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서 잠깐 섬에 있었을 때

군 복무기간중 잠깐, 겨울동안 서해의 어느 섬에 있었어요. 주민이 많지 않은 작은 섬이었습니다.

전 행정병이었습니다. 저와 동기가 그 행정실을 지켰는데, 286AT 컴퓨터는 고장이 나있었죠.

유일한 서류작성 기계는 수동 타자기였고요. 기관장이 왔다갔다 하는 소리가 들리면 수동 타자기를 와다다다 치면서 (그거 사용하신 분들을 아시겠지만 소리가 좀 요란합니까) 일하는 티를 냈죠. 수동 타자기로 편지 써서 학교에 보내니 낭만 돋는다는 답변이 돌아오기도 했었습니다. 한번은 조리하사가 일주일간의 식단표를 주고 제가 그걸 타자로 치는데 졸았나봐요. 조리사가 장난으로 쓴 마스터베이션국을 그대로 쳐넣었지 뭡니까.

 

주말에는 섬도 쉽니다. 섬에 정박해있는 기러기(요즘은 참수리라고 하는듯)라고 가장 작은 군함들도 쉬지요.

PC가 고장났으니 굳이 사용할 일이 있을 때는 그 기러기에 가서 워드를 작성하고 프린트를 합니다.

토요일 오후 볕이 기러기 안으로 들어오고, 잔잔한 바다에 정박해있는 기러기가 요람처럼 흔들거리면 절로 잠이 쏟아지죠.

그렇게 꾸벅 졸다가 프린트 한 문서를 들고 다시 섬으로 돌아간 기억도 있군요.

 

점호 이후에는 식당에 내려가 조리사가 해주는 라면도 야식으로 먹었습니다.

그리고 월요일 밤 11시에는 내무실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엑스파일도 시청했었네요.

 

이 널널함이 육지(사령부)로 발령받으면서 깡그리 사라졌지만, 거기서는 또 거기서만의 어떤 괜찮은 일들이 생겨났죠.

그 괜찮은 일들 중에선 우연한 것들도 있고, 발악을 했는데 그게 또 순기능으로 된 것도 있고, 스스로 만들어 나간 것도 있습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군대라는 곳에 있었기 때문에 오로지 생긴 기억이나 경험이 있는데, 그중 꽤 괜찮을 것들도 있고요,

쓸데 없는것들도 물론 많고, 거지같은 것들도 있지요. 그런데 그 거지같은 것들보단 괜찮은 것들이 전 더 많았던 거같습니다.

군대 말고 그냥 사회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무위도식 2년을 보낸다... 더 좋은 시기를 보낸다고 전 장담 못할 거 같아요.

 

아래 어떤 분께서 너무 거창하게 어떻게 그 시절과 화해하냐고 질문하시기에,

그런 생각 해본 적도 없는 저라 지극히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그냥 위에 적은 그런 곳이기도 하니까요.

 

+

육지 에피소드 하나. (여기서 이야기한 적이 있는 것도 같지만...)

휴가 때 학교에서 데카메론(파솔리니)과 ZOO(그리너웨이) 비짜 비디오를 빌려놓고 관물함에 놨었죠.

그런데 하필 그때 관물함 검사가 있었고, 그게 딱 걸렸는데

검사하던 해병 장교가 그거 보고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돌려줬어요.

내심 놀랬죠. 얼마 전에 토토로 테이프 반입하다가 헌병대에 압수당했는데 지인 동원해서 겨우 찾았었거든요.

 

 

    • 거창하게 화해씩이나…했던 사람인데요.
      제가 거창해질수밖에 없는건‥면제자이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뭐 잘못한거같은 기분이 점점
    • 이 이야기를 빼먹었는데, 화해는 물론, 마찬가지로 군시절이 자랑스럽다거나 하는 생각을 해본적도 없습니다. 자랑스러울 건 정말 없지요. 그냥 나름의 괜찮은 구석도 발견하고 똑같은 또래들이 모인 곳에서 위계질서가 압축된 곳을 경험하고 온 정도.
    • 가끔영화/ 그러게 말이에요. 언제쩍 이야긴가요 저게.
    • 이천년초반 의경제대 했었는데요.

      시위진압 나가면 정말 이게 바로 지옥의 전쟁 이구나 를 방불케하고 부대안에서는 엄청난 구타를 겪으면서 군생활했었습니다.

      짬이 안될 시절에 고참들중에 제대 후에 먹을거 사들고 대원들이나 직원들 보러 다시 경찰서 한번씩 방문하는 제대 고참들 정말 이해안됐었는데..

      제가 제대후에 1년정도를 가끔 서에 인사하러 가고 그랬....;;.........

      요즘도 한번씩 그앞으로 지나갈때 일부로 천천히 걸어가면서 안을 들여다 보곤 합니다. 몰래 숨어서 짱박혀 울었던 곳도 가보고...ㅋㅋㅋ

      도시에 있으니깐 통닭시켜서 후임들이랑 몰래 소주도 같이 먹고 했는데... 진짜 그맛이 참... 직원들도 알면서 전부다 모른척 넘어가주고...

      다시 군대가라고 하면 진짜 죽도록 싫지만...한번씩 그때가 그리워 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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