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죽었던 곳.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래서 모든 죽음은 기억되지 않는다. 우리는 특별한 자들의 죽음만을 기억한다. 특별한 사람들의 죽음이 머무른 장소를 기록한다.

 

때로는 기록되지 않는 때도 있다. 특별한 죽음의 기억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의 숫자가 많거나, 그들의 권력이 강한 경우다. 이럴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아직까지도 권력은 강고하고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다면.

 

요새는 뜸하지만 예전에는 혜화 로터리를 참 많이 다녔다. 내가 다닌 대학교가 그쪽에 있어서였다. 대학로에서 로타리를 한바퀴 돌면 대부분은 창경궁쪽으로 나아간다.  그 때 나는 한 부분을 응시하곤 했다. 

 

오늘날 한 서점과 한 약국 사이의 작은 부분. 그곳에는 어떤 이의 죽음이 머무른 장소다. 1947년 7월 19일. 오늘 여운형이라는 특별한 사람이 이곳에서 숨졌다.

 

여운형은 독립운동가다. 이 간단한 사실도 설명해야 할 만큼 그에 대해 잘 모른다. 대다수에겐 특별한 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김구나. 안중근, 윤봉길, 이승만처럼 그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의 죽음을 추억하는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애써 그의 죽음이 머물렀던 장소를 더듬거린다. 그 때마다 짧게나마 눈을 감는다. 도대체 여운형의 무엇이 더듬거리게 할까.

 

여운형은 1886년 태어났다. 명문가의 자식이었다. 아비는 고루한 양반이었다. 여운형은 아비와 반대의 길을 걸었다.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평생 하느님의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노비들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3,1운동 이후 결성된 임시정부에서 외무부장관을 지냈다. 34살때 일이다. 일본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일본 의회가 그의 말을 들었고, 한 관료는 "내가 조선에서 태어났어도 여운형처럼 독립을 주장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 뒤로도 독립운동을 계속했고, 조선중앙일보 사장을 지내 손기정의 올림픽 금메달 당시 일장기를 삭제하는데 앞장섰다. 동아일보보다 조선중앙일보가 먼저였다.

김구나 이승만이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그는 국내에 있었다. 비밀리에 건국동맹을 결성했고, 해방 이후를 준비했다.

 

해방 당일 총독부는 여운형에게 국내 치안을 맡겼다. 여운형을 이를 받아들여 건국준비위원회, 이른바 건준을 만들었다. 그때까지는 여운형이 국내에서 가장 대우 받는 독립운동가였다. 1945년 말 시중의 여론은 가장 대통령에 어울릴 사람으로 여운형을 지목했다.

 

그 뒤 66년이 지나는 동안 우리는 그의 이름을 잊어버렸다. 그가 왼쪽에 우호적이었다는 이유 였다.

 

여운형은 독립운동에 관심을 보이는 이념이나 조직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접촉하는 성품이었다. 1920년대 독립운동에 가장 큰 관심을 보여주었던 소비에트 공산당과 접촉이 있었던 것도 당연했다. 그는 레닌을 만나기 위해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기도 했고, 잠시나마 고려 공산당이라는 조직에 몸을 담기도 했다. 실례 상으로도 그는 우파보다는 좌파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의 한국내 지지기반은 사회주의에 가까웠다. 그 역시도 근로 대중의 권리를 중요시 여긴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본래적으로 그는 공산주의와는 따로 떨어져 있던 사람이었다. 남북 분단이후 공산주의와 결별하고 월남한 강원룡 목사는 여운형을 두고 이렇게 평했다. "첫째는 자유주의, 둘째는 민족주의, 셋째가 사회주의인 사람이다"라고. 오늘날로 따지고 보면 사회민주주의자는 아니었을까.

 

6.25이후, 그리고 빨간색이 멸균되어 버린 이후의 한국사회는 여운형의 이런 모습을 용납하지 못했다. 그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해방 이전 부터 극심하게 대립되어 오던 좌우간의 불화는 1945년과 46년의 암살 사건과 폭동등이 호를 그리며 더 심화되어졌다. 여운형은 그 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했고, 조정하지 못했다. 연설가였으되 정치가는 못되었고, 선동가였으되 마음씨는 착했던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는지도 모른다.

 

1947년 7월 19일 그는 창경궁 근처에 있던 자신의 저택에 들르기 위해 친구의 집을 나섰다. 오늘날 혜화동 로터리에서 차를 탔다. 시동이 켜지고 천천히 바퀴가 굴러갔다. 로터리를 지나 창경궁 쪽으로 차가 핸들이 껶여질 무렵. 한지근이라는 청년이 그의 가슴에 두 발 총을 쏘았다. 그는 절명했다. 좌우간의 극심한 대립속에서 아무에게도 환영받지 못해 17번이나 테러 위협을 받았다. 18번째 시도가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좌우간의 합작운동을 추진하던 시점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실낱같이 남아있던 좌우 간의 합작 흐름은 깨어졌다. 김구가 38선을 넘어간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각각 권력을 잡은 이승만과 김일성은 자신의 이념을 밀어붙였다. 그 안에서 한국전쟁이 터졌다. 무수한 이들이 죽어나갔고, 증오와 적개심이 이후의 한반도를 지배했다. 그렇게 66년이 지나갔다. 그 안에서 좌와 우 사이를 넘나들으려 했던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당연했을 것이다. 더욱이 남한에서는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가 특별한 사람임에도 죽음이 머무른 장소에 비석하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는 그를 잊었다. 잊는 것이 당연했다. 극과 극이 난무하고, 그것만이 기억되는 세상에서 여운형은 금기시되는 단어였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여운형을 기억하려 한다. 다만 오늘만이라도 기록하려 한다. 그것이 옳다고 해 기억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가 특별하다고 해 기록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가 추구하려 했던 것, 나만이 아닌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 등을 누군가는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그런의미라면 다만 여운형이 죽었던 곳으로 기억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누군가가 죽었던 곳 그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것이 여운형이라는 특별한 사람이 죽었던 장소를 기억하는 방법이다. 그의 마지막 유언이 이를 상징한다.

 

여운형의 마지막 유언은 "조국,,,, 조선" 이었다.

 

 

덧) 오늘은 여운형 선생이 돌아가신지 65년째 되는 날이죠. 공교롭게도, 그의 정치적 후계자나 다름없는 조봉암 선생도 1949년 7월 19일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뒤를 따라 이승만 박사도 7월 19일날 사망했죠.

    • 현대사를 잘 모릅니다. 덧글의 "여운형..., 조봉암... 그 뒤를 따라 이승만..."에서 '그 뒤를 따라'의 의미는 7월 19일 날짜만을 뜻하는 것인지요?
    • 저도 현대사 잘 몰랐는데, 최근에 수업 들으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암살되지 않으셨더라면 더욱 큰 일을 하셨을 분이셨겠다는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의 기득권을 지켜온 사람들이
      권력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까지 하는 사람들인가
      새삼 느끼기도 했네요.
    •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 혜화동 로타리를 지날 때 가끔 생각을 하던 일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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