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임신기간

 

 

임신 초기를 간신히 넘겼습니다.

 

그간의 일은 말로 다할 수 없어요.

임신을 알자마자 매일이 지옥인 듯한 입덧에,

입덧의 다른 형태인 양 향수병까지 찾아와

남의 나라에 사는 주제에 남의 나라 것은 다 보기도 먹기도 싫었어요.

그게 가장 고통스러웠죠. 내가 숨쉬고 발붙이는 곳 자체를 몸에서 동물적으로 거부하는 느낌.

 

가뜩이나 전혀 마음으로부터 임신이 준비되지 않았던 상태였기에

그런저런 모든 것이 닥쳐오자 임신을 수도 없이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임신을 원망하는데, 아이에 대해서 긍정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었겠어요?

그 시기 아이와 저에게 가장 최적의 상태는 서로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또는 뱃속아이에게 연민과 미안함이 들 때도 그랬겠네요. 미안하다. 왜 하필 이런 엄마를 만났니..정신이 좀 들면 그런 생각을 했어요.

 

게다가 지금 저와 남편의 다소 특수한 상황 때문에

임신으로 인해서 불가피하게 어떤 행동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아직 벌어지지는 않은 일인데, 그 일에 수반되는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저의 불안은 점점 커져갔습니다.

임신만 아니었으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기에, 임신을 원망하는 마음이 점점 커졌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서야 처음으로 초음파를 보았습니다.

초음파 보기 직전까지도 저는 아이의 존재를 백퍼센트 확신할 수 없었어요.

그건 남편도 마찬가지였던 듯 싶습니다.

그러다가 초음파 모니터로 아이를 보았는데,

아이가 정말 튼튼하게 살아 있더라구요.

손가락 발가락이 한들거리는 것마저 보였어요.

미안하고 기특한 마음이 들더군요. 그렇게 엄마라는 사람이 못된 생각만 했는데,

별다르게 신경도 못 써줬는데, 진짜 넌 혼자서 건강하게 자란 셈이구나.

저는  기본적으로 술과 약물을 절대 피하는 것 이외에 다른 임산부들처럼

화장품도 골라서 바른다든가 하는 자잘한 금기 같은 건 크게 신경쓰지 않고 지냈거든요.

유난떨고 싶지 않았고, 저 자신부터 피곤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라벤더 화분을 키우는데(라벤더도 알고보니 임산부에게 좋지 않대요), 임신을 알고도 라벤더를 꾸준히 키웠어요.

뱃속아이에겐 '임신했다고 이제껏 키우던 생명을 덜컥 내버리는 건 라벤더가 임신에 좋지 않은 이상으로 나쁜 일이라고 생각한다' 고 내세우면서...

 

 

 

남편도 그전까진 제 배를 들여다보며 "정말 거기 있긴 한거니?"라고 태담같지도 않은 태담을 할 정도로 임신을 실감하지 못했나 본데,

초음파를 보고 난 뒤로는 아이에 대한 본능적인 애정 비슷한 게 생긴 듯 싶습니다.

저도 힘내서 이제부터는 좋은 생각만 하려고 했어요. 나쁜 생각은 거두고...

 

그런데 오늘 오랫만에 깨끗이 씻고(임신 초기에는 자주 씻지도 못해서 정말 봐줄 수가 없었어요, 그런 제 모습에 더 우울해졌죠)

장을 보러 가는데

드럭스토어에 기저귀를 뭉치로 쌓아놓고 파는 게 보였어요.

그걸 보는 순간 우울해졌습니다.

지금은 제가 돈을 벌지 못하는 상황이라 남편이 경제활동을 하고 일정량의 돈으로 살림을 꾸리는데,

신혼이라서 액수가 적기도 하고 여기 물가가 비싸기도 하지만 늘 빠듯해요. 저 자신을 위해서 쓰는 돈은 거의 없거든요. 말 그대로 가정을 위해서만 돈을 쓰는데

그럼에도 늘 빠듯했어요.

그런데 이제 아이가 태어나면 기저귀며 뭐며, 게다가 출산용품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고 검색하고 가격을 내 보면

정말 천문학적인 숫자가 나오더라구요.지금 저희 입장에선.

남편은 걱정하지 말라고,(아이와 저에게) 필요한 것은 다 해준다고 말은 하지만

막상 남자라서 그런지 세세하게 아이에게 뭐가 필요하며, 그게 얼마나 필요한 것이며, 얼마의 돈이 드는지를 모르는 것 같아요.

(그의 레퍼토리는 "우리 땐 그런 거 없이도 다 컸어!"입니다;;;저와 그는 같은 또래구요)

물론 임신하고 출산해서 육아하기에 돈이 넉넉지 않다는 건 그전부터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임신을 기피했던 한가지 큰 이유이기도 했고요.

하지만 막상 임신에서 출산으로 아주 조금씩이나마 가까워질수록

모든 게 점점 뚜렷해지고 실생활이 되네요.

아직도 생각납니다. 임신 초기 한참 곤욕스러울 때, 꼭 해야할 일이 있어 이곳 중심가에 나갔다가

장난감 가게를 보았는데,

가게 속 장난감들을 보면서 속으로 제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더라고요. '나중에 우리 아이가 저거 사달라고 하면 뭐라고 해서 못 사준다고 달랠까'

'저것도 못 사주겠지'

 

물론 저도 유난스런 엄마가 되고 싶진 않습니다. 아니, 차라리 좀 모자라는 듯하게 갖춘 환경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런데도, 필요한 것만 갖추려고 하는데도 돈이 많이 드네요...

그런 생각을 하니 다시 또 우울해지고 말았습니다.

 

 

 

 

 

    • 우선 먼저, 기운내시란 말 전하고 싶습니다... 실례지만 사는 곳이 어디신지요? 미국이라면, 물론 각 주 마다 차아는 있겠지만 wic를 통해 생활비가 어느 정도 이하면 임산부와 아기를 위한 생활비가 지원됩니다. 최저한의 상황에서도 굶기진 않을 거여요. 그리고 저소득층에겐 전기세가 50% 감면됩니다, 이것도 잘 찾아서 신청하셔해요. 아이옷이나 천 기저귀, 장난감은 패밀리 센터같은 데서 무료로 받아올 수도 있고요. 뭐 다 알고 있으실 지도 모르지만 오지랍 떨어봤습니다. 이렇게 사회복지의 도움을 받아도 아이키우는 데 돈이 많이 드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니 힘내세요.
    • 아~ 힘내세요.

      순산하시길 바랄께요. ^^
    • 외국생활은 그런 식으로 위기가 잘 오는 것 같아요. 갑자기 뭐가 먹고 싶은데 막 눈물이 나고 그럴 때가 있더라고요. 힘내세요.
    • 글을 읽다보니 우울한 심정이 전해집니다...

      어느 나라에 계신지 모르겠지만, 해외에선 LH님 말씀처럼 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경우가 많으니 한번 알아보세요. 한인커뮤니티에 소속되어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해외에선 중고에 대한 인식이 좋으니까요. 주는 것도, 받는 것도요. 저만해도 필요없어진 아이옷, 책, 장난감들 다른분들이 가져가시면 더 좋습니다. 집 공간도 여유로워지고, 버리긴 아까우니까요.

      힘내세요. 낳아보면 고생은 정말 많이 하지만, 아이는 예쁘고 사랑스러운 존재이더군요.
    • 저도 먼저 기운내시란 말씀 드리고 싶고요.
      임신 기간엔 호르몬 작용으로 기분이 여러번 왔다갔다 한다죠. 별 것 아닌 일에 찾아오는 우울감과 걱정에 저도 많이 힘들었었던...
      나의 정신적인 문제라기보다 나의 몸의 문제라고 '대범'하게 받아들이시면서, 기분을 조금 더 가뿐하게 가져보려고 노력해보셨으면 좋겠어요.

      해외 어디 거주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제 생각에도 임산부와 아기를 위한 복지프로그램은 있을 거 같은데.
      경제적인 부분에 대해 우울해지신다면, 보다 적극적으로 LH님 말씀처럼 그런 프로그램들을 찾고 여기저기 알아보시면 좋을 듯해요.
      꼭 유난을 떨라는 건 아니고요, 다만 아이를 위해서 무엇인가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
      임신 기간에 '나는 부족한 엄마'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위안을 주더라고요.
      하다못해 애기 배넷저고리라도 직접 만들다보니 그런 우울증을 많이 벗을 수 있었어요.

      경제적인 문제로 찾아오는 우울감이 쉽게 해결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 더 강해지셔야 해요. 마음을 좀 더 굳게 먹으셨으면 좋겠어요.
      아이를 갖고 낳는 것, 그것으로 사람은 더 강한 도전에 직면한다고 생각해요.
      육아란 육체적, 정신적으로 훨씬 더 강해져야 하는 크나큰 도전이더군요.
      하지만 이 아이가 정서적으로 건강한 사람으로 크길 바라는 바람이 그렇게 간절할 수가 없어요.
      외부적인 상황이 힘들더라도, 부모는 중심을 갖고 아이에게 그 불안함과 우울함을 투영시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네, 쉽게 되는 게 아니라 너무 힘들기 때문에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우울해하는 마음에 지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비슷한 처지였던 터라 안타까운 마음에 괜히 길게 썼는데, 실례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기운 내세요!
    • 힘내세요~저도 그렇고 제 주변에서도 계획하지 않고 임신을 하는 경우가 훨씬 많은 거 같아요.
      저도 한 4~5개월은 물도 못마시고 노란 위액을 매일 쏟아가며 점심시간에 링거 맞으며 회사를 다녔는데 정말 그 육체적인 고통이 감당이 안되었던 순간도 있었어요. 외국에 나가 있는 친구들은 아무래도 음식때문에 더더욱 힘든 시간을 겪고 있던데...그래도 어떻게든 지나가기 마련이더라구요. 모성애라는 외부의 아름다운 개념에 압도되지 마시고 육체적, 정신적 고난의 순간이 모두 모성애의 밥이 된다고 생각하셨음 좋겠어요. 사실 그렇더라구요.
      육체적으로 힘드셔도 항상 긍정적인 쪽으로 마음 다독이셨음 좋겠어요. 어떻게든 다 살아진다고들 하고, 모두들 힘든게 임신과 육아라고 하니...이왕이면 좀 더 밝게 좀 더 힘차게 좀 더 건강하게 육아를 해보아요.
    • 걱정해주시고 답글주신분들 모두 정말 감사드립니다. 사실은 어제 다시 와서 하나하나 읽고 감사하다고 댓글달고 싶었는데, 결국 어제 남편과도 글에 쓴 문제와 비슷한 걸로 다투고 말았거든요...(물론 기저귀값 때문에 싸운 것은 아닙니다;;) 다시 서로 다독이고 화해하긴 했지만요.
      여기는 미국은 아니지만(지금 제가 미국에 있다면 훨씬 나을 것 같아요 여러모로 ㅠㅠ) 말씀해주신 방법들도 한번 알아보고, 좀더 스스로 중심을 잡도록
      노력해볼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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