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 한 분의 부고를 우연히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장경학 (1916-2011)

1916 함경남도 문천 출생.
1933 경복중학(현 경복고) 보통과 3학기 수료.
1936 마쓰야마고등학교 졸업
1937 교토제국대학 법학부 입학, 1943 졸업.

1946 서울대학교 법학과 창립멤버(유진오 등)
1957 인디애나대학교 법학 박사
1949~2011 동국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명예교수



이 분이 2004년쯤까지 강단에 섰었는데 그 때 법학개론을 하셨었죠.
2008년에 불교학 박사 학위를 따시는 등 말년까지 정정하게 학문 하셨던 양반입니다.
그리고 제가 물권법을 배웠던 교수님의, 대학원 때 지도교수셨고(.....)

- 옛날 교수답게 상당히 괴팍했지만. (....)

상당히 괴팍하고 옹고집스런 사람이라 상당수 학생들이 으엑 거렸던 기억도 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스쳐지나간 많은 교수들과 달리
이 분은 저한테 일종의 달마 게이트(갑자기 용어가 생각이 안 나네요...)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2005년 이 분의 육필 회고록 원고를 단돈 6만원에 교열, 정서한 적이 있었더랬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14만원은 조교 형아가 떼먹음 ㄱ- 치인트의 허조교 같은 인간...;;)
일단 교수님 수업 듣는 애들 중 일부가 수업의 가점을 노리고 
적당히 타이핑 쳐 온 게 있었지만, 사실상 쓸모짝에도 없었더랬지요.

그도 그럴 것이 그 원고란 게 만년필로 휘갈겨 쓴 육필 원고인데다가,
어느 부분은 한자로, 어느 부분은 한글로, 어느 부분은 일본어로 써 놓으니, 
이 뭐... 학생들이 걍 한글만 워드쳐오고 한자는 전부 동그라미 땡땡처릴 해논겁니다;;
어디는 충무로였다가 어디는 본정통이었다가 다른데는 또 혼마치도오리라고 되어 있는지라...
덕분에 일제시대 서울 지명을 어떻게 썼는지는 아주 훤하게 꿰게 되고 말았더랬지요.
소공로는 하세가와쵸. 명동은 메이지쵸. 충무로는 혼마치도리. 원효로는 모토마치...
일본어 번역 잘 하는 언니야 한 분한테 근근이 도움 받아 겨우 끝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 원고의 내용이란 게. 
참 생각해보니 얄궃더란 겁니다.


- 박정희랑 같은 해에 났고, 중학교 수학여행은 금강산으로 다녀왔으며,
대학을 그것도 해방 전에 37년도에 제국대학에 들어가서.
학교 하숙집 밥 얻어먹은 사람이 리승기 박사(북한에서 비날론 발명한 사람)였고.
45년도에 해방되고 나서 동아일보에 원고 갖다주러 갔더니 마주친 사람이 
이병주 남작(이완용이 아들네미), 또 회고록 원고 주요 내용은
쇼와 초기 일본 지성사의 한 페이지인 다키가와 교토법대 교수 사직 사건...
(*일제 정부가 진보적 지식인들을 강단에서 자른 사건. 좀 아이러니한 것은
이 사람들 중 상당수가 만주국의 만주건국대학으로 피신(?)해 있다가,
전후 일본 지성계를 재구축하는 데 일조를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에게
만주건국대학에서 배운 사람 들 중 일부가 고 최규하대통령을 비롯한
70년대 한국정부의 테크노크라트들 사이에도 있었단 것....)

어쨌거나.

- 뭐 굳이 따지자면, 몇 달 전 1박2일 시청자투어 할 때
성시경씨가 102세 된 김수암 할아버지한테 
어린 시절 3.1독립운동 한 얘기를 듣는 그런 기분과 비슷할까요.

아.
역사라는 게 그냥 책 안에 인쇄되어 있는 옛날얘기가 아니라
지금 내 앞에서 살아 숨쉬는 사람들의 생생한 경험이었구나....
하고, 젊은 날의 제 생각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던 
그런 간접경험.... 였달까요.

사실 이 분의 견해를 100% 찬동하진 않습니다. 
옛날 분이 되어놔서리...
(암것도 모르는 1학년 애들이 개론시간에 떠드니까 출석부를 쭉 잡아 찢고 나가 버리셨음)
상당히 괴팍했던 교수님이지만

그래도, 
생각을 틔워 줬던 의미로서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명복을 빕니다.


* 덧
교수님 원고 중에서 다키가와 의원면관 사건만 따로 정리해서 블로그에 써둔 것 : 
http://databackup.egloos.com/search/%EB%8B%A4%ED%82%A4%EA%B0%80%EC%99%80/
흥미있으신 분은 참고하시길...
    • 역사의식이 생기신 계기셨군요.

      아니면 삶, 혹은 죽음에 대해서 '제대로' 생각하고 나면 사람이 조금 달라지더군요.
    • 블로그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도 어릴 때 할머니와 함께 사는 친구에게서 자신의 할머니가 냄비 포장지에 있는 일본어를
      읽는단 말을 듣고 처음 비슷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너무 수준이 다른 경험이긴 하지만 -_-;

      막상 부모님도 70년대 80년대가 어땠단 이야기를 잘 해주지 않으니 저런 느낌 갖기가 쉽지 않더군요.
      어째어째 어머님께 그 때 어땠냐 물었더니, 어머니는 성당에서 일을 하셨는데 매주 만드는 주보조차 검열해서
      다 만들어서 보냈더니 막상 다 삭제되서 글 칸들이 하얀 주보가 나오곤 했다고 하시더군요.
      어머니가 일하던 성당이 그런쪽으로 많이 활동하던 성당이라 그랬는지 아니면 다른 성당도 다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 흥미진진한 글이네요. 잊어버리지 않고 나중에 큰 화면으로 다 읽어보게 댓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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