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근 깊은 밤, 당신의 문자 메시지

 

 답문

 

 햄버거를 먹다가,  주름부분이 터져서 자꾸 헛바람 소리가 나는 불편한 빨대로 집중해서 콜라를 마시는데 핸드폰이 울려요. 

 월요일에는 새로운 한주가 시작이라고, 금요일이 가까워지면 조금만 더 힘내라는 그런 문자들이 대부분이죠.

 돈을 빌려줄테니 일단 내게 전화하라고, 브랜드 세일인데 우리는 패밀리니까 꼭 와서 30~70% 할인 된 가격에 만나자고, 

 오늘 축구하는데 치킨 원하면 덤으로 링클케어 크림을 주겠다고... 뭐 그런 다정한 문자들 말이예요.

 더구나 오늘은 야근인데 이런 문자들 얼마나 반가운지.

 

 가정식 백반집에 가서 점심을 먹었어요. 오늘-

 사람의 말이란 게 얼마나 무서운지, 4년 전에 이 근처로 사무실을 옮기고 지인을 만났는데 

 그  집 앞을 지나면서 "저 집은 맛없어. 가지마"라고 한마디 한 걸 오래도 기억한거죠.

 그래서 4년 내내 한번도 안 갔던 집이예요. 저도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말했죠. "저 집 맛없어. 가지마"

 오늘 누군가와 점심을 먹기로 했는데 하필 그 집에 가자고해서 갔었는데 웬걸, 너무 맛있는 거예요.

 표정도 없고, 간혹 손도 떨고 하지만 노련하게 쟁반을 나르는 할아버지가 테이블 서빙을 보시더군요.

 할머니가 주방에 계시다는데 모습을 보지는 못했어요. 방에 앉았는데 근처에 미술학원이 많아서 입시 실기를 앞둔

 고3 처자들이 많이 와 있었어요. 바로 옆 테이블에 그런 처자들 네명이 앉았는데 말하는 게 정말 귀여운 거예요.

 전에 먹고 간 손님들이 남긴 음식이 채 치워지기도 전이었는데 한 아이가 젓가락을 꺼내서 남긴 음식을 먹는 거예요.

 고추장 불고기였는데 조리된 후라이팬 그대로 나온 거라서 눌러 붙어 있는 걸 떼내서 먹더라구요. 그걸 보던 친구가

 "그걸 왜 먹어. 이 더러운 년아" 라며 말리더군요. 텍스트로 옮기니까 과격하게 들리는데 어떻게 설명할 수도, 흉내낼 수도 없는

 정 담긴, 하지만 분명 화난 그런 말투였어요. 그 말을 들은 그 젓가락을 든 아이가 "사람이 먹다 남긴건데 이게 왜 더럽냐"라는 거예요.

 "그래도 남이 먹던건데 그걸 쳐먹고 싶냐?" 라고 하는데도 지지 않고, "우리도 시켜먹어야 하니까 내가 대표로 맛 보는 거 아냐!"

 

 싼 거 먹자, 그래도 맛 있는 거 먹고 싶어, 우리 빨리 먹고 가야 오늘 집에 간다. 라며 티격거리는데  밥값이라도 대신 내주고 싶었어요.

 밥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한 아이가 "가족 중에 아무나 이 근처에서 식당했으면 좋겠다. 그럼 밥값 굳는건데"라고 하니까

 아이들이 맞아- 나도- 나도- 하며 맞장구를 쳐요. 그러니까 또 "우리 할머니 음식 잘 하시는데 할머니가 차리면 좋겠다"라며 말을 이어가요.

 그말을 들은 친구가 대뜸 "너네 할머니 착해?" 하고 물어요. 너네 할머니 착해? 라니- 하하- 

 그 질문에 아이는 "할머니인데.. 할머니는 다 착하지"라고 답하더군요.

 정말이지 너무 귀엽고 빵- 터져서 밥 먹는 거 멈추고 물 마시면서 심호흡했어요.

 그렇죠. 할머니는 착하죠. 가족 중 누군가 식당을 하면 밥값이 굳고, 사람이 먹다 남긴 음식인데 더러울 이유가 있나요 뭐-

 잠깐 동안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기분이었지만, 그래 너희들 말이 모두 옳아! 하고 동의했어요.

 

 야근이예요. 햄버거 집은 한참이나 멀었어요. 오래 걸었고 돌아와 사람들과 회의를 했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물을 들고 온 이에게

 마음에 들지 않은 말투로 재작업을 요청했고 그래서 마음이 좋지 않아요. 당분간은 뾰족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고

 서로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마음이 그런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마음인걸.

 자리로 돌아와 백현진의 '반성의 시간'을 들어요. 일이 많고 힘이 듭니다. 하지만 결국 다 해내리라는 걸 알아요. 잘할 거예요.

 오늘 좀 놀면 내일 밤 새야 하고, 오늘 밤 새면 내일  피곤해서 밤 샐 수 있을까 걱정인 그런 날들이예요.

 열심히 일하며 천천히 나를 설득할 작정이예요. 최선을 다했으니까 이쯤이면 괜찮아-하고요. 

 답문을 보냈으니 저는 이제 진짜 야근합니다. 약속은 지켜요.

 

 

   

    • 글 좋네요, 술술 다 읽었어요. 힘드시겠지만 야근 잘 하시고요. :)
    • 아주 그래 좋아 속삭이는 날들 입니다.
      그아이들 말하는거 재밌네요 그걸 왜 쳐먹어 왜 사람이 먹다 남긴건데
      할머니는 다 착하지
    • 아니...
      글이 왜 이래요?
      너무 좋잖아요.
    • 야근 마치고 방금 집에 와서 옷도 갈아입기 전에 이 글 먼저 휘리릭 읽었습니다. 글이 어쩜 이리 좋나요. 일 잘 마치고 조심히 들어가시길.
    • 글을 참 맛깔나게 쓰시네요.
    • 여고생들 너무 귀여워요. 할머니 착해라니~ㅎㅎ
    • 아 저도 그런 느낌 알 거 같아요. 학생들이 이야기 하는 모습들이 순수하고 예뻐보일 때가 있거든요.
    • 오랜 세월을 지내고 나면 지금의 저처럼 작은 일에 화내거나 흥분하거나 미워하지 않게 되니까 할머니는 다 착하신걸까요? 전 착한 할머니가 될것같지 않아요....ㅠ 여고생들 정말 귀여워요
    • 이 글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나요...예쁜 학생들이네요.
    • 이거 스크랩하러 로그인했어요.
    • '반성의 시간'을 들으며 야근하는 분이 저말고도 또 계셨군요.
      젓가락 한벌이 낙하하는 대목부터 어깨가 조금씩 쳐지기 시작하지만, 그래도- 조용한 사무실에서 밤에 혼자 들으면 참 좋아요.
    • 고3 처자들 대화 뭐라 표현하기 힘든 방식으로 마음에 와닿네요. 하나부터 열까지.

      그리고, 할머니는 다 착하지.. 라니. 아, 할머니 그리워요.
    • 학교앞 편의점에서 제가 주워듣는 여고생들의 대화는 쌍시옷 육두문자가 대화의 2/3 이상을 차지하던데..;
    • 글이 너무 따뜻하고 좋아서 로긴했어요. "그걸 왜 먹어 이 더러운 년아" 이거 어떤 말투인지 알거같아서 웃음이 나요...전 중학생들을 자주 보는데 윗분 말씀처럼 육두문자가 난무하는 그런대화들이죠. 쌍시옷정도는 접두어나 접속사 같이 느껴질정도로요. 그치만 잘 들어보면 또 나름 귀여운 내용인 경우도 있긴해요. 잘 듣기전에 식겁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지..ㅡ.ㅡ 오늘 아침부터 기운빠지는 날이었는데 덕분에 기분 좋아졌어요.^^
    • 와- 좋다고들 해주시니까 저도 좋네요.

      차차 / '반성의 시간' 좋죠. 예전에 어어부밴드 공연에 간적이 있었어요. 그때 백현진 씨가 입은 니트 겨드랑이가 터져있는 걸 발견하고 공연 내내 혼자 웃었어요. 그 기억이 오래 가네요. 노래 들으면서도 그 생각에 한번씩 웃어요.
      아! 얼마 전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사무실 막내쯤 되는 이가 자기 자리에 앉아서 훌쩍거리는 거에요. 감기인가해서 관심있게 보는데 울고 있더라구요. 놀라서 가까이 가서 가만히 봤더니 저를 안심시키느라 그이가 서둘러서 "노래가 너무 슬퍼요"라고 하는거예요. '학수고대했던 날'이었어요. 노래가 사무실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었거든요. 일하다 노래가 슬퍼서 울어요. 신기하고 예뻤어요. 그래서 겨드랑이 터진 얘길 해줬죠. 도움이 됐을까요.

      폴리리듬 / 저도 할머니 보고 싶어요. 아주 많이요.
    • 이런 글 계속 써주세요.
      작가이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 ㄴ jesuisseule / 괜히 으쓱해지는데요.

게시판 2012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462,411 01-31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147,946 12-31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122,155 04-01
130354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10 189 12-31
130353 아바타 3를 보고 유스포 2 194 12-31
130352 [핵바낭] 올해 잉여질 결산 잡담 14 336 12-31
130351 아바타: 불 과 재 보고 왔어요 짤막 소감 6 234 12-31
130350 [영화강추] '척의 일생' 8 250 12-31
130349 흑백요리사 2 8~10회, 싱어게인 4 탑 4 결정 6 287 12-31
130348 Lacombe Lucien(1974) 7 131 12-31
130347 [관리] 25년도 보고 및 신고 관련 정보. 15 325 12-31
130346 Isiah Whitlock Jr. 1954 - 2025 R.I.P. 2 139 12-31
130345 [왓챠바낭] 우편배달부 말고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잡담입니다 12 269 12-31
130344 [넷플] 말 많고 탈 많은 '대홍수' 드디어 봤습니다 14 456 12-30
130343 [반말주의] 다들 올해 고생 많았어!! 새해 모두 건강하고 복 터지길 바래!! 12 188 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