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언 시집,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

언젠가 배캠을 듣다가 김경주 시인이 시 읽어주시는 코너에서 처음 알게 된 시집이에요.

시집에서 몇 편 옮겨봅니다.




우리는 먼 곳에서 만나 가까운 곳으로 걸어갔다.

우리는 가까운 곳에서 서로에게 욕을 하고 침을 뱉고, 사랑을 하였다.

홀로 남아 썩는 것들아!

내가 아니었으면 오직 너였을, 혼자되지 않을 것들아.

어떻게 욕을 하고 침을 뱉고 사랑을 할 수 있었는지

내가 본 하늘은 온통 핏덩어리처럼 흘러내리는데


그리고 우린, 다시 각자가 되어 먼 곳으로 떠났다.




제목이 없어서 방송에서는 '우리는 먼 곳에서 만나 가까운 곳으로 걸어갔다'로 시작되는 시라고 소개했어요. 

시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눈으로 읽을 때 보다 낭독하는걸 들을 때 내용이 더 잘 들어왔어요. 이래서 시 낭독을 하는건가 싶기도 하고.

집에서 혼자 읽을 때도 소리내서 읽으면 느낌이 달라요. 오직 나 한사람만 듣기 위해서 소리를 내고 그걸 듣고 있으면.


각 챕터가 시작될 때마다 제목이 따로 없는, 첫 줄이 제목으로 쓰인 시들이 나오더라구요.





괄호



불을 켠다고 생각해봐 2억 5천 도의 불덩이를

머리 위에 얹고 시를 쓰고 사랑을 하고 눈물도

찔끔 흘린다고 생각해봐 지글지글 타오르는 외눈박이

꽃이 혓바닥을 널름거리며 너의 목덜미를 애무하고

있다고 그럼 비명이 터져나오겠지 갈고리 같은

손가락들은 닻처럼 허공에 찍힐 거야

그 옆에 괄호를 열고 써봐 왜 나는 재가 되지 않는거지

그럼 이곳이 지옥이 아니고 뭐야


쉿 니가 뭔데 엄살이야

니가 켠 이 불 너의 등짝에다 지져줄까 아님

십 리도 도망 못 갈 너의 발바닥에 문질러줄까


어서 괄호를 닫아

아! 그런데 저 말들이 언제부터 내 속에 준비되어 있었지

목구멍을 뛰쳐나온 말들은 텁텁한 석탄 되어

불덩이 속으로 뛰어들어가네

외눈박이 꽃들이 어둠 속에서 수천 수백의 횃불이 되네

뭘 찾지 이 깊은 산속에서

검은 숲이 온통 불이네 그러니 누군가 꺼내줘

내 머리통 속 2억 5천 도의

홍역을 앓는 아이 하나 그 옆에 괄호를 열고 써봐

왜 너는 재가 되지 않는 거지









    • 시를 소리내어 읽는다는 것의 느낌에 대해 새삼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멋지네요. 자신만을 위해서 내는 소리를 가만히 듣는다는 것은.
    • 제가 아는 선에서 가장 재능이 넘치는 시인 중 한 사람이에요. 소설로도 등단했고 희곡을 직접 쓰고 연출하며 최근에는 시인보다는 연극인으로 많이 주목을 받았었죠. 하지만 전 그의 첫시집을 너무 사랑해요. 두 번째 시집도 사랑하고 싶었는데 그때만큼은 감동이 오질 않네요. 최치언 시인 좋아하는 분을 봐서 기쁩니다.
    • 맨 위의 시는 적어서 건네주고 싶네요. 다시 각자가 되어서 먼 곳으로 떠나갔다, 구절이 참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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