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일, 베리만, 테렌스 멜릭, etc

어쩌면 약간의 스포일러.






작년 영상자료원에서 정성일 평론가의 고다르 해설 상영이 있었습니다

시네마떼끄의 추억들을 조곤조곤 늘어놓다가

상영회 마지막에 이렇게 묻더군요, '영화'를 처음 본 건 언제였느냐고

그러니까, 처음 본 영화가 아니라

처음으로 '아, 내가 <영화>를 보고 있구나'하고, 영화 그 자체를 처음 '보게'된 순간을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물론, 평론가라면서 저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내쉬던 스노비쉬한 한숨은 덤입니다)


미취학 아동 시절, 그러니까 나이가 한 자리수였을 때부터

ebs를 중심으로 한 그 밖의 채널들에서

주말 낮에 해주는 영화를 보는 것이 어쩌다 나름의 오락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드라큘라, 브라질, 블랙 오르페같은 작품들을 보았던 기억은 아직까지도 생생합니다

심오한 흑백 화면을 들여다보는 게 오락인 채로 자라나서 그런지

사실 지금까지도 웬만한 예술 영화에 붙어있는 '지루함'이라는 딱지를 아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여긴 영화 게시판이니까 예술 영화를 사랑하는 분들은 아주 많겠지만

저로선 예술 영화 특유의 침묵이나 롱테이크, 나레이션 등등에 붙는 그 '지루함'이라는 걸- 인내하거나 혹은 좋아하거나 하는 게 아니라 아예 감각조차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죠

한없이 걸어가는 '붉은 사막'의 오프닝이나, 끝없이 이어지는 '일식'의 엔딩과 같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로 가는 소위 건널 수 없는 강들도 

'노스텔지아'로 대변되는 극악의 롱테이크들도 다 보고 나서

어디가 지루한 부분인지 짚어내라면 짚어낼 수 없을만큼 아예 감각 기관이 마비돼 있는 겁니다

전 그게 다 가난하고 내성적인 아이에게 오락이 되었던 주말 낮의 흑백 영화들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러닝타임은 확실히 길죠. 하지만 작은 이야기를 늘인 게 아니라 훨씬 더 거대한 무엇을 줄이고 줄이고 더 이상 줄일 수 없을만큼 줄여 놓아서 더는 짧아질 수 없지 않던가요? 더 길었더라도 좋지 않던가요?)


그러니 이제는 세상이 바뀌어 어디서 누구와 이야기조차 나누기 힘든 안토니오니나 다르덴들, 위라세타쿤과 트뤼포 등을 사랑하는 것도 제 잘못은 아닌 겁니다

(오랫만에 좋아하는 감독들 이름을 부르니 왠지 속이 시원해집니다. 리베뜨! 쿠스트리차! 샤브롤! 알드리치!!)

그리고 그 가운데 거대한 섬처럼 놓여있는 것은 물론 베르히만, 잉그마르 베르히만이죠


중고등학생 시절엔 베르히만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동네 영화 마을에 가서 대여섯 편을 엄선해 와

밤새도록 홀로 비디오를 돌려보며 상영회를 하는 것이 방학 때마다 거치는 행사와 같았습니다

그리고 길게 돌아온 이야기는 여기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죠

죽음과 두는 체스, 흑백 화면 너머의 묘한 표정들, 클로즈업들, 죽음과 추는 춤... 

너무나 강렬해서 혹은 희미해서- 어린 시절 꾸었던 꿈인 줄만 알았던 그 모든 이미지들, 이야기들이 '제 7의 봉인' 속에 담겨 있던 겁니다

어린 시절을 지배했던 이미지들, 씬과 씬 사이의 뉘앙스들, 무엇이 우스웠는지도 모를 농담들, 무언지 모를 낯선 공포감. 

베르히만을 사랑하는 10대의 아이로 '제 7의 봉인'을 처음 보는 순간, 

'영화'를 처음 보았던 미취학 아동의 생생하게 각인된 체험이 중첩되어 떠오른 거죠

네, 저는 '제 7의 봉인'을 '두 번' 처음 보았고

'제 7의 봉인'을 통해 '영화'를 처음 보았던 것 같습니다


이제 그런 질문들은 확실히 진부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이 있다면, 

왜 인간은 구원받지 못하는가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왜 인간은 고통받고 증오하고 살인하는가 (처녀의 샘)

신이 있다면 왜 그는 흑사병이나 전쟁과 같은 죽음의 폭주에 침묵하는가 (제 7의 봉인)


신학자의 아들이었던 베르히만에게 종교는

알렉산더를 등 뒤에서 내리치는 거대한 손처럼 삶을 총체적으로 잠식하는 유년의 기억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화니와 알렉산더)

그에게 신은 끝내 구원이 아니었고 

죽음은 삶과 화해할 수 없고, 하나의 삶은 하나의 삶을 이해할 수 없으며 (외침과 속삭임)

인간의 병명은 '인간'이고 신은 침묵할 뿐 아무것도 치유하지 않습니다 (가을 소나타)

그렇기에 인간은 그저 신의 침묵 속에서 따라 함구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고 (침묵)

그러는 와중에도 삶은 고스란히 기억되어 끊임없이 목덜미를 내리치는 거대한 손인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기, 냉정함, 무관심의 벌로 외로움을 선고 받았다, 선처는 없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는지도요 (산딸기)


2007년, 베르히만 감독이 별세하시던 날, 서럽고 감상적이었던 저의 메모에는

'가장 많이 질문하고 가장 적게 대답한 감독'이라고 적혀있더군요

언제나 베르히만의 영화는 무언가에 대한 질문처럼 느껴지는 반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무언가에 대한 대답처럼 느껴졌죠. 그 무언가가 무언지는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모태 신앙으로 태어나 독실한 무신론자로 자란 저에게 늘 아이러니처럼 느껴졌던 건

신의 아들은 침묵을 말하고, 시인의 아들은 구원을 말한다는 단순한 사실이었습니다

타르코프스키의 세계엔 비록 한 아이의 물양동이와 같은 것일 지언정(희생), 구원은 있었으니까요

아주 소박하고 고요하며, 서글프고 평화로운 



그리고 테렌스 멜릭의 트리 오브 라이프를 아주 뒤늦게 보았습니다

인간이 신을 부르는 동안, 신에게 존재할 것을 요구하는 동안

창조론이 끼어들 눈꼽만한 틈도 없는 입자와 반입자의 춤에서 시작하여

성서와 정면으로 위배되는 공룡 시대에 카메라를 정지시킨 지점부터 

부끄럽지만 참 오랫만에 영화를 보고 충격받은 것 같습니다

(많이들 하시던 지루하다는 지적은 반사입니다, 지루함 감각 기관이 없다니까요)


거대한 우주의 티끌만한 지구의 티끌보다도 작은 인간이

신에게 존재하기를 요구하는, 우주 전체와 모순되더라도 존재하기를, 존재하는 게 불가능해도 존재하기를 요구하는 영화라니

그 티끌 같은 인간이- 신과 우주 사이에 가로 놓인, 온 세상만큼이나 거대한 모순을 해명하지도 설명하지 변명하지도 않은 채로 오롯이 끌어안고, 용서하고, 신을 저만치 뛰어넘어 저 스스로 숭고해지는 영화라니


'아버지는 우리더러 식탁에 팔을 올리지 말라고 하신다. 자기는 그러면서.'

이토록 단순하고 명료한 한 마디 안에 온 우주와 그 우주만한 질문들을 다 담아버린 영화라니



뒤늦게 보고 반해 장문의 리뷰를 썼다가 다 지우고 새로 쓰는 글입니다

처음 쓴 리뷰는 너무 진지하고 장황해서 지워버렸는데, 이 잡담은 또 방향이 없군요

대화를 잘 안 하고 살다보니, 요즘은 무언가를 쓰는 감각도 잃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만에 하나 누군가는 호기심이 동해서 베르히만의 어떤 영화를 찾아본다던가, 이제 끝물인 상영관을 찾아 트리 오브 라이프를 본다던가, 못해도 정성일 감독의 카페 느와르를 봐본다던가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통해 우리는 간접적으로 대화를 나누게 될 테니까 그 정도면 된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상관없는 곡입니다, 아무튼



 

 

 

머리칼이 덥수룩해지도록 내버려두지 말라

노란 레인코트를 입을 땐

온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비를 피할 목적으로만 하라

시계 바늘을 조정하지 말라

접근하되, 결코 접촉하지 말고

 마치 벽에 걸린 그림을 대하듯 하라

 

너무 대담하게 걷지 말라

두 손을 얼어붙게 하지 말라

결코 잊지 말되, 상기하지도 말고

방관적 위치에서 거리를 두라

목적없이 맴돌며

근접하되, 결코 도달하지 말라

벽에 걸린 액자를 보듯 그렇게




don't let your hair grow too long / oren lavie

translated by lonegunman


    • 테렌스 멜릭 감독의 영화는 지난번에 보았던 트리 오브 라이프가 처음이었어요. 혹시 지루하지 않을까, 했던 걱정이 무색하게
      흥미롭게 봤던 영화였어요. 영화를 보고 난 후에 받은 포스터를 방문에다 붙였는데 조각보처럼 장면 하나 하나가 이어져 있어서
      볼 때 마다 생각이 나요. 쓰신 글을 보고 나니 미뤄 뒀던 트뤼포 영화를 봐야겠단 생각이 드네요.
    • 이 글을 읽으며 베르히만의 영화들, 그의 세계에 골똘했던 20대 초반이 떠올랐어요. 저에게도 '제 7의 봉인'은 많은 의미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영화거든요.

      테렌스 멜릭, 씬 레드 라인이 처음 본 그의 영화였는데 따질 것 없이 그냥 좋았어요. 트리 오브 라이프는 일부러 보지 않았어요. 아껴뒀다 고플 때 보려구요.
    • 트리 오브 라이프를 볼까 마음이 나네요.
      비옵니다. 12월인데.
    • 전 베리만에 대해 좀 긴가민가하면서도 자꾸 더 파고싶은 감독이어서 억지로라도 챙겨보고 그랬는데 여전히 애매한 면이 있었거든요.
      얼마 전에 빅터 쇠스트롬의 [유령마차]를 보고 나서 베리만을 다시 처음부터 차근차근 보고싶어졌어요. 뭔가 키를 얻은 거 같은 기분도 들고..
      베리만이 영향을 많이 받은 감독&작품이라더라구요. 어쩌면 이미 보셨겠지만 추천하고 갑니다 ㅎㅎ
    • 쓰고 지우셨다는 리뷰가 궁금해요. 저는 트리오브라이프를 보고나서 '모래 한 알의 숭고함'이라는 말이 떠오르더군요. 이 영화는 서로 상반되는 두 목소리가 동시에 나오는 것 같아서 재미있었습니다. lonegunman님 감상은 제 감상과 조금 다르지만 그럼에도 일치하는 면이 많은 것 같아요. 베리히만 감독은 저번에도 관련 글이 올라와서 기억하고 있는데 이 글을 보고 왠지 궁금해집니다.
    • 씬 레드라인을 고등학생때 좋아하던 여자아이와 첫데이트때 봤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전 그영화가 너무 좋아서 마구 얘기를 했지만 그녀의 표정을 세심하게 살피기엔 전 너무어렸죠... 그버릇 못고치고 지금 결혼한 분과의 첫 영화는 <멀홀랜드 드라이브>였지요 하하하 ^-^; 제 개인적인 첫 영화는 피터 그리너웨이의<차례로 익사시키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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