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낭] 수능에 대한 기억

1.

수능날이네요. 이런날 태릉-염창동-용인-응암동-염창동-논현동-대치동 까지 이동하려니...

눈뜨자마자 지금까지 운전만 한 기분입니다.

열두시쯤 라디오에서 전현무 아나운서가 수능 이야기를 하더군요.

얘기를 듣자하니, 그분이 저보다 어리군요. 200점으로 첫 시험, 400점으로 두번째 시험이라니..

아무튼 그 이야기를 듣던 청취자가, 전현무 아나운서가 나이가 굉장하다는 말을 들으며

95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더군요.

 

 

2.

나름 수능 1세대입니다.

제가 고 1때, 고3 형들이 첫 수능을(일년에 두번이었죠) 봤으니,

입학시기부터 수능을 준비했던(?) 세대라고 볼 수 있죠.

저는 시골에서 중학교를 나오고

나름 고등학교를 시 지역으로 유학온 상태였습니다.

입학전 겨울방학때 보충수업을 하던 - 하지만 그 지역에선 2등학교 - 곳이었죠.

3월2일 입학식날도

8시에 등교해서 두시간 수업을 듣고, 10시에 입학식을 하고, 그날 밤 10시까지 자율(이라고 쓰고 타율이라고 읽는다)학습을 했던 곳이었어요.

제가 그 학교에 간 이유는 단 하나,

그 동네 인문계 고등학교 중 몇 안되는 '남녀공학' 이었기 때문이죠. ㅎ

 

 

3.

수능을 100일쯤 남기고

연애를 시작했습니다.

같은 써클의 1학년 후배... 제 인생의 첫사랑이라고 늘 말하는 아이었죠.

연애래봤자 야자끝나고 데려다주는게 데이트의 전부인 수준이었음에도

무척이나 즐거웠습니다.

게다가 1학년과 3학년은 자율학습이 끝나는 시간이 달라서,

늘 땡땡이를 치고 데이트를 했죠.

 

 

4.

이 글을 쓰게 된 중요한 계기죠.

전 수능을 제가 다니던 학교, 제가 쓰던 교실에서 봤습니다.

우연이 빚어낸 최고의 선물이었죠.

춘천권 아이들이 춘천시내의 각 학교에서 시험을 보는데

우리 학교가 남자/자연계 학교로 배정된 겁니다.

그렇다고 150여명의 우리학교 학생들이 전부 우리학교에서 시험을 본 건 아니고

열댓명 정도가 우리학교에서 봤던 것 같네요.

교실별로 한명씩밖에 안들어가는데, 기연이 겹쳐 저는 우리반 교실에서 시험을 봤지요.

 

게다가,

라지에타가 있던 학교에서, 복도쪽 두번째 줄이라는 최고 좋은 위치에 제 수험번호가 있었고,

앞에서 두번째 자리였지만

당시 몇명의 결시생중 세명이

제 앞과 좌우 자리였습니다.

물론, 스피커도 제 정면이었구요.

 

아..

추가로, 우리학교는 기숙사가 있는 학교였고

전 기숙사생이었으며

수능당일날 점심때, 차가운 도시락이 아니라

뜨끈한 국물이 나오는 기숙사 밥을 먹을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을 가졌었죠. ㅋ

 

5.

시험 전날, 저녁을 먹고 일찍 기숙사 방에 들어갔습니다.

그냥 책상앞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다가

그래도 이젠 자야겠다고 일어나는 순간

삐삐가 와 있는 걸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아뿔싸~

여자친구를 깜빡 하고 있던 거죠.

여러개의 삐삐메세지가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온 것이 약 30분전...

학교 앞 편의점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메세지였죠.

 

그시각이 10시50분쯤...

정말 메세지를 확인하는 순간 총알같이 뛰어갔습니다.

영화에서처럼

그 추운날 두시간을 밖에서 떨며 기다리던 여친이 보였습니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의 낭만이라고 생각해요. 아.. 그립네요)

 

떡과 쵸콜렛, 선물을 받고

집과 기숙사를 왕복하며 서로 데려다 준다고 했던게 기억납니다.

결국 새벽 한시쯤 되서야 헤어지고, 잠자리에 들었어요.

 

 

6.

수능 2교시...

수리영역 시험을 완전히 망쳤습니다.

요즘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수리영역 첫페이지는 난이도가 꽤 쉬운 문제들로 가득한데,

긴장을 했던지 잘 안풀리더군요.

당황을 하니, 첫페이지 풀다가 맨 마지막 페이지를 풀고

시간을 잡아먹고 맘은 더 조급해지고

앞뒤를 왔다갔다 하면서 푸니...

 

3년간 모의고사땐 한 번도 그런적이 없었는데,

본시험에서 아주 제대로 삽을 푼 겁니다.

 

2교시가 끝나고 점심을 먹고

기숙사 방에 가서 누웠습니다.

채점을 안해봐도,

수리영역에서 평소보다 10~15점정도 낮게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도 15점 정도 낮게 나왔죠. 200점 만점에 15점이니.. ㅠㅜ)

 

'그냥 시험 보지 말까?'

 

 

한참 고민을 하다가, 결국엔 시험을 봤지요.

 

 

 

7.

그 아가씨의 바램대로 서울로 대학을 왔고,

전 자유로운 대학생, 그 친구는 치열한 고등학교 2학년으로,

그렇게 멀어져갔습니다만,

 

수능100일전, 혹은 수능날이 되면

그 친구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아...

2월 14일, 고등학교 졸업식이 끝난 학교 옥상에서,

하얗게 날리는 눈송이 아래서 나누었던

첫 키스이자 마지막 키스도 생각나네요.

 

지금은 한 아이의 엄마(마지막으로 확인한게 8년전이니 아이가 더 있을수도 있겠네요)로

잘 살아가고 있겠죠?

 

 

 

8.

뭐지?

수능으로 시작해서, 첫사랑 이야기로 마감되는 이 괴상한 전개는?

이제 일해야겠네요.

퇴근길엔 차가 덜 막혔으면 좋겠어요.

이만 총총.

    • 흑 엄청난 염장글이네요 ㄷㄷㄷ
    • 저는 십여년전에 시험봤어요. 수능날은 맨날 춥다던데, 저는 큰이모가 선물해준 내복 입고 갔다가 따뜻한 남쪽지방 + 직사광선이 내리쬐는 창가쪽 자리 + 뜨끈뜨끈한 라지에타 옆자리 라는 환상적인 콤보로 땀내면서 시험쳤어요. 오엠알카드는 땀때문에 번지는거 같고, 그렇다고 수능보다 막 옷벗을수도 없고, 그랬던 기억이나네요.
    • 그 당시에는 수능 끝나면 하루 이틀 쉰다음에 '자 이제 본고사 공부해야지'하던 때였죠. 11월에 수능 본다음에 한달 남짓 더 공부해서 1월 중순에 본고사 봐야했던 그 시절이군요.
    • 사람 / 지금은 회사 없어질 걱정하는 배나온 아저씨일뿐..
      쵱휴여 / 요즘에는 라지에타 쓰는 학교가 거의 없겠죠? 그거 땅땅거리는 소리에 집중안되고 그랬는데..
      오보나에 / 본고사... 모의고사만 대여섯번 봤는데, 수학 최고점이 12점이었다는...(120점 만점) /
    • 저도 라지에이터 옆에 붙어서 시험봤어요. 강의실은 추웠던 것 같은데 제 자린 굉장히 더웠죠. 터틀넥 입고 갔다가 멀미 나서 죽는 줄 알았어요.
    • 6번이 제 수리영역 괴담과 흡사한데..나머지 때문에 울고 갑니다. ㅠ
    • 안녕핫세요 / 라지에타 옆은 평소에도 앉기 싫은 자리지요. 처음 들어가보는 교실에, 12년 공부의 결과측정하는 시기에 그런 조건은..
      푸른나무 / 한 친구는 정말 2교시 끝나고 안들어갔지요. 문과녀석이라, 나중에 어떻게 사는지 얘길 듣진 못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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