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망했어요.

네네. 요즘 fermata 님의 글을 재미나게 읽고 있노라면, 아아 박근혜 망했어요. 라는 말만 떠오릅니다. 대세라는 믿음은 참 거품같은것이로군요. 물론, 이렇게도 다이나믹한 코리아니까, 남은 일년여동안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박근혜는 '수비형 정치인' 입니다. 형세를 읽고 날카롭게 치고나간다거나, 이슈를 선점하여 공세적 위치를 취하는 것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마지막순간까지 의중을 감추고 뜸을 들이다가, 대세가 결정날 무렵쯤에 가장 안전한 방향으로 살짝 발을 들이미는 것으로 지난 몇년간 꽤나 재미를 보아왔지요. 그런데, 의중을 감추다니, 과연 감출 의중이 있긴 했던걸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수첩공주' 라는 귀여운 별명이 왜 생겨난 것이겠어요. 수첩 없이는 한마디도 못하는, 컨텐츠가 없는 정치인이라는 세간의 평가에서 나온 것 아닙니까. 지금까지 보여준 바로는 박근혜는 말을 그다지 잘 못해요. 한나라당 경선 때는 우리 가카에게도 발렸습니다. 가카는 뭔가 내용은 없는 얘기를 줄줄줄줄 해대는 데 반해서, 공주님은 그냥 버벅버벅. 이산화가스니, 산소가스니 했던 것도 그때고요.



그러니, 박근혜로서는 말을 극도로 아끼는 것은 나름 훌륭한 전략이었습니다. 괜히 말많이 하다가 실수해서 밑천 드러낼 필요는 없는거죠. 이정도 무게를 지닌 정치인이라면 당연히 입장을 밝혔어야 할 타이밍에, 박근혜는 말을 아끼고 한발 물러서있는 포지션을 고수하면서 '신중하고 원칙을 지키는 정치인' 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해왔습니다. 그 사이에 박근혜의 대항마들은, 여기자 뺨을 만지고, "변사또가 춘향이 따먹는 얘기" 나 하고, 여기자에게 "맞을래요" (정확한 워딩은 아닙니다만) 라고 하고, 주민투표쇼를 벌이면서, 줄줄이 자살골 행진을 벌였습니다. 야권엔 아예 인물이 보이질 않았고요. 이미 벌어놓은 점수는 많고, 남은 일년동안 조심조심 수비만 하면 대권은 따놓은 당상이었죠. 지금까지는.



올초까지만 해도 문재인, 안철수는 둘다 정치에 발을 들여놓지 않을 것처럼 보였지요. 여러 재야의 인재 중에서도 안철수는 가장 마지막까지도 움직이지 않을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문재인이 슬금슬금 자기가 할 일을 고민하기 시작하고, 이어서 안철수가 움직였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안철수 마저도' 움직였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문재인 하나만 해도 뒷통수가 뜨뜻미지근 한데, 안철수가 움직이고, 더군다나 반한나라당이라는 자기 노선을 확실히 그으면서 박원순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슬쩍 움직였더니 5% 지지율이던 박원순은 당선권에 가장 가까운 후보가 되어버렸고, 그 자신은 박근혜와 대등한 지지율을 나타냈습니다. 박근혜는 뭐가 초조한거죠? 문재인-안철수-조국-박원순 연합이 가시화되고 있다는 것이죠. 이 넷은 합리적 보수에서 중도까지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스펙트럼에 걸쳐있습니다. 거의 '뭘해도 되는 조합' 입니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병걸렸냐" 는 실언입니다.



겨우 하루. 안철수 지지율 역전 보도가 나온지 단 하루만에 자제심을 잃었어요. 아직도 갈 길이 멀고, 그동안 무슨 일이 또 일어날지 모르는데 고작 단 한 차례 지지율 역전에 공주님은 그만 발끈발끈 열매를 드신겁니다. 이게 뭘 뜻합니까. 박근혜는 이런 중압감에 그다지 강한 정치인이 아니란 겁니다. 



앞으로는 더할겁니다. 이미 무적의 대세라는 신화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더이상 수비적인 위치에만 머물 수가 없습니다. 정책을 보여줘야 하고, 이슈를 만들어내야 해요. 신중하고 안정된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전반전도 끝나기 전에 3-0 으로 승세를 굳혀놨기 때문. 큰 실책만 하지 않으면 대권이 눈에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아, 다 왔는데, 이제 거의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형세가 이상해져 버렸고, 초조한 기색을 그대로 다 보여버렸습니다. 겨우겨우 잊혀졌던 "싸우자는 거에요" 발언도, 기억속에 되살아났습니다. 기껏 쌓아올린 '신중한 정치인' 이라는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지고, 자기한테 불리하면 발끈하는 정치인이 되어버린겁니다.



지금까지 박근혜는 안 보여주고 감추어두면 이기는 정치인이었습니다. 이제, 그것만으론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보여줘야 해요. 근데, 초조합니다. 이렇게 초조한데, 말실수, 더이상 안 할 수 있을까요? 보여주려니, 뭘 보여주죠? 그 속에 감추어둔 컨텐츠. 과연 무엇이 있을까요. 저도 궁금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봐도, 꼬였어요. 부자 몸조심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일년이, 아주 지뢰밭이 되어버렸습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건, 안철수 까내리기, 조국 까내리기 밖에 없어보입니다. 까내린다고, 까내려질까요? 글쎄요. 망했어요. 박근혜 망했어요.


 

    • 이런 천기누설을 하시다니... 구구절절 동감입니다.
    • 말실수하는거보고 저도 좀 그런 생각들더군요.. 자신의 가장 훌륭한 재산을 이런식으로 쉽게 잃다니;;; 생각보다 너무 맥없이 무너지는 느낌?
    • 박근혜는 뭘 꺼내면 꺼낼수록 득보단 실이 많을 가능성이 농후하죠. 뻥카 쥐고 안 꺼내는 걸로 정점을 찍었으니.
      솔직히 진짜 떡 당선될 운명이라면 뻥카라도 아니길 빕니다. 현 대통령보다 더 악몽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건 그 때문이예요.
    • 위키리크스에서 한국 영남지방은 정책과 무관하게 한나라를 지지한다고 했죠.
      초원복집 사건에서 보듯 합리적 판단보다는 정서적 동질감이 지배하는 게
      한국 정치판입니다. 위기를 맞은 건 분명하지만 그쪽에도 시간이 남아 있으니
      아직은 낙관하기 이르죠.
    • 동갑합니다. 그런데 한국 정치가 워낙 다이내믹해서 망했다고 하기에는 이르고요.
      살아남을 수도 있겠죠. 그런데 살아남는다면 그 박근혜는 박근혜가 아닐 겁니다.

      뭔 말인고 하니, 현재의 박근혜가 아니라,
      노무현이 황당하고 허망하게 외쳤던 '대연정'을 합종연횡으로 실천하는 박근혜일 겁니다.
      그 계기가 지금은 수면에 떠오르지 않은 강력한 친이계 주자에 맞서는 식일 수도 있고,
      야권이 단일화에 진통을 겪고 있을 때 그 중 어느 한 쪽에 들러붙는 방법일 수도 있고요.

      뭐, 정말 저만의 '소설' 쓰기입니다. 그게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혀 아니고요.
      어쨌든 그런 소설 같은 변화가 없다면 정말 박근혜는 필패할 듯해요.
      또한, 설령 박근혜가 집권한다고 해도 그 박근혜는 지금의 박근혜가 아니기에
      적어도 현재의 이명박 정권보다는 훨씬 나을 거라는 주장이기도 합니다.
    • 아....그래서 점점 대꾸할 맛이 안났던거군요;;
    • 오랜만에저장욕구들게만드는글

      이거였군요
    • 그래도 대권이 수비한다고 주어지지는..처절한 검증을 거쳐야죠..아..그러고 보면 우리 가카는 차암 날로 먹었어...
    • 그런 약점들이 분명히 있지만 이쪽에 선수가 아직 하나도 결정이 안 된 상태이고 어떤 뻘짓들이 전개될 지 모르는 상황에선, 전혀 안 망했다고 봅니다.
    • 이번 추석에 친척들 만나보니까 한나라당 지지층에서도 박근혜는 안된다는 의견이 많더군요. 특히 어버이연합취향의 어른들...^^
    • 어... 조국교수가 듀게도 눈팅하는 거 아닐까요? ㅋ

      patriamea 조국
      박근혜 씨의 별호는 '발끈해'라고 올린 후 지지자들의 반발이 대단하다. 내 이름으로 장난치는 것 좋다. '밝은해'가 맞다고 주장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나에 대해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것은 가만 두지 않겠다.
    • 지나가다가/ 저도 그 트윗 보고 혹시? 했어요.
    • 박근혜의 최고 강점은 박정희 후광도 뭣도 아니고 '대세'라는 겁니다.
      그리고 '대세'를 유난히 중요시하는 건(될 사람과 동일화하기. 될 사람 밀어주기. 될 사람 찍는 게 내 표 안 썩히는 것이라는 믿음)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한국인의 두드러지는 투표 경향이었습니다.
      그 '대세'라는 강점이 흔들리는 건 박근혜에게 무엇보다도 가장 큰 치명타일 겁니다.
    • 김전일/ 정말 신이 계신다면 가카를 사랑하시는게 아닐까.. 정말 집권초부터 지금까지 의심됩니다.
    • 명문입니다. 명문.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하는지 여부를 떠나서 문장이 빼어나요.
      물론 내용도 더없이 훌륭하고요. (문장만으로는 명문이 될 수 없겠죠;;)
      아직 결론 내리기 성급한 지 모르겠으나
      "문재인-안철수-조국-박원순 연합이 가시화되고 있다는 것이죠. 이 넷은 합리적 보수에서 중도까지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스펙트럼에 걸쳐있습니다. 거의 '뭘해도 되는 조합' 입니다."
      이 가시화가 구체화 조직화 영속화되길 바랍니다.
      (이들은 사실 얼굴 마담으로 방향과 세력을 잡고, 실무자들이 뒷받침되어야겠지만.. 실무자 풀이 제한적이라 하더라도 저쪽이나 진보보다는 나을 것으로 봅니다, 저는)

      그리고, "박근혜의 최고 강점은 박정희 후광도 뭣도 아니고 '대세'라는 겁니다."에도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굳이 부연하자면 "한나라당 소속 대세"라는 것인데, 여기서 "한나라당 소속"은 엄청난 정말 엄청난 자산이지만, 부채이기도 하죠. 이 부채, 약점을 타고 대세를 뒤집을 리버럴 연합이 필요합니다.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오랜만에 속이 시원해지네요.

      지나가다가 /그 허위사실 유포에 대해 조국 교수가 법적 대응을 한다면 그 분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해지는군요.
    • 저는 만약 그 사실이 진짜 허위라면 법적 대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진짜 어처구니 없어요.
    • 조국 교수에 대해서 fermata 님이 뭐라고 했나요? 그 분 글을 안읽어서...
    • 아이 스크랩해야징~!
    • 저는 만약 그 사실이 진짜 허위라면 법적 대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진짜 어처구니 없어요. 2
    • 저는 박근혜에 대해서 궁금한 게 다른 것도 아니고 대체 왜 대권에 도전하려는 걸까. 그겁니다.
      스스로 뭔가를 해보겠다는 의지조차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말이죠.
    • 위의 fermata님 글에 답글달았다가 이글을 보고 의미가 없어보여 지웠습니다. 명쾌하네요. 잘봤습니다.
    • 전 박근혜의 발끈에서 박정희를 봅니다. 대선 후보니까 단순히 발끈, 사과의 해프닝이지만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자신의 권력에 대한 저항과 비판에 어떤 식으로 발끈할까요? 박을 섬기고 있는 사람들이 그 발끈에 어떤 방식으로 행동할까요? 이명박의 발끈은 소송과 기소로 해결되죠. 돈받았다고 모욕을 주거나 돈을 뺐는다는 협박을 하는거죠. 그게 본인에게 가장 익숙한 방식이죠. 박과 그 가신들에게는 용공조작과 유신개헌정도가 익숙하고 정당한 방식일겁니다. 그게 구국의 결단이죠.
    • 글은 이렇게 쓰는 것이죠.
    • 이래서 듀게 옵니다.
      (어머 이런건 스크랩 해야해!!)

      이런글이 좋아요 별 같잖은 말 베베꼬아서 별 중요하지도 않은말 소화도 안되게 하는것보다
      정확 명확하게 자신이 가진 생각을 직구로 던지는 문장. 가는길이 분명하니 옆길로 새지도 않고 할말만 딱딱해도
      누군가의 어지러운 머릿속을 단박에 정리해줄수 있는 글. 아주 잘 봤습니다.
    • hj님 치사해요. 글 넘 잘써요.
    • 박근혜는 컨텐츠가 없으니 입을 열면 열수록 손해죠.
    • 스크랩 완료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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