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이상하게 생긴 여자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이상하게 생긴 여자 얘기는 사실 별 의미없이 쓰기 시작했죠.
그냥 좀 심심했고, 
우연히 출근길에 만난 여자를 관찰하면서 그걸 글로 옮긴 것뿐이었죠.
그 여자가 마음에 들었다?
글쎄, 그것보다는 그냥 심심했다, 라고 말하는 게 맞을 것 같아요.
사람들에 치여 어딘가로 실려 가는 출근 시간이 너무 아깝잖아요.
누구라도, 사람들을 구경하고 관찰하는 건 재미있죠.
그냥 그 여자를, 그 여자의 행동을, 그 여자의 삶을 지켜봤을 뿐이에요.
단지 관찰하는 것만으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죠.
아니, 상상하고 싶었다는 것이 맞는 말이겠죠.
어쨌거나 그건 아무 것도 아닌 일이죠.

그 얘기는 다 사실이랍니다.
그 여자에 대한 제 감정만 빼고 말이에요.
한마디도 나눠보지 않고,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어떤 종류의 감정이 생겨날 수 있겠어요.
단지 지켜보는 것만으로?
물론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런 식으로 지켜보는 건 아니죠.
멍청히 손잡이만 잡고 가는 시간을 통해서 그 사람의 무엇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만약 그런 식으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건 동물적인 어떤 감정이겠죠.


그런데 인간이란 참 우스운 존재 같아요.

생각이 사랑을 낳거든요.

전 정말 그 여자에게 별 감정이 없었어요.

단지 좀 이상하게 생겼고, 왠지 터프해서 보통 여자와는 다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죠.


뭔가가 잘못되기 시작했다면 듀게에 글을 올린 것이 원인일 거예요.

그 여자는 며칠 뒤면 모두 잊어버리고 마는, 출근길에 만난 수많은 여자 가운데 한 명으로 그칠 수도 있었죠.

하지만 그 여자는 듀게에 올린 글을 통해 제 머릿속에서 분명하고 구체적인 뭔가가 되기 시작했어요.

아무 의미없이 재미로 올린 글인데 말이에요.

피그말리온 얘기랑 비슷한 건지도 모르겠네요.


사실은 어제 퇴근길에도 그 여자를 만났어요.

몰랐는데 같은 버스를 타고 왔더라구요.

같은 시간에 퇴근을 한다고 치고, 

출근하는 길의 역순으로 가다보면 서로 마주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겠죠.


버스 안에서 신발끈이 풀린 것을 봤기 때문에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저는 정류장 벤치에 앉아 신발끈을 묶었죠.

비가 내리고 있었어요.

소나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금방 그칠 것 같지는 않았어요.

신발끈을 다 묶고 나서 그 여자가 걸어가는 모습을 발견했어요.

제법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는데 우산도 없이 그냥 걸어가고 있더군요.

무슨 옷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파란 천조각을 머리에 우산처럼 받치고 있었어요.


이상하죠, 저는 괜히 뛰어가기 시작했어요.

마치 허둥지둥 비를 피해 뛰는 사람인 척하는 것처럼.

그건 정말 연기였어요.

전 갑자기 비가 내려도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는 않거든요.

앞서 걷고 있던 그 여자를 지나쳐 마구 뛰었죠.

옷으로 머리 위를 받치고 있었지만 그 여자는 분명 제가 뛰는 뒷모습을 봤을 거예요.

어제 얘기했죠, 저는 어떻게든 그 여자에게 저에 대한 기억을 심어주고 싶었다고.

뭐 빗속을 허둥지둥 뛰어가는 모습이 별로 멋있지는 않겠지만 그때는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뒤에서 조용히 따라가 봤자 그 여자가 뒤를 돌아보지 않는 한 아무 소용이 없잖아요.


도로 밑으로 뚫린 굴다리 안에 들어가고 나서야 저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죠.

어둑어둑한 굴다리를 지나 입구에서 걸음을 멈췄어요.

비가 정말 많이 내리더라구요.

이건 그냥 연기를 한답시고 계속 뛰어갈 수 있는 수준의 비가 아니었어요.


어두운 굴다리 안에서 비가 내리는 거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그 여자가 옆으로 지나가더군요.

머리에 받치고 있던 옷은 어디로 가고 없었어요.

어제 그 여자가 왠지 삼총사의 총사들이 입는 겉옷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고 했잖아요.

여자는 그대로 빗속으로 걸어갔어요.

비가 좍좍 쏟아지는데 정말 태연하게, 조금은 씩씩하게, 그냥 걸어서 자기 갈 길을 가더군요.

난 원래 이렇게 터프한 여자야, 하고 말하는 것 같았죠. 


내리는 비를 다 맞으며 걷는 여자를 한참 지켜보았어요.

그 여자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굴다리 안에서.


그러니까 사랑은 이런 거죠.

그 사람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좋아지는 거예요.

보면 볼수록 좋아지는 거예요.

물론 기본적으로 상대에 대한 호감을 가진 상태에서 말이에요.


어떻게든 그 사람이 나를 생각하게 만들어야 해요, 그 사람의 사랑을 얻고 싶다면.

마찬가지죠.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면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 사람을 생각해야만 해요.


자,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어떻게 해야 그 여자가 잠시라도 저를 생각하게 될까요.


그 여자가 뒤에서 오는 것을 느꼈을 때,

굴다리에서 뛰쳐나가

웃통을 벗고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벌리고 

"비야 내려라, 나는 내 운명을 저주한다!"

그러면서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막 할 걸 그랬나 봐요.


그럼 집에 가서도 분명 저에 대해서 생각을 했을 텐데 말이에요.







    • 저는 버스에서 내려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맞고 걸어가는데, 누군가 뒤에서 우산을 씌워주신 적이 있어요.
      저기, 괜찮으시면 같이 쓰고 가실래요? 하며 우산을 씌워주셨는데,
      그 기억이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요.
    • 존재감이 아예 없는것보다는 미친 분이라는 각인이 더 낫다는데 한표. 그러나 결국 그러다 마실거면서.
    • brunette/ 어 저도 그런 기억이 있어요. 한 십년 전에. 그 분이 그 분일지도. 저는 그냥 말없이 뒤에서 몰래 씌워주고 있더라구요.참 좋은 기분이었죠.
    • 엇, 이런글 재밌습니다.
      그 여자가 님을 생각하게 하려면 강렬한 눈맞춤을 시도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요. 분명 잠시라도 생각은 하게 될겁니다.
    • brunette / 좋네요... 어제 제가 만약 우산이 있었다면 분명 그 여자에게 같이 쓰자고 했을 겁니다. 저도 그게 너무 아쉽더군요.

      poem II / 맞아요. 이러다 말겠죠 뭐. 그게 그 여자와 저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가능성이 높은 일이 아닐까 싶네요.
    • 윙윙 / 눈맞춤 말고 좀 더 효과적인 게 있을 겁니다. 그걸 찾아야 해요. 눈이야 시선을 피해 버리면 그만이잖아요. 계속 쳐다보면 그건 부담만 주게 될 거고...
    • 진심으로 믿을 뻔했어요....
    • 사랑에 빠지는 게 아니라 사랑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같아요.
    • 와우.글 정말 맛깔나게 잘 쓰시네요. : ) 글을 보면 출퇴근시간에 또 우연히 만나실수 있을거 같은데요. 다음엔 꼭 말이라도 걸어보고 4회를 써주세요.
    • 별빛마녀 / 그냥 은유적인 얘기로 읽으셔도 상관없어요. 사실이건 사실이 아니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ㅎㅎㅎ

      오롤로 / 헉, 아무렇지도 않게 멋진 표현을... 좋은 표현인데요... 흠... 다음에 제가 좀 써도 되겠습니까? ㅎㅎㅎ

      안티프리즈 / 굉장히 심오한 고민에 빠져들게 만드시네요. 아무튼 그냥 이대로 아무 일도 안 일어나지는 않을 겁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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