악당같은 묘사보다는 훨씬 나았어요.
      뭐 그거나 그거나 한인 묘사는 비슷비슷하지 않냐고 느끼신 분들도 있겠지만...
    • 인간의 조건은 에리히 폰 스트로 하임의 'Greed' 와 파스빈더의 '베를린 광장'과 함께 언제 꼭 도전해 봐야지 하는 장편 작품입니다.
      언젠간 보게 되겠죠.

      '타인의 얼굴'에서의 목소리만 듣고도 나카다이 타츠야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목소리가 아주 멋지죠. 멋진 목소리로 혹시 원령공주에서 늑대신의 목소리를 나카다이가 더빙한 것 아닌지 궁금해요. 계속 나카다이의 목소리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하라키리'도 멋지고, '사무라이의 반란'에서 미후네 토시로 보다 나카다이의 존재만으로 긴장감을 일으키게 하는 배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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