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만의 외출… 이 아니라 답변, 〈엑소시스트〉에 관하여. (다방커피 님께)

 토요일에 무슨 이유에선지 갑자기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의 〈엑소시스트〉(The Exorcist, 1973)가 보고 싶어져 사놓고 묵혀만 두고 있던 블루레이를 꺼냈습니다. 1973년 극장판을 볼까 (이제는 "감독판"으로 명칭이 굳어진) 2000년 "당신이 보지 못한 버전"을 볼까 고민하다가 극장판을 봤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는 건 아마 2004년 이후 처음인 것 같은데, 워낙에 인상이 강한 장면이 있는 영화들이 종종 그렇듯 특정 장면 외에는 기억에 남지 않는 부분도 많은지라 생전 처음 보는 느낌도 들더군요. 특히 악마가 본격적으로 난리를 치기 전에 캐릭터 관계를 쌓아가는 전반부는 영화를 지금보다 훨씬 어설프게 보았던 2004년에는 별로 즐기지 못했던 부분이었겠지요. (그럼에도 기억했던 것보다는 "본론"이 빨리 나와서 놀랐습니다. 실은 그보다는 제가 전보다 더 많은 부분을 "본론"으로 여기게 됐기 때문이겠지만.)

 하여간에…….

 영화를 다 보고 문득 저 유명한 "스파이더 워크" 장면이 보고 싶어져서 감독판도 몇 부분을 골라 발췌 감상했습니다. 그런데 감독판 결말에서 킨더먼 경위와 다이어 신부가 대화를 나누는 대목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머나먼 옛날 듀게에서 읽었던, 킨더먼 경위가 신부들에게 건네는 영화광스러운 대화의 의미는 무엇이냐는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찾아봤습니다. 2004년 5월 16일, 옛 자유게시판에 다방커피 님께서 올리신 글이었어요 : [엑소시스트] 보다 궁금!

 이 질문에 대해서 당시 Q 님과 gilsunza 님 두 분께서 덧글을 통해 의견을 피력하셨는데요, 이번에 보면서 제가 느낀 바는 또 달라서, 7년 만에 답글을 남겨보기로 했어요.

 일단 해당 문답은 킨더먼 경위가 존재할 리가 없는 영화를 보러 가자고 권하고, 카라스/다이어 신부가 그 영화 이미 봤다며 거절하는 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첫 번째 문답이 나오는 부분의 정황은 이렇습니다: 킨더먼 경위는 최근 리건의 집 앞에 있는 가파른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죽은 영화감독 버크 데닝스의 목이 180도로 돌아간 채 발견됐다는 사실에서 악마숭배자의 종교의식을 떠올리고 그 방면의 권위자이자 수사들의 심리상담사 역할을 해주고 있는 카라스 신부를 찾아옵니다. 정신이 불안정한 성직자가 그런 짓을 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을 품고 말이죠. 하지만 카라스 신부는 아는 성직자 중 정신이 불안정해 보이는 사람이 있느냐는 킨더먼 경위의 질문에 불쾌해하며 대답을 거부합니다. 이에 킨더먼 경위는 자신의 환자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감옥에 간 정신과 의사의 예를 들먹이는 협박성 발언을 하고, 카라스 신부는 더욱 냉담한 태도로 킨더먼 경위를 지나쳐 가버립니다. 그러자 킨더먼 경위가 허둥지둥 카라스 신부를 쫓아가며 "신부님? 혹시 영화 좋아하세요?"하면서 문답을 시작합니다. 이때 이 문답은 곧장 어떤 영화가 있는데 같이 보실래요? 라는 식으로 나오는 게 아니라 킨더먼 경위가 먼저 한참 자기는 영화를 좋아하고 보고 나서 토론도 하고 싶은데 마누라는 관심이 없고 어쩌고 저쩌고 하며 수다를 떨다가 자연스럽게 영화를 같이 보러 가자는 제안을 꺼내는 식으로 이어집니다. 하여튼 카라스 신부는 "그 영화 이미 봤어요."라고 역시 무뚝뚝하게 답하는데, 그러자 킨더먼 경위는 다시 말을 잇습니다. "한 가지만 더요. 아까 제가 말한 거에 들어맞는 성직자 생각나는 사람 정말 없으세요?"

 한편, 두 번째 문답이 나오는 부분은 이렇습니다: 리건 가족이 모두 집을 떠나고, 그들을 배웅한 다이어 신부가 돌아가는 길에 리건 가족의 집 앞에서 서성이는 킨더먼 경위를 만납니다. 다이어 신부는 킨더먼 경위에게 다들 방금 떠났고, 리건은 괜찮아 보이더라는 얘길 해줍니다. 그리고는 딱히 할 말이 없어진 둘은 인사를 건네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헤어지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킨더먼 경위가 다이어 신부를 다시 부릅니다.

 킨더먼 경위 : 다이어 신부님? 영화 좋아하세요?
 다이어 신부 : 그럼요.
 킨더먼 경위 : 초대권이 있어서요. 내일밤 크레스트 극장 초대권인데, 같이 가실래요?
 다이어 신부 : 무슨 영환데요?
 킨더먼 경위 : 〈폭풍의 언덕〉이요.
 다이어 신부 : 누가 나오는데요?
 킨더먼 경위 : 히스클리프는 잭키 클리슨이고 캐서린 언쇼는 루실 볼이요.
 다이어 신부 : 이미 봤어요.

 그러자 킨더먼 경위는 '에라 모르겠다'하는 식으로 웃으면서 다시 말합니다. "하나만 더요. 그럼 혹시 점심은 드셨어요?" 다이어 신부는 "아니요."라고 답하고, 둘은 나란히 식당으로 향합니다.

 주절주절 길게 묘사를 했습니다만, 이 문답의 의미는 문답 자체가 지시하는 대상보다도 전체 대화의 맥락에서 생겨나지 않는가 싶어서요.

 대충 알기는 하지만 잘 알지는 못하는 거리감 있는 사람, 하지만 만나보면 좀 친해져 보고 싶거나 하여튼 대화를 계속 나누고 싶은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났지만 표면상 이어갈 이야기가 없어 대화가 끊기고 결국 뻘쭘하게 헤어지게 될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이 존재할 리 없는 영화에 관한 이야기는 그런 순간에 킨더먼 경위가 "하여튼" 대화를 이으려는 방편으로 써먹는 수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그게 정말 진지한 새로운 화제가 아니라 존재할 리도 없는 영화에 관한 실없는 소리라는 점이 중요한데요, 그렇게 함으로써 그 화제 자체보다는 '저는 우리가 좀 더 얘기를 나눴으면 좋겠는데 대놓고 뭔가 말하긴 뻘쭘해서 이럽니다 ☞☜ 좀 봐주세요^^;' 하는 속내를 상대방에게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거죠. 물론 여기서 상대방이 그런 속내를 알아주지 못하고 "그런 영화도 있어요?"라고 정색하며 물으면 낭패겠지만, 그렇지만 않다면야 답을 뭐라고 하든 간에 킨더먼 경위의 약간 개구진 심정은 전달되는 셈이고, 그러면 그다음에는 다시 좀 더 솔직하게 얘기하고 싶은 화제를 다시 꺼내도 될 테니까요.

 킨더먼 경위 역을 맡은 리 J. 콥의 연기톤은 너무나도 절묘합니다. 다이어 신부는 그렇다 치고 카라스 신부와 얘기하는 장면은 대사만 떼어놓고 보면 어떻게든 심문을 계속해서 정보를 얻어내려는 무례한 경찰이라는 인상만 주고 말 법하죠. 하지만 실제로 보면 카라스 신부로부터 답을 캐내기 이전에 일단 상대방에게 호감을 갖게 됐고 그런데도 어쨌든 일을 하자니 무례한 질문을 하기는 해야 하는 난처한 상황에서 혀를 쏙 내밀면서 ^^)> 하고 있는, 넉살 좋은 인상이 확 느껴져요. 플롯만 따지고 보면 킨더먼 경위는 리건이 살인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는 정보를 리건의 어머니인 크리스에게 제공하는 것 외에는 거의 필요없는 캐릭터입니다만 그런 그를 이상할 정도로 잊기 힘든 것은 바로 이런 연기를 통해 자기 캐릭터는 물론이고 상대방 캐릭터에 대한 관객의 인상까지 더 깊게 만들어주는 공력 때문이겠죠.



 하루가 다르게 세상의 풍경이 변하는 시절이고, 듀게에서도 1년에 몇 번씩 요즘 듀게는 전과 다르다는 글이 올라옵니다. 하지만 처음 이 글을 쓰셨던 다방커피 님도, 그 글에 덧글을 다셨던 가끔영화 님, Q 님, gilsunza 님도, 그리고 당시에는 글 안 썼고 지금도 거의 안 쓰지만 하여간 접속은 자주 하는 저도, 여전히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즐겁게 느껴져서, 그치만 그렇다고 갑자기 "와, 아직도 다들 계시네요?" 할 수도 없고, 저도 킨더먼 경위와 같은 심정으로 한 번 써봤습니다. ^^)>
    • 오~ 영화를 다시 보고싶게 만드는 글입니다^^
    • 그 질문이 2004년 것이란 말입니까? 와...
      세월이 ICBM급으로 흐르네요.

      엑소시스트는 요즘도 일년에 서너 번씩 꺼내서 보는 영화입니다.
      특유의 스산한 분위기가 넘흐 좋아요.
      그때도 습관처럼 보다가 킨더만 경위의 생뚱맞은 질문이 눈에 들어와서
      대체 무슨 뜻으로 하는 대화인지 궁금했더랬죠.

      무려7년이 지나서 정성스런 답변해주신 oldies님께 감사드립니다.
      타임캡슐을 열어본 기분이네요. ^^;

게시판 2012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462,406 01-31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147,940 12-31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122,150 04-01
130354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10 187 12-31
130353 아바타 3를 보고 유스포 2 192 12-31
130352 [핵바낭] 올해 잉여질 결산 잡담 14 334 12-31
130351 아바타: 불 과 재 보고 왔어요 짤막 소감 6 228 12-31
130350 [영화강추] '척의 일생' 8 249 12-31
130349 흑백요리사 2 8~10회, 싱어게인 4 탑 4 결정 6 285 12-31
130348 Lacombe Lucien(1974) 7 131 12-31
130347 [관리] 25년도 보고 및 신고 관련 정보. 15 324 12-31
130346 Isiah Whitlock Jr. 1954 - 2025 R.I.P. 2 138 12-31
130345 [왓챠바낭] 우편배달부 말고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잡담입니다 12 267 12-31
130344 [넷플] 말 많고 탈 많은 '대홍수' 드디어 봤습니다 14 453 12-30
130343 [반말주의] 다들 올해 고생 많았어!! 새해 모두 건강하고 복 터지길 바래!! 12 186 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