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야그] 세종의 신하들 쥐어짜기 ABC

 

세종은 사람 다루는 게 험하기로 레전드급인 인물이었습니다. 아니 뭐, 매질을 혹독하게 했다거나 괴롭혔다는 게 아닙니다. 어떤 인재가 있으면 그 사람에게 빨대를 푹 꽂아놓고 그 능력의 바닥에 바닥까지 쭥쭥쭥쭥 빨아내는 정도가 좀 많이 대단했다는 것입니다.

 

영의정 황희의 눈물의 사직서 행렬이야 유명하지요. 저 늙었어요, 이제 일 좀 그만하고 싶어요. 이젠 글씨도 잘 안 보인단 말여요, 네? 다른 사람은 정치적인 이유나 기타등등의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하곤 했지만 황희는 나이가 나이다보니 살려주세요라는 외침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이미 관에 한 발 넣고 두 발째까지 넣을 듯한 나이인 여든 너머까지 일하고 일하고 또 일했습니다. 18년동안 영의정 했다는 게 기록이지만, 생각해보세요 18년 근속... 얼마나 지겨웠을지. 나중엔 세종도 좀 심하다 싶었는지 자가용... 자가 가마도 내려주고 일주일에 한 두번 출근하도록 했습니다.

왜 이렇게 황희를 부려먹었나, 하면... 그건 황희 자신의 특성 때문이었을 겁니다. '니 말도 옳고 니 말도 옳다'라는 에피소드는 어느 정도 실제의 황희를 반영하는데요, 당시 세종의 조정에는 (굉장히 길긴 했지만) 허조 외에도 사육신이나 신숙주 외에도 정인지, 하연 등등 웬만큼 이빨 잘까는 사람들이 더글더글 몰려있었고, 세종은 이들끼리의 토론을 독려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정책이 결정되기까지는 깔대기와 이빨의 각축전이 벌어졌고, 이 때 앞에서 교통정리를 해줄 사람이 필요했으며 황희는 여기에 적임자였던 거지요.
(물론 인간 황희의 성격은 꽤 거셌습니다. 이 이야기까지 너무 하면 길어지므로 시간 없어서 생략)

 

그런데 시달린 건 황희 뿐만이 아니죠.
이건 그나마 약과입니다.
김종서 쥐어짜인 건 정말 눈물이 앞을 가려 어찌 다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어마어마한 분량의 고려사 제작하다가 세종한테 빠꾸 먹은 게 몇 번이요, 문신이었는데도 어라라 함경도로 부임하여 구르고 또 굴러 고생한 게 한 바가지요,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시묘살이도 못하고 장례식만 치르고 또 추운 동네로 갔습니다.

외국어 잘한다는 이유로 일본 중국에 출장 전문이었던 신숙주도 있고, 당시 집현전이 개고생하며 밤낮으로 의례/언어학/지리학/기타등등 분야를 연구하며 혹사당한 결과가 세종실록예의지/지리지/훈민정음/자치통감... 더 이야기하자니 길어져서 생략합니다 ^ㅂ^
(훈민정음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아직도 분명하지 않지만, 그들이 언어학/음운학 연구에 몰두한 결과물 동국정운을 보면 이것이 훈민정음의 기반이 된 건 분명합니다)

그리고 장영실은 과로사의 위기에 몰렸을 겁니다. 자격루/금속활자/해시계... 박연은 각종 악기 제작에 합주 지휘에, 악사들 교육에... 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대부분의 신하들은 이런 쥐어짬에 순종(?)했지만.
가끔 그렇지 않은 간이 부은 인물도 있었습니다.
천문학 연구로 유명한 이순지라는 인물이 있지요. 몇 가지 에피소드가 유명한 수학의 천재이지요.
세종 당시, 이 사람이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사직서를 냅니다. 뭐 옛날에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무조건 벼슬 버리고 무덤 옆에서 움막 짓고 시묘살이 해야 했지요. 그걸 안 하면 불효자라고 매도받으며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임진왜란 당시 몇몇 장군들은 상을 당했는데도 고향에 내려가지 않고 적과 싸웠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기도 했지요.

하여간, 그래서 이순지가 일을 그만두게 되었는데... 우리 세종 마마님께서는 그럴 분이 아니십니다.

 

"너 아님 누가 천문학 하니, 걍 일해라."

 

그러자 이순지, 입술 쭉 내밀고 뻗댑니다.

 

"즤는요, 5살 때까지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했거든요? 그래서 울 엄마가 날 유모에게도 안 맡기고 직접 키웠거든요? 그랬던 울 엄마 돌아가셨는데 전 일 못해요!"

 

라면서 구구절절한 마마보이 인증을 공식적으로 거하게 한 뒤 무단으로(...) 벼슬을 때려치고 떠나버립니다. 이렇게 되자 세종도 어쩔 수 없어서 이순지 자리를 공석으로 비워두고 상 마치고 돌아오기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게 칠정산이었죠 아마...

 

세종 때 탐관오리나 부정부패로 걸린다? 그런 신하들 의외로 많습니다.
위에서 말한 신하들은 모두 결점도 있고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능력이 있으면 잘못도 커버가 된다는 그런 느낌보다 저렇게 쥐어짜이는데 일부러 부정을 저질러 그걸 빌미로 일을 때려치려고 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때마저 있습니다...
글쎄요, 이런 류의 상관은 별로 두고 싶지 않습니다. 사소한, 때론 큰 잘못도 눈 감아주고 때때로 맛난 것도 잘 먹여주고 좋은 선물도 주는데, 산더미 같은 일감을 가져다 안겨주고 밤마다 딴짓 안 하는 지 감시하며 가끔 일처리에 빠꾸를 먹여 처음부터 다시하게 하는 정도?
묘하게 일찍 죽은 사람들이 많은데 그건 과로사 때문이 아닐런지.


여기까지 쓰니 이제 시간이 없습니다. 많이 쓴 것 같은데 내용이 또 없네요.
그래도 쓰면서 즐거웠어요. 보시는 분들도 즐거우셨기를.

 

p.s :

 

우선.

엄청 오랜만입니다.

 

진짜 재미나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그런데 어떻게 써야 할 지 서먹해져버렸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 라고 하면 이거 꼭 써야지, 하고 메모를 적어두지만 생활에 치여서 이거저거 써야지! 했던 의욕들이 색이 바래고 시들시들해집니다.

...엉엉엉.

그러다 갑자기 컴 앞에 앉으니 필신님이 흐물흐물 내려와서 정리해봤습니다. 사료를 재확인하지 못했기에 숫자 부분에서는 잘못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요 근래는 책이나 논문 뒤져가며 재미난 이야기 좀 찾아보고 있습니다. 이를 테면 왕비나 후궁이 임신을 하면 5개월 즈음부터 내시나 신하들을 시켜 낮밤으로 명심보감, 소학들을 밤과 낮동안 읽어줬다고 합니다. 인간 mp3로 태교를 감행한 건데... 과연 얼마나 효험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더 재미난 건 임신이 진행되면 콩이나 고기류를 오히려 안 먹었다더군요.

 

    • 앗 눈팅유저에게 댓글을 달게 만드시는 LH님! 오랜만이어요. 세종대왕에 관한 LH님의 저서를 보유하고 있는바 -_-v 요즘 뿌리깊은 나무를 보면서 LH님의 감상이 어떠실지 궁금해했답니다. :)
    • 김종서 집에 가고 싶다고 징징댄건 이해가 가요. 문관이 무슨 죄야...
    • 재미지게 읽었습니다!
    • 역시 믿고 보는 LH님의 역사야그입니다. '이야기하자니 너무 길어지게 되는 인간 황희의 거센 면'이 궁금해집니다.
      (이건 위인전기에선 전혀 언급을 안 하는 부분이라 더 ...)
    • 아침부터 아주 재미지게 읽었어요. 한창때 역사가 이렇게 재밌었다면... ^^
    • 재밌게 읽었어요!:D 앗 LH님이 쓴 세종대왕에 관한 책이 있나요?
      • 나는 조선이다~가 LH님이 쓰신 세종 관련 책이에요^^
    • 저는 LH님께서 이야기 쓰시다가 생략하시는 거 싫어요! 계속 길게 길게 써주세....아, 그냥 제가 LH님 책을 구해 읽어야겠어요.:-) 세종을 둘러싼 추리액션물 말고 그냥 관료들 생활얘기만 나오는 드라마(일종의 전문직 드라마?)가 보고싶어지네요.
    • 꺅 재미있어요! LH님의 세종대왕 관련 책도 참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인터넷 어투(...)로 읽으니 더욱 재밌습니당.
    • LH님 닉넴보고 반가운 마음으로 클릭했습니다. 재밌게 읽었어요.

      그런데 LH님이 쓰셨다는 세종 책 제목을 알 수 있을까요?? 읽어보고 싶어요.
    • 안그래도 뿌리깊은나무 보면서 책 다시한번 읽었습니다. LH님의 집현전 시트콤 보고싶네요. 복장이 터지도록 재미날거야...
    • 와우 LH님이다! 역사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재미있어요+_+ 이런 야사들을 모아모아 일일시트콤(...)같은 사극이 나오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을 가져봅니다...
    • 기다렸습니다.>_< LH님 책 또보고 또보고 하고 있습니다.

      재미에 너무 강박감 가지지 마세요. 그렇지 않으셔도 충분히 재미있습니다.
    • Digool/ 나는 조선이다 군요. 감사합니당.
    • 이야~~~~오랜 눈팅생활 중 "머스트해브리드아이템" LH님의 글이었어요..
      너무 재미나게 읽었었어요~~~~
    • 항상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팬인증 추가요+
      책사면 사인해주시나요?
    • 앗...그렇군요...장영실의 가마사건도 사실 관직을 관두고 싶은 그의 속내....
    • LH님 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살포시 댓글 하나 늘리고 갑니다. ^^
    • 우와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
    • 어멋, 이거 너무 재밌잖아~ 스크랩해야지~ 그리고 책 검색하러 알라딘으로 쓍~
    • 와와 구 게시판에서 재미있게 읽어서 이름검색으로 찾아 읽던 기억 나는데 역사야그라는 말머리? 보고 신나서 들어왔네요! 종종 써주세요 _ _ ㅎㅎ
    • 당장 스크랩~재미있어요~
    • 글 너무 재미지네요!! 저도 책 사러 갑니다 ㅎㅎ
    • 아~ 진짜 너무 재미집니다.
      제가 저런 상관 밑에 있으면 질리겠지만 사실 세종대왕께서 매력적인 것은 부정할 수가 없겠네요 ^-^
    • 앗 글 너무 재미있어요. 잘 읽었습니다
    • 헉, 오늘 바깥에서 내내 일을 처리하고 들어와보니 수많은 댓글들이... 어흑. 그간 생활에 치여서 거의 글을 남기지 못했는데 이리 환대해주시니 대단히 감사합니다 ㅠㅠ 그럼 이제 폭풍 댓글을 남기겠습니다.
    • 너무 재밌네요 ㅋㅋ 저는 국사시간도 너무 싫어했고, 역사서는 늘 지겨워서 읽다 떄려치는 인간인데
      이렇게 재미나게 얘기로 풀어주시니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것이 감동이네요 ㅜ.ㅜ
      앞으로 의욕만땅이실때마다 자주 얘기해주세요^ㅅ^
    • 나는 조선이다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팬입니다 ^0^
    • 재밌게 읽었습니다. :)

      한가지 훈민정음 창제를 누가 했는지 부분이요, 이건 세종 친제가 맞다고 봅니다. 해례본 서문에도 세종이 '내가 이를 어여삐 여겨 스물여덟자를 만드노니~'라고 주체를 분명히 했고, 집현전에서도 上親制라고 했죠. 세종실록의 최만리 상소문에서도 그런 뉘앙스를 볼 수 있구요. 집현전 학자들은 자기들이 뭘 하는지도 모르고 죽도록 일을 해보니 그게 한글 창제더라 - 가 아닐까요? 세종이 큰 그림을 그리고 퍼즐 조각을 뚝뚝 떼어 학자들에게 던져 일을 시킨 뒤 나중에 당신이 합쳐서 훈민정음을 완성한 정황이 뚜렷합니다.

      아마 이런 엄청난 걸 왕 혼자서 만들리가 없어 라는 선입견이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많은 것 같아요.
    • labradorite / 드라마요, 보고 싶습니다. 보고 싶은데... 지금 밥도 제 때 못 먹고 잠도 제 때 못 자니 볼 시간이... 어흑. 누구 같이 볼 사람이 있다면 그나마 챙겨 볼텐데 그러지 못해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정말 보고 싶은데 말이죠.

      수퍼픽스 / 뭐 신숙주도 총사령관으로 함경도에 간 적이 있긴 했지만 그건 그래도 단기간 근무였죠...

      미리내 / 감사합니다 ㅠㅠ 오랜만의 글이라 감 떨어졌을까 걱정했습니다.

      01410 / 뭐 일단 양녕의 폐세자에 반대하다가 쫓겨난 것만 봐도 허허허 류의 사람은 아니었지요. 실록을 보다보면 황희의 딥빡침(...)을 간간히 접하게 됩니다. 일단 기억나는 게 공법 통과 때 였는데, 세종이 날치기를 시도하자 황희가 계속 반대하다가 나중에는 '그래 왕 니 맘대로 해라'는 투의 발언을 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 모든 난장판의 뒷수습을 전담한 건 황희 할아버지...

      자두맛사탕 / 읽어주시는 분이 재미나시다면 이야기꾼은 소임을 다한 것이지요 ㅠㅠ

      liece / 쪽지 드렸습니다,

      digool / 게으른 저를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 홍보(?)도...

      brunette / 책도 결국 큰 줄기를 위해서 작은 이야기는 희생하기도 한답니다. 결국 내킬 때 하는 이야기가 제일인지도.. ㅠㅠ

      갈라 / 인터넷에서는 나오는대로 그냥 지르니까요 ㅎ 그런데 책으로 내려면 좀 점잖게 다듬어야 하긴 하죠...

      레사 / 가, 감사합니다. 다른 댓글을 보시면 힌트를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가메라 / 저야 이야기꾼이지 드라마 작가는 아니니까, 이런 소재로 쓸 분이 있으셔도 좋을텐데 말이죠.

      에아렌딜 / 그건 제가 제일 보고 싶네요...

      쑤우 / 예, 그렇죠, 나라와 후손들에게는 참 고맙지만 당대의 공무원들에게는 저승사자였던 세종이었습니다. ㅎㅎ

      digool / 아뇨 그 재미라는 게, 결국 '제'가 재미있어야 하는 거라서뤼... ㅎㅎㅎㅎㅎㅎㅎㅎ
    • 여름숲 / 감사합니다. 다음 또 좋은 글이 나오면 찾아뵙겠습니다.

      cksnews / 오랜만입니다. 낯익은 닉이라서 더욱 반갑습니다.

      강태공 / 제가 사는 곳까지 오시면 싸인 해드리죠. (싱긋) 전 소심해서 세상 외출을 하는 대신 서점 기둥 뒤에 숨어 제 책을 읽어주시는 분을 매의 눈으로 관찰한답니다.

      힌트 / 그럴지도...? 사실 천민 출신이 상호군까지 되었는데 정말 미운털 많이 박혔을 겁니다.

      a.glance / 잊지 않고 기억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워류겐 / 감사합니다 :)

      생강 / 책까지 봐주신다니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약간 부끄럽네요 홍홍홍.

      고코 / 아, 오래 보아주셨군요. 또다시 필신님이 내리도록 굿이라도 해야 겠습니다.

      라면포퐈 / 감사해요 ^^

      Silencio / 그냥 읽어봐주시는 것만으로도 많이 감사합니다.

      형도. / 그래도 꼰대 정조보다 나을 겁니다. 응, 진짜로요.

      블루 / 즐거우셨다면 제가 더 기쁘네요 ^^

      듀란듀란박사 / 저야 이야기꾼이니까요. 결국 역사는 사람의 이야기니까 재미나게 이야기하면 정말 좋거든요. 의욕도 나고 시간도 날 수 있음 좋겠네요.

      라곱순 /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

      장생 / 그렇겠지요. 사실 왕을 한 개인으로 보기 뭐한 게 당대 최고의 두뇌들을 조교(...)로 부려먹는 위치였거든요. 기존의 논문들 다 읽고 정리해오게 하고 브레인 스토밍 시키고 기타등등만 해도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합니다. 후대의 정조만 해도 초계문신들 잘 써먹어서 책을 2천권 펴내기까지 했으니까요. 그래서 말씀하신대로 재주는 열심히 집현전 곰들이 뛰어넘고(...) 창제는 세종이 스슥 했겠지요. 다만 역시 대단한 업적이라서 이리 말이 많은 듯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알고 총괄하고 지휘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세종은 굇수가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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