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잡담] 교권, 그런 게 있기는 했더랩니까.


원래는 최치원의 눈물 가득한 취직 도전기를 적을까 했는데 학생이 선생님에게 뻗대는 동영상 때문에 다음으로 미뤘습니다.

교권이 추락하고 있다! 이거 분명히 십 몇년 전에 들은 이야기같은데, 어째 요즘도 계속 나오네요.
아직까지도 바닥에 닿지 않았나봐요.


보통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요즘이 문제다, 옛날에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았다!" 라는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지금이나 그때나 다를 건 없었어요. 선생에게 개기는 게 멋지다고 생각하는 바보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아주 많이 있었죠.

조선시대 때 성균관의 교장선생님이 된 이황(1천원)은 학교의 학생들이 선생님을 보고 일어서서 인사하기는 커녕, 얼음판 위의 바다표범처럼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며 눈동자만 굴린다고 한탄을 했습니까. 것 뿐만입니까, 결석을 밥먹듯이 해서 학교 좀 나와라, 라고 하면 "옷이 없어서요." 라고 팅팅 대고 훈계 좀 하면 선생님이 괴롭힌다고 우우 거리며 떼로 학교를 때려치더랍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성리학의 투 탑 중 하나인 이황 선생에게 대고 말입니다!
뭘 더 바래요!
그런 학생들은 공자나 소크라테스가 선생님으로 와도 바다표범 놀이를 할 겁니다!

 

그래서인지 나중에 선생으로 부임한 율곡 이이(5천원)가 정한 성균관 학칙에는 이런 항목이 있었지요.

 

"선생님 보면 꼭 인사하기. 도망가지 말고."

 

학교 복도에서 선생님을 보는 즉시 180도 돌려 튀는 전통이 그 때도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이후로도 발랑까진 아이들은 나왔습니다.
학교 벽에다가 선생님의 모습을 그리고 비꼬는 시(!)를 적은 거야 나름 귀여운 수준이고, 심지어 스승을 때리는 학생들마저 나왔습니다!
정조 15년에는 학생들이 선생의 상투를 잡아 질질 끌고다니고, 교장선생님(대사성) 방에 쳐들어가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뭐 이건 촌지 작작 처먹은 선생이 돈 받은 순서대로 성적을 매기는 바람에 '돈을 덜 준' 학생들이 난동을 피운 거라 쌤통이라 해야 할지 자업자득이라 해야 할 지.

정조 때, 길거리에서 마주친 좌의정 채제공에게 "야, 채제공!"이라는 반말 드립을 친 아새... 아니, 유생이 있었지요.
것도 그럴 것이 채제공은 남인이었고, 유생은 정통 노론집안 출신이었습니다.
손주 뻘의 유생에게 반말을 들은 노정승은 너무 놀라 충격을 받은 나머지... 유생을 그 자리에서 잡아 유치장(전옥서)에 처넣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눈치채겠지만, 당파싸움이 심각해지면서 자기와 다른 당파의 스승이 오면 우습게 보는 일도 허다했습니다. 당파별로 기숙사도 나뉘어서 들어갔는데 오죽했겠어요? 그리고 선생님이 훈계를 하거나 야단을 치면 자기 패거리들과 몰려다니며 선생을 욕하며 퉁퉁대기도 했습니다.

한편 채제공이 유생을 가둔 뒤, 그 소식을 들은 유생들이 친구를 구하겠다고 우르르 전옥서에 몰려가서 더 큰 소동이 벌어지긴 했지요. 결국 사고 친 유생의 아버지는 아들을 잡아다가 호되게 혼을 냈고, 할아버지는 직접 채제공에게 "죄송합니다, 우리 애가 쫌..." 이라고 사과까지 했습니다. 이걸 보면 나름 양식있는 가족이었는데 그렇게 엉덩이에 뿔난 송아지가 나온 듯 합니다.

 

이것말고도 굉장히 많은 일들이 있었죠. 솔직히 시대를 막론하고 대체 어떻게 하면 스승을 공경하게 하느냐, 가 영원한 골칫거리였습니다.
정신 들 때까지 때려주면 된다고요? 그게 소용 있겠어요? 체벌이야 당연히 있었지요. 요즘보다 훨씬 심할지도 몰라요. 맞다가 죽은 사람도 나왔으니까. 그렇지만 그 문제로 고민하던 중종이 이런 말을 했지요.

 

"선생이 가르쳐주려고 해도 학생이 안 배우겠다면 때리고 혼내도 될 리 없잖아..."

 

체벌 문제를 이야기할 때 이보다도 더 좋은 대답이 있을까 싶어요.


이렇게 버릇없는 아이들이 많고 막장인 학교에서 뭘 배우겠냐, 제대로 된 인재가 나오겠느냐 하겠지만...
이황, 이이 때 그렇게 막장이던 성균관이지만 그로부터 수십년 뒤 임진왜란이 터지자 다들 열심히 알아서 나라를 지켰습니다. 잘 되었어요, 해피엔딩, 해피엔딩.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아무리 교권이 추락하고 있는 듯 없는 듯 해도, 정말 훌륭한 내일의 인재들은 알아서 잘 해요.
너무 낙관하지 말아요.
아무리 좋은 선생님이 잘 가르쳐도 골때리는 말썽꾼들은 끝없이 나올테니까요.
 
이 글을 보시는 분들, 모두 어릴 때가 있었을 거여요. 멋도 모르고 철도 모르고, 어른과 권위에게 뻗대는 것이 엄청 멋있어보이던 시기. 그렇지만 언젠가 깨닫게 되요. 전혀 멋있지 않다는 것. 그걸 철이 든다고 하는 지도 모르죠. 그 때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찾아오지만, 그 때가 되면 이전 했던 일들은 이불 뒤집어 쓰고 하이킥 하고 싶어지게 되죠. 지금 그 동영상 안의 남학생은 내가 제일 잘 나가~ 하고 배를 뿔룩 내밀고 있겠지만, 언젠가 자기가 하는 일이 우물가에 앉아 개골거리는 양서류와 쌤쌤이라는 걸 깨닫게 될 거여요. 그 때가 되면 "왜 날 안 말렸어!" 라고 원망할지도 모르죠. 그 때는 쿨하게 말하도록 해요. 니 인생 니가 살지 남이 살아주는 거 아니야, 라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렇게 선생님에게 뻗대고 사고 쳐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은 나중에 과거 합격자 명단이나 관직 명단을 눈 씻고 찾아도 없더라고요. 나중에 뭐하고 살았으려나요...?

 


 

    • 이황(1천원), 이이(5천원)에서 터졌습니다. 늘 재미있는 글 고맙습니다 XD
    • 오... 재밌게 읽었습니다. 어쩌면 교권이나, 학생들의 태도도 파동처럼 오르락 내리락 하는... 그런걸까요?



      그런데 요즘은 가정교육에서부터 와르르 무너져버린 느낌이라... 학교교육은 부차적인 문제같구요;
    • 재미있어요. 사실 이 글 말고 저번글도 저저번글도 재미있었어요.
      보통 스마트폰으로 보는데 제 폰은 좀 엉망이라 모바일 로그인이 안되어서 댓글도 못달았지만
      고백하고 갑니다.
    • 늘 잘 읽고 있습니다:D
    • 으음... 그래도 전 교권이란 게 좀 추락하긴 했다고 봅니다. 예전에는 확실히 선생님이라고 하면 상당히(까진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공경하는 이미지가 있었던 것 같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꼭 그런 거 같지 않아요. 아무튼 이 조그만 시골 도시에서도 과거와는 확연히 그 차이가 느껴지니 대도시에선 완전 딴판이 되었지 않을까 싶군요.
      사실 이런 건 교권의 문제도 있겠지만 인간과 인간 사이의 예절이 어긋나서 그런 게 아닐까하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해봅니다... 결국 예절 교육이 모자라서... 에구구.
      대선배임에도 불구하고 천원짜리의 모델로 기용되신(?) 이황 선생에게 심심한 묵념 1초를 올립니다. :D 푸하핫 오늘도 재미나게 잘 읽었습니다. (__)
    • LH님의 이야기는 고정관념을 깨는 독특한 시각도 있고 사실적이라 좋아요.
    • 아. 역시, 오늘도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부탁드려요~
    • 생각해보니 교권이 흥(?)했던 건 교사의 평균적인 사회적 지위가 대다수 학부모와 학생보다 높았던 시절 잠시뿐이 아니었나 싶어요. 전쟁끝나고 한 90년대까지 정도?
      그 시절엔 교사를 할 수 있으려면 마을에서도 좀 학식이 있거나 재산이 있는 집안의 손이었을테니까요. 시골로 갈수록 더 했을 거고요.
    • 저도 잘 읽고 있습니다.
    • 푸하. 바다표범놀이...멋지네요.~!
    • 조선시대 때 성균관의 교장선생님이 된 이황(1천원)

      그래서인지 나중에 선생으로 부임한 율곡 이이(5천원)


      ----> 여기서 육성으로 터졌습니다. 아놔....ㅋㅋㅋ
    • 주안 / 읽어주시는 게 더욱 고맙습니다.

      D-80 / 모범생-문제생의 비율 불변의 법칙인지도 몰라요. 가정교육이라, 이전에는 좀 그악스러웠습니다. 말 안 듣는다고 아이들을 가혹하게 패는 어른들이 왜 그리 많았나 몰라요.

      이울진달 / 헉, 과연 누가 봐줄까 하는 마음으로 써내려갔는데 계속 봐주신다니 그저 감사할 뿐... ㅠㅠ

      Paul. / 앞으로도 힘낼께요. ^^

      에아렌딜 / 확실히 돈 많고 할일 없는 집안 유지들이 선생을 하던 때가 있긴 했습니다만... 조선시대 훈장의 처지도 꽤 가난한 것이라 몰락한 양반들이 최후로 선택하던 직업이긴 했습니다. 허나 수업료 떼먹는 사람들이 그리 많아서 고생스러웠다더군요.

      파바치 / 그렇게 평가해주시니 웬지 기분 좋네요. ㅎㅎ

      고집멸도 / 힘내겠습니다.

      27hrs / 훈장, 훈도들은 꽤 가난했습니다만... 확실히 근대화 되고 난 뒤엔 부자들 중에서 선생이 많이 나온 듯도 합니다. 그렇다 해도 전문적으로 디비지 못했으니 자세히 이야기할 자신이 없네요.

      양상추 / 감사합니다.

      tea leaf / 바다표범은 귀엽기라도 하죠 이것들은...(...)

      라곱순 / 저 나름으론 회심의(?) 개그였습니다. 재미있으셨다니 기쁘네요. ㅎㅎ
    • 아니 저기 교권 이란 게 그런 걸 지칭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ㅠㅠ
      정치권력 따위에 간섭받지 않고 가르칠 권리를 말하는 거지 권위 같은 걸 뜻하는 게 아닙니다.
      유교적 관념도 아니구요.
      이쪽이나 저쪽이나 참 오해가 많은 용어인듯.
    • 저도 1천원, 5천원 완전 빵터졌어요..ㅋㅋㅋ 인물설명을 한단어로 다 표현하신듯..ㅋㅋ 너무웃겨요 ㅋㅋ

      어떻게 이렇게 역사이야기를 잘 아시는지 궁금하네요..^^ 항상 잘 읽고 있어요!!
    • 잘 읽었습니다. 퇴계보다 율곡이 비싸서 기뻐하는 율곡 얼빠에게 큰 웃음을 주셨어요 ㅋㅋ
    • 잘 읽었습니다.22 언제읽어도 재미있네요.
    • 감동과 재미로 버물버물! 선생님, 잘 읽었습니다. 꾸벅 :-)
    • bebijang / 엇, 좋은 지적 감사드립니다. 제가 잘못 썼나 해서 검색해봤는데 널리 잘못쓰이고 있는 단어네요. 나중에 제대로 수정하겠습니다. 미처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라 감사합니다.

      persona / 그게, 밥 먹고 역사만 디벼서 그렇습니다... 쿨럭. 그냥 이게 하는 일이어요. 재미있으셨다니 다행입니다.

      구들늘보 / 저도 얼빠라서 5천원을 더 사랑합니다. 더 가치가 나가서만은 아닙니다.

      블루 / 감사합니다.

      a.glance / 저야 말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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